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선, “정몽규 축구協 회장의 公約은 空約”
스크롤 이동 상태바
신문선, “정몽규 축구協 회장의 公約은 空約”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4.08.25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문선 성남 FC 대표이사내기로 시작한 축구…국가가 만든 스포츠 엘리트브라질 월드컵 실패? “예견된 인재(人災)”K리그, 일본을 주목하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김병묵 기자]

▲ 신문선 성남FC 대표이사 ⓒ시사오늘

“골이에요 고~올.”

한동안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문구다. 독특한 말투로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끌었던 축구해설가가 있다. 한국 프로축구의 1부리그, K리그 클래식 성남FC의 신문선 대표이사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유명 해설가 한 가지가 아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인 동시에 방송활동과 수많은 기고를 통해 ‘축구계의 만년 야당’이라고 불릴 만큼 날카로운 비판을 가해 온 축구학자다.

신 대표의 본질은 ‘축구’ 하나를 끊임없이 연구하며 한국 축구의 발전을 추구해온 구도자(求道者)처럼 보인다. 아니, 구도자(球道者)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그런 그가 이번엔 축구단 경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사오늘>은 8월 11일 성남FC 홈구장인 탄천종합운동장 사무실에서 신 대표를 만났다.

-성남FC 대표이사는 어떤 인연으로 맡게 됐나.

“성남의 경우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명문 구단인데, 이제 기업형 구단에서 시민구단으로 전환을 하니까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 와서 전문가로서 틀을 잡고, 프로축구에 대한 새로운 모형을 만들어보자 그런 사명감 때문에 왔다. 프로축구가 요즘 좀 어렵지 않나. 그래서 공모해서 온 자리다. 몇몇 사장들은 정치적으로, 또는 인맥으로 낙하산인 경우가 종종 있지만 나는 공개적으로 지원했다. 사실 부담도 좀 있었다.

그래도 내가 축구계에서 가장 많이 얼굴이 알려진 인사 중 하난데 공모했다 떨어지면 시쳇말로 ‘쪽팔린’상황 아닌가.사실 한국 프로축구단이 창단할 때 내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구단이 없다. 박태준 회장이 계실 때도 그랬고 최근에도 가장 늦게 창단한 강원도민축구단이 생길 때도 손을 보탰다. 같이 강원도서 연구위원으로 위촉된 이용수 교수는 아마추어 학교체육을 맡고, 프로팀은 내가 맡았다. 연구비도 안 받고 한 봉사였다.”

-실제로 맡아 보니 어떤가.

“생각보다도 더 어렵다. 예산이 300억이던 구단이 150억으로 절반이 줄어든 상태에서 운영을 해야 했다. 선수 인건비만 180억이 넘던 구단인데, 내가 와서 인건비를 62억 정도로 줄였다. 얼마나 불만이 많겠는가. 축구계의 선배라는 사람이 와서. 하지만 선수들은 잘 체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줄인 부분은 용병들 계약금 등 알음알음 새 나갔던 자금들이니까. 머리가 다 하얗게 셌다.

그래도 나 다음에 오는 사장은 편할 것이다. 사실 예산을 줄이기가 가장 어렵지 한번 틀이 잡히면 그대로 가면 되는 것이니까. 사람도 여기저기서 청탁을 받아서 받아주다 보니 선수단이 40~50명씩 된다. 이것도 예산 낭비다. 취임 후 내게도 몇 군데서 청탁이 왔지만 단 한 사람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야 투명한 경영이 이뤄진다. 더군다나 우리는 시민구단 아닌가.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성남의 구단주는 성남시장이지만, 실질적인 구단주는 성남시민이라고 생각한다.”

▲ 신문선 성남FC 대표이사 ⓒ시사오늘

문무겸전(文武兼全) 스포츠 엘리트…국가가 만들었다

온 국민이 신 대표의 얼굴과 목소리를 알고 있지만 그만큼 오해도 많이 산다. 대표적인 오해들 중 하나가 ‘신문선은 서울대학교를 나왔다’는 것과 ‘신문선은 축구선수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신 대표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프로축구선수 출신이다.

-축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사실 초등학교 때 내기축구를 하러 다녔다. 그게 축구의 시작이다. 동네 형들이 공 좀 찬다는 아이들을 모아서 원정도 다니고 그랬는데 돈이 걸려있으니 꼭 싸움으로 끝난다. 그래서 원정을 갈 때는 가방에 짱돌 같은 것들을 가득 넣어서 갔다. 일각에선 나를 두고 축구계의 만년 야당이라며 야성(野性)이 강하다고 하는데 그건 어린 시절부터 생긴 깡이다. 아버지도 안성의 유명한 씨름꾼이었다. 그러다가 축구선수를 하게 됐다.”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

“부모님이 상당한 반대를 했다. 내가 어릴 적에 공부를 곧잘 했다. 사실 잘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는데, 내가 호적상 58년생으로 돼 있다. 사실은 57년생 닭띠다. 어렸을 때 시골서는 어린아이들이 빨리 죽고 그러기도 하니까 출생신고를 곧바로 안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좀 빨리 배우니까 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축구를 하는데도 공부를 좀 하니까 아버지가 공부를 시키려고 하신 거다. 많이 울었다.”

-어떻게 반대를 무릅쓰고 축구를 할 수 있었는지.

“나는 운이 좋았다. 그때 딱 서울체육고등학교의 공고가 났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 광부들과 간호사를 위로하러 갔다가 독일 정부에서 운영하는 체육학교를 가 본 모양이다. 귀국하고 즉시 특별지시를 내려서 ‘우리 체육인들 태반이 깡패고 건달들 같으니까 공부시켜라’해서 특수목적학교로 세웠다. 그러니까 전국에 있는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다. 축구부만 경쟁률이 20 대 1정도 됐다. 구 서울고 운동장에서 아이큐 테스트와 실기시험을 봐서 1기로 들어갔다.

인생이 완전히 바뀐 거다. 집안이 가난했는데 이곳에서는 정부에서 모든 학비와 장비를 대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체육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매일 8교시 수업 후 운동을 했다. 그래서 지금도 공부하면 운동 못 한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8교시 하고도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 3관왕을 했으니까. 체육고등학교 우리가 1긴데 3기까지는 전국에 우리 뿐이었지만 성과가 좋아서 부산에도 생기고, 대구에도 생기고 했다. 용수(이용수 교수)도 내 동기다.”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상대(현 경영학과)를 지원했다. 졸업 당시 내가 랭킹 1등이었으니까. 그런데 학교 측에서 체육학과를 권유했다. 대학 가서도 잘 할 수밖에 없었다. 축구만이 아니라 체조, 수영, 유도, 태권도, 안 한 게 없었으니까. 사실은 국가에서 나를 만든 거다. 나는 방송만 20년 넘게 하면서도 한 번도 펑크를 내거나, 기고를 하면서 마감시간을 어겨본 적이 없다. 체육고 내내 운동하고 밤 11시에 자서 새벽 6시에 기상할 때 밴 습관이다. 평생에 도움이 됐다. 사람들이 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을 가지고 있는데, 서울대를 나왔다거나 축구를 안 해봤을 거라는 거다. 축구를 하면 깡통인 줄 아는 편견이다. 말도 잘하고 글도 오랫동안 썼으니까 그렇게 생각한다”

-프로를 은퇴한 이유가 궁금하다.

“공부에 대한 오랜 숙원이 있었다. 프로를 하면서 교육대학에 시험을 봐서 들어갔다. 면접보는데 수업을 들어올 수 있겠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수업 못 들어오면 학점 못 받는 거죠’라고 답했다.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85년 12월이 되니까 논문을 써야 했다. 그래서 유니폼을 벗었다. 유니폼을 벗는 것은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결단이다. 모두가 말렸다. 프로에서 전 경기를 출장하던 때다. 보통 ‘밀퇴’라고 해서 밀려서 은퇴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방송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방송은 사실 내겐 외도였다. 은퇴하고 공부를 해서 박사 하고, 교수를 하려고 하는데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그런데 MBC에서 방송을 할 사람이 없는 거다. 그래서 PD가 반신반의하며 내게 방송 원고를 의뢰했다. 그러다가 라디오 출연을 하게 되고, 라디오에서 해설하다가 또 TV로 갔다”

-명지대 기록전문과학대학원 교수로도 오랫동안 재직 중이다.

“명지대학교 이사장이 만나자고 그러시더니 ‘학교 와서 학생들을 가르쳐보지 않겠냐’고 했다. 설득에 넘어가 교수를 시작했다.”

-생소할 수 있는 학문이다. 주로 어떤 것을 가르치나.

“축구를 영상 데이터 기법을 가지고 분석을 한다. 축구중계에서 데이터 같은 것들을 전담해서 제공하고 하면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스포츠산업론, 스포츠커뮤니케이션 이런 수업을 하는데 우리 학과가 이제 널리 알려져서 지금은 중·고생이나 외국에서 입학 문의가 많이 온다. 지금은 경쟁률이 세다.”

▲ 신문선 성남FC 대표이사 ⓒ시사오늘

브라질 월드컵은 부실공사가 부른 '예견된 참사'

-2006년 월드컵 스위스전 중계 때 소신 발언 후 해설을 그만뒀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은 사실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국민감정들이 그렇게 됐으니까. 그러고 나서 이제 한강변에서 조깅을 하는데 사람들이 격려를 많이 해줬다. 자전거 타고 지나가다가도 내려서 ‘존경한다’고 하기도 했다.”

신 대표는 한국 축구계서 오랫동안 기술위원과 자문위원 등을 맡아 온 핵심 인사기도 하다. 그에게 대표팀이 1무2패로 탈락한 이번 월드컵에 대해 물어봤다.

-브라질 월드컵의 부진 이유부터 묻고 싶다.

“부실했다. 인재(人災)다. 건물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건물을 짓다가 시공업자가 바뀐 건물 치고 제대로 된 건물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월드컵을 준비하며 대표팀이라는 건물을 지으며 시공사가 세 번이나 바뀐 꼴이다. 조광래 감독이 뚝딱거리다가 휘청거린다고 쫓겨났다. 그 다음엔 하기 싫다는 최강희 감독을 불러서 시켰다. 마지막엔 홍명보 감독이었고.

조광래가 콘크리트 건물 짓고 있었는데 최강희가 와서 목조건물 올리고, 그 다음엔 홍명보가 와서 또 올림픽팀 중심으로 건물을 올리는 상황이었다. 월드컵을 앞두고 자리가 나서 정치하시는 분들이 물어봤다. 16강 가능성 있겠느냐고. 방송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했다. 사실 하기도 전부터 질 거라고 먼저 꼬리 내릴 수는 없지 않느냐. 하지만 내심 속으로는 다들 불안해했을 거다. 폭탄 돌리기였다. 홍명보는 사실 아까운 인재다. 자기도 대표팀 감독을 하기 싫다고 했다. 그런데 결국 폭탄을 받았고, 터진 거다. 결국 정리하자면 이번 월드컵은 준비과정에서 부실했고, 그 부실이 대형 참사로 이어진 모습이다.”

-국내파 해외파 갈등은 있나.

“최근에 기성용 SNS 사건으로 말이 나온 것 같다. 난 대표팀이 소집돼서 그 안에 있을 때는 팀을 해하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훈련이 끝나거나 대회가 끝나면 자연히 얘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거다. 시대가 변했지 않나. 그런데 이걸 두고 국내파 해외파 갈등이다고 말하는 것은 국민들, 스포츠 소비자들과 언론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면 골프선수 박세리가 미국에 처음 진출해 성적을 못 낸 적이 있었다. 당시 언론들은 박세리가 가서 연애질을 한다, 남자한테 빠졌다 하면서 비판을 했다. 그러다 우승을 했다. 그러자 180도 돌변해서 남자친구 때문에 이겼다는 둥 기사가 났다. 그게 우리나라 언론이다.

축구 얘기로 돌아와 보자. 축구는 근대축구 룰이 생긴 이후 늘 문제는 있었다. 엔트리는 23명인데 11명밖에 못 뛰지 않나. 나머지 12명, 경기에 못 뛰는 선수들은 여러 이유를 붙이며 감독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이라면 ‘저 선수는 보스턴대를 다닌다’‘저 선수는 뉴욕대를 나왔다고 하더라’ 같은 구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만약 해외파가 주전으로 많이 나가고 국내파가 후보군에 있다면 ‘해외파만 나가는 것 아니냐’라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하면 갈등이 생긴다.”

-해외 감독이 오면 해결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2002년 당시 히딩크의 경우 동등한 기회를 준다는 수평적 리더십이 먹혔던 거다. 히딩크가 능구렁이처럼 베스트 멤버를 알려주지 않았다. 스포츠기자들에게도. 게임에 못 뛰는 선수를 배려했다. 같이 공 뺏기 놀이도 하고 씨름도 하고. 자신도 주전으로 뛸 수 있다는 희망을 주니까 선수들이 알아서 감독을 보호했다. 그런데 국내 지도자들은 주전과 후보 선수를 대하는 게 티가 난다. 미안할 수도 있고. 엘리베이터만 같이 타도 느낌이 온다. ‘아 나는 이번에 못 나가는 구나’싶다. 그러면 미리 불만이 생기지 않겠나. 그런 다른 점이 있긴 하지만 해외 감독이 온다고 모두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내친 김에 신 대표에게 외국인 감독 선임에 대해 물어봤다. 인터뷰 당시에는 네덜란드의 판 마르베이크 감독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었다.(이후 결렬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외국인 감독 선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외국인 명장이라고 다 선호할 것은 아니다. 과연 명장은 무엇인가. 판 마르베이크 감독의 경우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했다. 그런데 그 직후 유럽선수권서 조별에선 3연패를 하고 경질당했다. 함부르크 감독을 맡은 후엔 7연패 후 143일 만에 쫓겨나기도 했다. 우리 역대 외국인 감독 중에 히딩크 외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낸 사람이 또 누가 있는가. 히딩크는 운이 너무 좋았다. 한국의 환경은 일본과 달랐다. 전폭적인 지지를 해줬다. 경기일정 당겨주고, 모든 프로구단들이 협조를 해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만약 판 마르베이크 감독이 온다면 피파 일정에 따라서 소집할 수밖에 없다.

해외파 구단의 경우, 피파 룰에 의거해서 소속 구단은 선수를 48시간 이전에만 보내준다. 성적이 잘 나오기 힘들다. 그렇다면 외국인 감독에게 지불하는 고비용에 비해 그만한 효율이 있을까? 한 번쯤 생각을 거쳐서 걸렀어야 했다는 거다. 외국인 감독이 전가의 보도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홍명보 감독과 관련해 ‘고려대 인맥’에 대한 비판도 많이 제기된다. 실제로 86년 이후 외국인과 허정무 감독을 제외하면 모두 고대 출신이다. 실제로 ‘학맥’이 많이 좌우하나.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축구인들은 (고대 인맥이 있다는 것을)다 인정을 한다. 밖에서 보기엔 ‘연고대가 다 해 먹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연세대는 그런 거 없다. 내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축구협회 회장하던 시절 기술위원이 됐다. 연대 OB에서 내게 밥을 샀다. ‘이제는 연대 출신 신 위원이 기술위원이 됐으니까 연대도 스카웃하는데 불이익을 안 당할 것’이라면서 기뻐하시더라. 그런데 내가 그 자리에서 그랬다. ‘죄송스럽습니다. 전 선배들 말씀이 무슨 얘긴지 잘 압니다. 하지만 만약 똑같이 하면 연대는 다른 곳과 똑같은 대학으로 전락할 겁니다’고 선을 그었다. 실제로 내가 기술위원으로 있는 동안 연대 출신이라고 혜택을 준 적은 없다.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 신문선 성남FC 대표이사 ⓒ시사오늘

비판받는 정몽규? 2~3년 후엔 더 욕 먹을수도

-현대家가 축구계를 독점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절대적이다. 93년 연말부터 정몽준 회장이 맡은 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니까. 상당한 장기집권이다”

-정몽준 전 축협 회장과 대립각을 세운 것으로 유명한데.

“정 회장이 울산현대의 운영을 FC서울이나 수원 블루윙스 만큼만 해도 내가 비난하지 않았을 거다. 물론 현대미포조선 등 여러 팀을 운영하고는 있지만, 가끔 정말 이 사람이 축구를 사랑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현 정몽규 축협 회장에 대해선 어떻게 보고 있나.

“정몽규 회장이 내건 공약에는 동의했다. ‘축구마케팅 축구시장을 활성화시키겠다. 1000억을 배로 늘리겠다. 중간구매자 역할을 강화하겠다.’ 다 좋다. 하지만 (이행이)쉽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그런데 지금은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됐다.”

-이번 월드컵으로 정몽규 회장도 비판의 대상이 됐던 것으로 안다.

“공약들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2,3년 후에는 더 큰 욕을 먹을 수도 있다.”

-특히 연맹에서 개혁할 부분이 있다면.

“중계권이다. 최근에 프로축구단 사장들이 워크숍을 하고 튀니지와 평가전이 있어서 다 같이 관람했다. 그때 내가 중계권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했다. ‘방송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래야 광고도 붙는다. IOC나 FIFA처럼 스폰서들이 아니면 보도권을 제한해라. ENG카메라를 들고 운동장에 못 들어오게 해버려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맹은 이런 것이 아직 안 됐다. 그렇게 되면 정몽규 회장이든 누구든 욕을 먹게 되니까. 성남은 최근에 OBS랑 홈 여섯 경기 중계권 계약을 체결했다. 다른 사장들이 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다. 광고주들이 좋아할 만한 일이지 않나. 실제로도 기뻐했다.”

K리그, 일본을 주목하라

-K리그가 인기가 없는 이유는 뭐라고 보는지.

“재미가 없다. 영화가 재미없으면 누가 돈을 내고 보겠는가. 영화가 재밌어야 영화관에 가는 거다. 그 ‘재밌다’는 것은 스토리도 있고 영상미도 있고 감독이 연출을 잘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축구도 마찬가지다. 재밌어야 한다. 경기력을 끌어올리고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보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라는 말은 내가 먼저 쓰기 시작했는데,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또 예전에 내가 선수생활 하던 시절, 프로축구의 경쟁자는 프로야구뿐이었다. 프로야구하고만 싸우던 그 시절과는 달리 지금 프로축구는 세계 명품 축구 콘텐츠들과도 싸워야 한다. 하늘에서 이슬비가 내리듯이 전파가 쏟아지고 있지 않나. 요새 젊은이들은 잉글랜드 축구에 젖어서 산다. 요는, 명품을 쓰다가 한국 프로축구란 상품을 구매할 경우 재구매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현행 스플릿 시스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K리그는 현재 리그 도중 상·하위로 리그가 나뉘는 스플릿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스플릿 시스템 시작할 당시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 한국은 환경이 전혀 다른데, 괜찮을까. 미국과 우리와 시장이 다른데, 영국은 20개 팀 중 우승에 도전하는 팀 말고도 강등권에 있는 팀이 재미가 있으니까 관중도 늘고, 시청률도 높고 스플릿 시스템이 흥행하고…우리랑은 다른 얘기다. K리그의 경우 작년에 리그를 50% 진행한 시점에서 리그를 나눴다. 그런데 스플릿 시스템을 해서 홈 팬들이 관심을 가졌느냐, 중계 횟수가 늘어났느냐, 모두 기대만큼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래서 올해는 4라운드 중 3라운드는 그냥 진행하고 마지막 한 라운드만 나눠서 진행한다. 대신 스플릿 시스템의 압박으로 과도한 승리수당 책정 등의 부작용만 나온다. 만성 적자인 팀이 한 경기당 700만 원씩 걸고. 이건 말도 안 된다. 특히 우리 같은 시민구단의 경우  축구도 경영 다음에 축구다. 현장과 동떨어진 정책은 피해야 한다.”

-K리그가 롤 모델로 삼을 만한 곳이 있나.

“일본을 주목해야 한다. 성남FC가 유소년이 강하다. 투자를 많이 한 결과 U-12팀(12세)이 이번에도 우승했을 정도다. 그런데 벤푸레 고후 일본의 작은 프로팀의 12세 학생들이 왔다 갔다. 그런데 일본 아이들에게 전부 졌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U-15, U-18팀도, 연세대학교도 가서 지고. 프로팀도 가서 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왜 지는지 관심이 없다.

우리 때는 일본은 한쪽 눈 감고 해도 이겼는데, 왜 이런 차이가 벌어졌나. 그건 일본은 세계 축구의 트렌드인 기술축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온 일본 애들도 다 우리보다 작다. 그런데도 졌다. 지금 세계 추세가 타깃형 스트라이커들, 토레스와 같은 선수들은 살아남지 못하고 있다. 좁혀지고 더 공수전환이 빨라지는 환경에선 공룡처럼 견디지 못한다. 메시나 사비, 이니에스타와 같은 작고 빠른 선수들이 살아남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은 아직도 투박한 소위 ‘뻥축구’를 하고 있다.

일본축구를 칭송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 상당히 물 흐르듯이 한다. 그리고 축구 외적으로, 경영적 관점에서 보면 일본 J리그의 프로팀들은 2년 전까지는 전부 흑자였다. 경영 수지가 건강하다. 이번에 월드컵에서 우승한 독일이 왜 강한가. 독일 프로리그인 분데스리가는 재정자립도를 철저하게 검증한다. 재정상태가 건강하지 않으면 무리한 지출 등을 규제한다. 83년 이후 흑자 구단이 한 곳도 없는 우리와 대조적이다.”

공부 때문에 유니폼 벗었는데…정치권 러브콜도 모두 거절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신 대표는 정계에서도 ‘러브콜’이 쏟아졌다. 특히 야권에서 신 대표를 영입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신 대표는 정계 러브콜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권에서 많은 러브콜이 있었다고.

“여러 차례 있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 때 롯데호텔에 열 번도 더 잡혀갔다. MBC출신 정동영 상임고문이 당시 내 마크맨이었을 정도다. 내 고향인 안성, 내가 사는 마포을, 그리고 전략공천지였던 분당 등에서 출마 제의를 받았다.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결과 내가 다 이기는 걸로 나왔다. 안성 같은 곳은 압도적이었고. 그런데 내가 다 거절을 했다. 그때 나 때문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사람이 故 황수관 박사다. 그 다음에 안성에 국회의원이 중간에 사망해서 보궐선거가 열렸다.

당시 김두관 행정안전부 장관이 여의도 한 호텔에서 8시간이나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결국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지난 오프사이드 사건으로 ‘저 사람은 아닌 건 죽어도 아니라고 한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정직한 이미지였다. 결국은 고사했지만 대변인을 맡아달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DJ가 나를 좋아했기도 하고. 그래서 새천년민주당 출범 시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 강한 요청에도 끝끝내 정계에 발을 딛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 평생 하던 축구를 그만두고 유니폼을 벗은 사람이다. 그만큼 의지가 강했다. 서울 체육고 당시 선생님들도 늘 ‘너희들은 국민들이 낸 혈세로 나라에서 키우는 인재들이니 체육계의 지도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독을 맡지 않으려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감독은 한 팀을 지도하지만 교사는 수많은 학생들을 길러낼 수 있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