자전거 타고 지역구 민심 살피는‘은평구 칸트’한나라당 이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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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고 지역구 민심 살피는‘은평구 칸트’한나라당 이재오
  • 박지순 자유기고가
  • 승인 2008.12.01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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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3대 난공불락 지역서 국회의원 3선 성공 저력과시
주민 대소사 손바닥보듯 알아 골프ㆍ술 못하는 정치인중 하나

“수석하면 대학 보내준다” 아버지 말에 4개월간 두문불출 공부, 중앙대 1등입학 돈에 무관심해 일반 후원금도 안받아 강한 도덕성-타고난 성실성 앞세워 ‘이명박 정권’을 이끌 최고핵심으로...
 
한나라당 최고위원 이재오는 ‘철학의 호수’라 불리는 칸트에 비유되는 특이한 정치인이다. 이재오가 칸트의 철학에 일가견이 있거나 철학을 전공해서가 아니다. 생활습관이 칸트와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칸트는 살아생전에 시간을 철두철미하게 지킨 사람으로 유명하다. 칸트와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칸트의 행동을 보고 시간을 알 수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칸트가 일어나는 시간, 잠드는 시간, 산책 나가는 시간, 산책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의 오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독일에 가면 칸트가 걷던 산책길이 ‘철학자의 산책로’라고 이름 붙여져 있다. 칸트가 사색에 잠겨 천천히 걸어 산책했다면 이재오는 칸트보다는 복잡한 사색에 잠겨 자전거로 지역구를 누비고 있다. ‘이재오의 힘은 자전거에서 나온다’는 이재오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이미 익숙한 말이 돼 버렸다.

이재오가 정치권에서 ‘3대 난공불락’지역이라 불리는 서울 은평구에서 내리 3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전거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이재오는 경북 영양이 고향으로 영남출신 정치인이다. 은평구는 예부터 전라도 출신 사람들이 많이 살아 경상도 출신 후보가 당선되기 힘든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기다 지역 특성상 장기 거주자가 적고 유동인구가 많아 웬만해선 재선이 힘든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은평구는 서울에서는 외곽이어서 개발이 늦어 ‘친여’성향이 강해 야당 후보가 국회의원이 되기 어려운 곳이다. 이재오는 ‘3중고’를 이겨내며 은평구에서만 1996년 이래 10년 넘게 국회의원을 했다.
 
지난 17대 총선에서는 ‘탄핵 역풍’에도 한나라당 후보 중 강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3선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였다. 물론 18대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에게 덜미가 잡혀 금배지를 달지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은평구민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은평구 사람들은 ‘이재오’ 하면 제일 먼저 그의 자전거를 떠올린다. 선거기간이든 아니든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은평구 구석구석을 누비며 지역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 때문이다. 이재오가 자전거로 지역구를 누비기 시작한 지 벌써 15년이나 됐다. 새벽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고 지역에 나선다.

이러다 보니 이제는 어느 문방구 사장님이 바뀌었고 어느 식당 아줌마가 바뀌었는지 일일이 체크하고 기억할 만큼 은평구에 대해서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다. 이렇게 지역 주민들과 직접 친밀하게 접촉하다보니 누구 아들이 결혼하고 누구 아들이 취직했는지 지역 대소사까지 꿰고 있다.

이재오가 자전거와 인연을 맺은 것은 국회의원이 되기 한참 이전이다. 한나라당의 중역으로 정신없이 바쁜 일정에도 자전거를 타게 된 데는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젊을 때 민주화운동을 하며 도망다니느라 도대체 운전면허를 딸 시간이 없었다. 자전거는 이재오에게 훌륭한 여가가 되기도 했다.

보통의 정치인들처럼 골프도 못치고 술도 못 마시고 그렇다고 여행을 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취미도 없었다. 자전거는 이재오에게 자연스럽게 운동도 되고 환경도 보호하고 주차난도 해소시키고 가고 싶은 곳은 골목골목 어디든 갈 수 있고 지역주민들과 살갑게 만나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수단이 됐다.

이재오의 ‘자전거 민심탐방’때문인지 은평구에는 유난히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쉽게 눈에 띈다. 아줌마부터 어린아이까지 자전거 광이 많아 ‘어린이 세발자전거 타기 대회’나 ‘통일기원자전거타기’행사 같은 자전거 관련 행사가 유독 많다. 자전거 행사장에는 늘 이재오가 있다. 여느 정치인 같으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내 인사말만 하고 돌아가기 일쑤인데 이재오는 언제나 맨 앞자리에서 자전거를 질주하고 꼭 완주하고야 만다.

이재오가 자전거를 타고 지역 주민들 앞에 나타나면 반응은 제각각이다. 그냥 모른 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벌써 선거철이냐고 비아냥대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가게 문밖에까지 나와 몇 번이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고 자식 취직 못해 하소연 하는 사람도 있다. 이재오는 따뜻하건 냉정하건 자신을 향한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가감 없이 그대로 읽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낸다.

이재오의 자전거에는 ‘진실성’이 있다. 신문이나 TV에 보면 유명 정치인이 택시기사나 일용직 육체노동을 하면서 서민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려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정치인들은 최고급 승용차에 호화 저택에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보여주는 ‘고생’은 선전용이라는 것이다. 이재오는 다르다. 이재오의 생활은 서민의 그것 그대로다.

과거 가난했던 유명 정치인은 많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고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인제 의원 등도 매우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재오는 다르다. 정치인으로 출세하기 전에도 가난했지만 출세하고 나서도 똑같이 가난한 사람은 아마도 이재오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도 기득권 집단이라는 한나라당 의원으로서 가난을 ‘유지’하기는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일수도 있다.

이재오는 항상 자신을 소개할 때, ‘일월산 촌놈’이라고 한다. 1963년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중앙대 농경제학과에 수석 입학할 때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일찍 고향을 떠나 상경하던 다른 정치인들과는 역시 다른 모습이다.

이재오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징역을 당해 강원도 삼척에서 광부 일을 하다가 해방 후 영양에 내려와 자리를 잡고 농부가 됐다. 이때부터 이재오는 가난을 물려받았다. 어릴 적부터 소작농 생활을 해야 했고 청소년시절 줄곧 농업에 종사했다.

가난한 농민이었지만 이재오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도내에서 주최되는 웅변대회에서 상을 휩쓸어 명연설가로 통했고 경북지역 4H클럽 부회장까지 지냈다. ‘내가 너무 아는 것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대학 진학을 꿈꿨지만 요원해 보였다. 위로 형들이 모두 농사일을 했고 가정 형편 또한 어려웠다. 이재오는 아버지에게 수석합격하면 대학에 보내달라고 요구했고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다.

이때부터 4개월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책이 걸레가 될 때까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달달 외워 결국 중앙대 농경제학과에 수석 입학할 수 있었다. 가난과 성실, 정직은 이재오를 상징 짓는 덕목이 된 듯하다.

이재오는 1990년 가진 돈 850만 원과 대출받은 2000만 원으로 은평구 구산동에 허름한 단독주택을 장만했다. 이전엔 주로 대조동, 역촌동, 불광동 단칸방에서 세를 살았다. 집은 막다른 골목에 있어 주차 공간이 없다. 2년 전 둘째 딸이 결혼할 때까지 이재오는 평생 자기 방을 가져보질 못했다.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 두 딸을 시집보냈는데 사돈댁 형편이 이재오의 형편보다 낫지 않았다. 이재오 정도의 정치적 위치에 있다면 재벌가나 권세가의 집안을 택해 얼마든지 ‘정략 결혼’을 할 수도 있으련만 이재오는 자신보다 가난한 사위를 맞아 들였다. 그는 사위들에게 “장인이 국회의원이라고 도움 받을 생각은 말라”고 미리 일러뒀다고 한다.

지난 2003년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서 이재오는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그는 선거운동기간 중 전국을 돌며 당원들에게 빨간 장미를 나눠 줬다. 당 선관위원들에게도 ‘선거관리 좀 제대로 하라’는 뜻에서 장미꽃을 줬다.

이재오는 “나는 돈이 없어 수백 명한테 밥을 사지는 못한다. 장미꽃은 열렬한 사랑을 의미한다. 모든 사랑을 당과 나라에 바친다는 뜻”이라고 말하며 경선이 끝날 때까지 장미 한 송이를 고집했다. 이재오의 논리는 간명하다. “대표 선거에 쓸 돈이 없으면 돈을 안 쓰면 된다”는 것이다.

대표경선 선거전이 과열되면서 경선에 나온 6명의 후보(서청원, 최병렬, 김덕룡, 강재섭, 김형오, 이재오)중에 유일하게 이재오를 제외한 모든 후보가 당 선관위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이재오는 “돈을 쓰는 사람이 표는 더 얻을 수 있겠지만 이런 사람이 대표가 된다 한들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는가. 야당의 리더십은 도덕성에서 나오는데 과정이 이래서야 리더십이 생기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재오는 돈에 관한한 깨끗한 사람인 듯하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양심에 반하는 일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는데 정치를 하면서 유혹이 따를 수밖에 없는 후원금에 대해서도 분명한 원칙이 있다.

“교육위 시절 지방 사립학교, 교육단체 등에서 오는 상임위 관련 후원금은 전부 돌려보냈다. 국회의원은 포괄적 업무를 하다 보니 여러 군데서 후원금이 오는데 모르는 기업에서 오는 것도 다 돌려보냈다.”

이재오는 강한 도덕성과 타고난 성실성을 무기로 이명박을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만드는데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때문에 이재오는 이명박 정부의 2인자다. 비록 18대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이재오가 어떻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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