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기, "니 애비가 야당인사라서 그 기질을 닮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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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기, "니 애비가 야당인사라서 그 기질을 닮았나"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4.08.23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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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에서 통일로(2)> 민추협의 선봉장 백영기 전 한국방송영상 사장
민주화의 최전선서 달렸지만…지역주의에 ´패배´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민주화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니었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뒤‘당연한 것’이 되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투쟁과 희생이 존재했다. 그 중에서도 김영삼(YS)·김대중(DJ)이 중심인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군정을 종식시키고 민주화의 시대를 열어젖힌 구심점이었다는 것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민추협의 행보에는 항상 선두에 서 있었던 인물이 있었다. 백영기 전 한국방송영상(현 아리랑 TV)사장이다. 민추협 결성 이전부터 그는 YS의 곁에서 최전방 실무를 담당했다. 1979년 YH 사건 당시 신민당 당사에서 YS를 감싸다 뭇매를 맞고 가장 먼저 끌려나왔고, 민주동우회, 민주산악회, 민추협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조직이 없었다. 민추협이 30돌을 맞은 2014년의 여름날, 그는 <시사오늘>에게 자신이 겪었고, 또 다른 민주화의 투사들이 겪어야 했던 고충과 희생에 대해 들려줬다. <편집자 주>

▲ 백영기 전 한국방송영상 사장 ⓒ시사오늘

YS 지키다가 장파열…피투성이로 신문 1면에

YH 무역 여공 사건, 일명 YH 사건은 국내 최대의 가발 수출업체였던 YH무역이 1979년 3월 일방적 폐업을 공고하며 일어났다. 이에 여공들은 4월 13일 농성에 들어갔고, 8월 인명진 목사 등의 주선으로 서울 마포구에 있는 신민당 당사로 들어갔다.

당시 총재였던 YS는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당사를 찾아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노동자들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경찰이 무력을 투입해 YS와 백 전 사장을 비롯한 신민당원들의 저항을 꺾고 강제해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추락사하고 여성근로자 10여 명과 취재기자 1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신민당원들도 30여 명이 중경상을 입게 됐다.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된 이 사건을 백 전 사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제일 많이 맞았다. 차지철의 백골단이 새벽에 쳐들어왔는데 그야말로 새까맣게 몰려온 거다. 한 덩치 하는 장한들이 경찰들의 앞에서 검은 장갑을 끼고 밀고 들어오는데 감당이 안 됐다. 집기로 막고 물을 붓고 하면서 저항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마포구 당사의 건물 사방을 포위하고 기어올라오는데 얼핏 봐도 수백 명은 가볍게 넘어가는 것 같더라.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국회의원이 뭐 하는 놈이야!’하면서 때리고 끌고 나갔다. 나랑 황낙주가 총재(YS)앞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그러다가 결국 제일 먼저 끌려 나가서 건물 밖에 내팽개쳐졌는데 그 사진이 신문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피투성이가 돼서 장파열 등의 진단을 받고 황낙주, 박권흠 등과 함께 병원에 20여 일 입원했다. 이도 부러졌고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여공들은 닭장차에 쑤셔넣어졌다. 그런데 이 여공들에 대해 기억에 남는 것이 있어서 언급하고 넘어가야 겠다. 200여 명 가까이 되는 여공들이 당사에 머무는 동안 그렇게 질서 정연할 수 없었다. 식사를 시켜줘서 밥을 배식하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뒤로 갈수록 음식이 모자라고 다 식어 빠져도 끝까지 불평하는 이 하나 없었다."

정권의 탄압, 사무실 구하기도 어려운 민추협

1984년 5월 민추협이 만들어졌지만 사무실을 구할 수가 없었다. 전두환 정권이 이미 종로 일대의 건물주들에게 사무실을 빌려주지 말라고 협박을 한 뒤였다. 그래서 발길을 돌리기를 수차례, 서울 관철동 대왕빌딩에 어렵게 사무실을 얻었다.

13층이라곤 하지만 12층 빌딩의 옥상에 있는 사실상 옥탑방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민추협임을 숨겼으나 결국 건물주가 알게 되어, 계약을 일방 해지하고 사무실 집기들을 모두 들어냈다. 이어 출입문을 폐쇄하고 엘리베이터를 정지시켜버렸다. 민추협 회원들은 집기를 찾아내 다시 사무실에 올려두고, 야간에 건물주는 다시 치워버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나중에는 그조차도 어려워서 돗자리 등을 깔고 회의를 열었다. 다음은 백 전 사장의 증언이다.

“내가 민추협 대외협력국장이던 때다. 야당이고 민추협이라고 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홍인길이 이름을 빌려서 내가 억지로 관철동 수협 건물 옥탑방에 사무실을 빌렸다. 그 건물 옥상에서 민추협 결성 전단지를 뿌리고 그랬다.

아무튼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돗자리를 깔고 신문지를 깔고 회의를 했다. 그래서 날 잡아서 집기를 다 올렸는데 건물주가 알게 돼서 집기를 치운 후 엘리베이터를 다 멈춰버렸다. 그래서 ‘007 작전’처럼 12층 꼭대기까지 책걸상을 올린 거다. 나중에는 관리인이 고용한 사람들이 막아서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중에 경찰도 섞여 있었지 싶다. 확실히 확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의심이 됐다. 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방해는 그 이상이었으니까.”

˝내가 빨갱이 삼촌 할 게˝

민추협이 결성된 뒤 약 1년여가 지나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이 터진다. 1985년 5월 23일 서울지역 5개 대학의 학생 70여 명이 소공동에 있는 미국문화원 2층 도서관을 기습 점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폭로·규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72시간 만에 스스로 농성을 푼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됐고 김민석·함운경 등 20여 명의 주축 학생들은 구속기소 됐다. 그러자 민추협은 이들을 돕기로 결정하고 백 전 사장을 급파한다.

“당시 인권위원장이던 박찬종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의 학생 가족들이 연세대학교에서 모임을 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권부위원장을 하던 나를 연대 정문으로 불렀다. 가보니 거의 준 계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무장경찰들이 밖을 철통처럼 지키고 있고, 대학 안에는 사복경찰과 정보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박 변호사가 자신은 못 들어간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김동주와 둘이서 박 변호사의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들어갔다. 가보니 열댓 명 정도의 대학생 부모님들이 와 계셨다. 우리가 민추협에서 나왔다고 설명을 하고, YS와 DJ, 두 의장이 함께 도울 거라고 전했다. 그런데도 변호사 선임을 하기 위한 승낙서를 아무도 써주지 않으려고 했다.

민추협과 엮였다가 본인들이, 또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기억에 함운경 아버지와 김민석 어머니가 그 주축이었는데 두 사람부터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고 두 시간에 걸쳐 설득했다. 그런데 그 부모님들 중 낙도에서 교장선생님을 하시는 분이 있었다. 그분 말씀이 ‘자신은 빨갱이 아들을 뒀다’고 한탄하며 승낙서를 끝까지 써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럼 내가 빨갱이 삼촌이오. 내가 빨갱이 삼촌 할 게’라고 호소해서 마음을 돌렸다. 그래서 한동안 나를 두고 학생들이 ‘빨갱이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동의서를 받아서 나오는데 학교를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그래서 교내에 있던 한 신문사 기자에게 부탁했다. 기자에게 동의서를 건네주고 학교를 빠져나온 뒤, 다시 받아서 박 변호사에게 전달했다.”

이후에도 민추협은 미국문화원 사건의 학생들에게 지원을 보냈다. 백 전 사장은 학부모들의 조직 결성을 제안해 함운경 아버지 함정석 씨를 회장으로 하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탄생했다.

재판이 열리자 백 전 사장은 학생들의 어머니들에게 ‘하얀 속치마를 입고 재판장에 들어가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경계가 삼엄해 항의 관련 물품들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자 낸 꾀였다. 재판정 안에서 그들은 속치마를 찢어 ‘독재정권 타도’,‘애국학생이 용공이냐’,‘광주사태 진상규명’ 등의 민주화 문구가 적힌 머리띠, 어깨끈을 만든다.

그리고 방청객들에게 돌린 뒤 즉석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투쟁을 전개했다. 이 유명한 ‘법정소란 사건’은 재판정을 뒤집었고 민가협의 학부모들은 행렬을 이루어 덕수궁 정문을 지나 광화문4거리로 진출했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공안검사가 이사철이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정치를 같이 했다. 세상일이란 것이 참 알 수 없다.”

▲ 민추협 시절의 김영삼(YS) 의장과 백영기 대외협력국장 ⓒ시사오늘

고난의 민주화 운동,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아내와 아이들

민주화의 일선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던 백 전 사장은 그만큼 정권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민주화를 위해 움직였던 인사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탄압의 대상이었고 또 희생이 강요됐다. 백 전 사장은 가장 가슴이 아팠던 부분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토로했다.

“가택 연금을 당했을 때 참 아이들 보기가 민망했다. 나를 빨갱이로 몰고 집에 정보부 사람들이 붙어서 감시를 하는데 참 괴롭더라. 또 내가 석관동에 살았으니까 종암경찰서 정보과에서도 나왔고. 2~3명이 항상 우리 집에 상주하고 혹 내가 뭔가 행동을 취할 것 같으면 5~6명으로 증원된다. 잘 때도 늘 붙어 있고 화장실까지도 따라간다.

잡혀가서 형무소에 다녀오면 어린 아이들이 ‘아빠가 죄 지어서 감방 갔었냐’고 묻는다. 좀 큰 첫째는 그래도 어느 정도 알고 이해를 했던 것 같지만…, 온통 빨갱이 집이라고 소문을 퍼트려둬서 손가락질 받고. 가족들이 참 많은 고통을 당했다. 돌이켜보면 아내에게도 정말 미안하고 고마운 것이 많다. 애들 가정통신란에 직업을 쓰지 못하는 것도 참 가슴 아팠다.

수사관들은 민주화 인사들을 몰아가기 위해 직업에 ‘일정한 직업이 없이 서울역 등을 배회하는 자’라고 적었다. 민추협도 인정을 안 하고 일부러 부랑자 취급을 하는 거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는 이삿짐센터 한다고 둘러댔다. 김장곤 같은 경우는 고서화(古書畵)를 취급한다고 그랬다.”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백 전 사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회상에 젖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둘째가 고등학교 때 쉬는 시간에 창문을 깬 모양이다. 그러니까 선생이 야단을 치는데 ‘니 애비가 야당인사라서 너도 그 기질을 닮았다’, ‘집에서 배운 게 물건 깨부수는 것 밖에 더 있겠느냐’라는 등 몰아세웠다더라. 이는 나중에 故 김동영의 사모님에게 들은 거다. 김동영 장남이 그 학교를 내 둘째와 같이 다녔다.”

“민주화 인사들은 사회생활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동창회에도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가면 혹시나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싶어 다들 슬그머니 일어나 버렸다. 오직 동지들에겐 서로뿐이었다. 후일 그렇게 등 돌렸던 사람들이 내가 한국방송영상 사장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뒤집더라. 어떻게 알았는지 동창과 연락이 끊긴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쇄도하고, 출세했는데 동창회에서 한 자리 맡지 않아야겠냐고 하고…, 참 입이 씁쓸했다. 한 시대의 소명을 짊어졌기 때문에 버텨냈지만, 돌이켜보면 참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민주화의 공신, 지역주의에 삼켜지다

동교동계의 최고 원로인 새정치민주연합 권노갑 상임고문은 백 전 사장에게 ‘3선 의원’이라고 부른다. 동교동계에 왔으면 3선이나 4선을 했을 거라는 의미에서다. 13대 총선 때 백 전 사장은 통일민주당 비례대표 17번을 받으며 모두가 국회 입성을 낙관했다.

그러나 DJ가 평민당을 만들며 표가 쪼개져 민주당은 비례대표를 13번까지밖에 입성시키지 못했다. 지역구인 도봉을에서도 백 전 사장은 ‘호남 정서’에 밀려 석패했다. 백 전 사장은 자신의 국회의원 선거 패배보다도 지역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것을 안타까웠다고 했다.

“도봉을에서 나의 인기는 좋았다. 민주화의 공신이자 YS, DJ 모두와도 원만한 편이었고. 병역비리가 정치판을 휩쓸 때도 나는 오히려 조명됐다. 내 아들이 넷인데 나까지 우리 5부자가 모두 육군 병장이다. 이 사진을 실은 홍보물은 국회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선거공보물로 뽑히기도 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당시 미원공장이 있던 방학1동, 그리고 도봉2동에서는 내가 표가 도무지 나오질 않는 거다. 결국 700여 표 차이로 졌다. 방학1동과 도봉2동은 주민들부터 납품업자들까지 전부 호남사람들인데, 경상도 사투리를 쓰니까 나를 아주 백안시했다.

새벽부터 나가서 아침인사를 하고 선거 유세를 하는데 이유 없이 욕도 먹고, 내 아내는 그 지역의 경계선인 철길을 건너지 못할 정도였다. 원망이나 국회의원직에 대한 욕심이나 미련은 없지만,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에 호남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의 당선을 보며 참 감회가 새롭더라. 이 의원은 존경스럽다. 이제 그런 지역감정으로 물든 옛 시대가 조금씩 지나가는 것 같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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