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은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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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은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입법
  • 환타임스=민영현 부산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0.05.0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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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제1차 선&도 국제학술대회<21> 민영현 부산대 철학과 교수
한국의 선(仙)과 19c 민족사상의 도교적 원리에 관하여(하)

5. 민족종교의 세계관과 도교적 원리

한국민족종교사상에서의 가장 특징적인 세계관은 개벽 내지 개벽이론이라 부르는 것이다. 선천과 후천의 끊임없는 교체로 규정지을 수 있는 개벽이란, 이 우주 또는 천지가 창조나 소멸로서의 1회적인 것이 아니라, 여여한 상태의 존재가 순환과 변혁을 거듭하면서 진행 또는 자기 조직하는 우주진화의 이론이자 그 원리로 이해된다. 이는 동시에 한국 국조 단군신화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일련의 우주관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운은 선·후천을 말했고, 증산도 그러하며, 소태산 역시 개벽을 말한다. 이 같은 개벽의 이론체계는 一夫 金恒에게서 正易의 세계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이 경우에도 선천과 후천이 말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생사의 갈래에서 죽음이란 개인의 경우에 있어 나타나는 생명의 한 현상이고, 선·후천의 교체에서 나타나는 개벽이란 우주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개벽 이후에 새로운 후천의 세계가 열리는 것처럼, 개인의 경우에도 죽음 이후에 새로운 저승의 삶이 다가오게 된다. 곧 천지의 음양적 교호를 운동적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그들은 개벽을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입법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같은 천지자연의 근원적인 자기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생명은 그 스스로의 존재성을 온전히 하고 영원하게 될 것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천지의 생명원리를 운동하는 우주로 이해하고, 상생의 세계를 강조한다. 즉 낳고 또 낳아 쉼이 없는 것이며, 낳고 또 낳기에 相生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성격은 결국 그것이 쉬지 않고 운동하며 또 다른 운동을 조성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단순히 입자적으로 존재하며 물리적으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파동과 같이 침투하고 스며들며 생사와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적 운동과 함께 함을 통하여, 인간은 천지 사이에서 스스로의 생명성을 확장시켜 간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이러한 생명성의 확보를 이룬 인간, 이를 ‘神人合發의 仙’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서로 대척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같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삶과 죽음을 서로 상대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서구의 생명이론과 그 세계를 같이 하기 힘든 부분이 바로 이 곳이다. 동시에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이란 개념보다도, 자연 속에서 그냥 그렇게 주어져 있는 삶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陰陽不測의 神, 그 자체가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삶이 죽음보다 못하다거나, 죽음이 삶보다 못하다는 종류의 사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신나는 삶의 이해가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삼교의 여러 원리 가운데, 가장 道敎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매일을 살아가는 가운데 매일 같이 죽어간다. 동시에 그 죽어감 속에서 새로이 살아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몸은 결국 生氣를 잃으면 죽는다. 생기란 元氣이며, 이는 또 活氣인데, 활기가 없다면, 이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러므로 仙이 말하는 생명이란, 결국 활기 찬 삶으로서의 ‘신(神)나는 생의 세계’일 뿐이다.

신나고 신명이 내릴 때, 신(神)은 氣化한다. 말할 수 없는 기운으로 뭉쳐 응결된 것을 정(精)이라 한다. 그래서 정과 기와 신은 서로가 서로에게 대화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과 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삶에 있어 精의 응취는 또 다른 하늘의 명(命), 아니 스스로 해야만 할 세계의 의식을 불러온다.
 
꽉 차고 충실한 精의 이름은 내면의 실제감과 만족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같은 命과 精은 개인의 성품과 만나, 내면 깊숙이 갈무리되어 있는, 아니 그 자신의 생명과 함께 하는 신(神)의 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성품(性)은 내면에서 올라와 현실적인 마음과 만난다. 마음은 氣를 느끼지만, 현실은 마음이 작용하는 다양한 양상들을 왜곡시키게 된다. 여기에 왜곡의 단계를 넘어, 마음이 현실의 기와 교류하게 되면, 마음은 몸[身]이 되고 몸은 마음의 흐름을 반영하게 된다.
 
그러므로 仙의 생명으로서의 삼신은 신(神)의 세 가지 양상인 精․氣․神으로 존재하지만, 그 흐름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면, 몸은 精과 마음은 心과 만나며, 性은 精과 心의 중심으로 나타나 九宮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精氣神․性命精․心氣身이 그것이며, 정(精) 둘․기(氣) 둘․신(神)과 신(身), 그리고 性命心이라, 곧 性과 心 사이에 命이 깃드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문제와 정기신, 심기신, 성명정, 감식촉(感息觸) 등, 『三一神誥』와 관련된 여러 개념들은 한국 仙과 민족종교사상 및 삼신의 心身이론과 결부된다. 또 이것이 ‘한’의 의식과 만나는 지점에서, 선(仙)은 초인격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에서 최종적인 초인격의 세계라고 부르는 바로 그 곳을 또한 말해주게 된다.

6. 나가면서

마치면서 하나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在世理化의 신화적 세계관과 仙의 상호 만남에 관한 것이다. 어쩌면 수운이 말한 通靈氣化의 세계도 仙之造化의 세계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요, 사람 공부의 처음과 나중도 결국은 사리를 분별하여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맞추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弘益人間 역시 인생의 목적과 그 확장을 표현한 말이다. 생명이란 玄妙하고 또 현묘하게 세계와 인간 사이에 작용하는 것이며, 이렇게 작용함으로써 상호 연결시켜 주며 매개한다. 그럼으로써 다 같이 의미 있는 자신, 곧 ‘우리’의 영역을 만들어 간다.

한국 「仙」의 사상으로부터 파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神과 神明과 人間 그리고 자연과의 전체적인 交感에 관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교감의 문제는 仙의 사유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이 되며, 특이한 문화형식으로써의 한국의 제사를 규정한다.
 
교감과 造化의 仙은 그대로 神과 人間을 매개하며, 단군의 仙化에서와 같이 삶과 죽음을 매개하는 하나의 실천원리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생명은 단순히 살아있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神明的 교감과 차원의 전이를 통하여 죽음 아니 사물들에까지 확대되는 특성을 보인다.

한국의 제사문화 속에서, 한국인들의 생명에 대한 마음 씀의 세계를 다시금 확인한다. ‘接化群生’이란 결국 모든 응접하는 것들을 生하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적 실재성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죽음 이후의 삶이 있고, 삶과 함께 하는 죽음이 말해지는 것이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 있음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들은 새롭게 존재하게 된다. 그렇기에 새롭게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존재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삶의 획득은 相生과 報恩, 즉 받는 자와 주는 자의 상호 관계 속에서 두 존재의 동시적 생명성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를 ‘the flux of life’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곧바로 ‘弘益生命’의 원리라고 할 그 무엇이다. 그리고 이 같은 생사의 운동 모두에 작용하는 것은 다만 생명의 약진하는 자기원리이다. 이것은 精의 올바름이요, 氣의 지극함이요, 神의 오묘함이다.

생사 또한 그와 같다. 자연의 운행은 如如하고 四時의 순환은 무궁하다. 無爲自然하고 無爲理化 함이란, 오직 천지자연의 흐름에 순응하여 날로 생명을 길러 나가는 것일 따름인지도 모른다. 하면 그 죽음 또한 삶 속에서 다만 자연스러울 뿐이다. 한국의 「仙」은 결국 이러한 자연과 함께하는 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가장 올바른 길임을 말하고 있다. [민영현 부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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