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대 국회의원 선거, 불법 타락 금권선거의 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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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국회의원 선거, 불법 타락 금권선거의 온상”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5.1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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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광명시에서 출마

국민의 30%도 안 되는 지지를 받아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보니 하루 만에 군정은 민주정부로 탈바꿈해서 당당한 반면, 민주세력은 모두 합쳐 국민 70%의 성원을 받고도 지역감정을 앞세운 김대중 씨로 인한 자체분열로 처참한 패배자로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

곧바로 국회의원 선거가 이어졌는데, 지역으로 나눠진 대통령선거의 여파로 만만치 않은 선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 뻔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경옥과 나는 아무리 어려워도 당당히 맞서 광명시 유권자에게 그간의 우리의 진실을 알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고 다짐하고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았다. 정치를 그만두겠다던 내가 1988년 4월 26일 실시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기로 한 것이다.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대통령 선거 때 아끼고 아껴서 선거를 치렀는데도 여주에서 부민농장을 판 4000만 원 중 2000만 원을 썼고, 그러고 남은 2000만 원이 내가 가진 돈의 전부였다. 1987년 12월 16일 대선이 끝나고 4월에 치르는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3개월이 넘는 기간을 견디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었다. 만나자는 사람도 워낙 많은데다가 향우회, 동창회, 계모임은 왜 그렇게 많은지 만나는 사람마다 초청하는 모임마다 돈 이야기, 먹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수십 년간 군사정부에 붙어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구가하는 집단인 민정당은 6·10 대회와 6·29항복을 겪는 동안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김대중 씨의 간접적인 도움으로 노태우가 승리하자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자금력 또한 군사정부 시절과 다름없이 풍요로웠다. 따라서 경기고, 서울대 출신으로 평생을 군사정부를 돕고 그때까지 정부부처의 고위직을 지낸 화려한 경력의 윤항렬 씨가 민정당 공천을 받았다.

그리고 학벌은 그리 높지 않은데 광명시 토박이고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장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 재산이 많다고 소문이 난 김병용 씨가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았다. 원래 김병용 씨는 광명시 지구당에서 늘 여당의 수석부위원장을 지내던 사람이지만 여당의 공천을 받기가 어렵자 신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광명시에서 유일하게 정보부와 광명경찰서의 감시 속에 여러 번 가택연금을 당하며 민주화운동을 했고, 민주산악회 조직위원장,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 운영위원과 2·12돌풍을 일으킨 신민당의 부의장을 거쳐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이 만든 통일민주당의 전당대회 부의장까지 하고 있어서 통일민주당의 공천은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김대중 씨가 평민당을 창당해서 분열만 하지 않았더라면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어렵지 않게 광명시민의 대변자가 되었을 것인데 참으로 아쉬운 선거였다.

평민당은 광명시내에서는 후보로 낼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최정택이 공천을 받았다. 최정택은 과거 신민당에서 나와 같이 유진산 총재를 따르던 진산계의 일원으로 나는 신민당 선전국 공보부장, 최정택은 청년부 차장으로 조석으로 협력하던 선후배였다.

최정택과는 유진산 총재의 지휘 아래 박정희의 삼선개헌 저지투쟁을 함께 열심히 했는데, 유진산 총재가 타계하고는 최정택을 만나지 못했다. 박정희의 유신 후 전두환 독재 시절 반독재·민주화투쟁 때는 아무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더욱이 박정희의 유신과 전두환 시절 민주화운동 때는 김대중계를 한 사실도 전혀 없는 사람이고, 호남인도 아니며 광명시와도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선에서 김대중 씨가 최다득표를 하는 것을 보고 평민당의 공천을 받고 호남인들의 표만 얻으면 당선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공천을 희망한 것이다. 김대중 씨도 그간 광명시에 내세울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던 중에 나타난 최정택을 공천했다. 산술적 계산이기는 하지만 그럴듯한 계산이었다.

그 외에 어느 천주교인을 비롯한 일곱 명이 출마했다. 선거는 선거일자 공고 전부터 불이 붙었다. 대통령선거는 완전한 지역감정으로 선거를 치렀는데, 막상 노태우의 민정당이 정권을 다시 잡고 나니 민주화를 바라던 국민들과 호남인의 세상을 꿈꾸던 호남인들까지도 거의 자포자기에 빠져 “어느 놈이 되면 어떠냐”는 식으로 선거판은 변질되어 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1988년 4월 8일 선거일자가 공고되었다. 나는 아침 9시에 광명시 선거관리위원회에 입후보등록을 마치고 관내에 있는 개봉극장을 빌려 아침 10시에 통일민주당 광명시 지구당 창당대회를 가졌다. 모두 선거에 참가하느라고 중앙에서는 그동안 찬조연설을 하느라 목이 쉬어 연설을 할 수 없다는 김명윤 민주산악회 회장이 오셨다.
 
김 회장은 정말 목이 아파 연설을 못하고 내가 혼자 개회사를 통해서 통일 민주당의 정강정책과 그간의 투쟁을 이야기하는데 시간을 소비하고, 김 회장은 대의원에게 나의 손을 잡고 번쩍 들어 지지해달라는 시늉만 했다.

창당대회를 마치고 광명동에서 철산동으로 나오는데, 윤항렬의 지구당사무실 앞을 지나다 보니 원래 현수막과 벽보의 첨부는 선거법에 엄연히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수막과 벽보가 규정된 수와 게시방법을 완전히 무시한채 걸려 있었다. 나는 돈도 없었지만 선거법규정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정해진 수만큼만 제작하고 있는데 첫 시간부터 돈판 먹자판 개판 선거가 되겠다는 걱정을 하며 돌아왔다.
 
그에 대해 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항의도 했지만 알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법을 지키는 게 바보고 남만큼 못하는 게 무능이었다. 세 번의 합동연설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남은 선거운동 기간 15일 이상을 후보자들이 유권자들의 가정을 방문해서 간단한 다과와 음료수 정도를 차려놓고 그 이웃에 사는 유권자들을 불러 모아 인사말을 하는데, 돈이 있으면 무제한으로 판을 벌일 수가 있지만 돈이 없으면 유권자들의 가정에서 자진해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길에서 지나가는 유권자들과 악수나 하는 것으로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서의 모임이기 때문에 돈은 있는 대로 뿌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사랑방좌담회가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고 또 돈을 미리 주고 유권자들을 음식점으로 불러내어 먹게 하고 인사를 가거나, 초청하는 모든 모임에 나가 인사를 하고 그들이 내미는 음식대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매일 소를 잡아 온다는 말도 있었다. 오는 여자들에게 목걸이도 나누어준다고 했다. 심한 사람들은 음식점에 진을 치고 출마한 입후보자들을 시간별로 사이를 두고 모두 불러 음식값을 받아 챙기기도 한다는 말도 있었다. 사랑방좌담을 한번 할 때마다 수십만 원씩 주기 때문에 사랑방좌담 요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나도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먼저 지구당 간부들의 집에서 사람들을 모았는데 전혀 맨입으로 할 수는 없어서 요구르트와 과자를 조금씩 갖다 놓으라하고 한번 할 때마다 2만원씩을 봉투에 넣어서 주었다. 대게는 그나마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고마운 분들이 많았다.

그런 소문이 나서인지 자진해서 자기 집에 이웃 주민들을 초청하고 자기 경비로 음료수와 딸기, 과자 등을 차려놓고 나를 부르는 유권자가 많아서 운동원들을 감동시켰다. 그런 유권자일수록 나를 위한 선거운동을 열심히 할 뿐 아니라 인사말을 마치고 나오면서 2만원이 들어있는 봉투를 주면 거절을 했다.

“이 돈을 다른데 보태어 쓰세요. 여기 출마한 사람 중에 가장 돈이 없어 고생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애 아빠와 상의해서 이 정도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했습니다. 꼭 당선되셔야 합니다.”

이렇게 눈물겨운 말을 하면서 한사코 그 돈도 사양해서 나와 운동원들은 용기백배해서 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선거운동 기간에는 이런 유권자도 많았다.

“여기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꼭 노병구 후보를 보고 싶어 하는데, 잠깐만 와서 얼굴만 보이고 인사나 몇 마디 하고 가면 되니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들러주십시오.”

그런 연락이 오면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가서 악수를 나누고 “잘 부탁합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다른 일정 때문에 가겠다고 하자 총무라는 사람이 잠깐 보자더니 그 자리에서 먹은 식대가 70만원이 넘게 나왔다면서 내놓았다. 나는 정색을 했다.

“이런 자리라면 나는 여기 오지 않았습니다. 부담 없이 와서 인사만 하라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달려왔는데 이것을 나보고 내라고 하면 됩니까? 나는 이렇게 쓸 돈도 없지만 돈이 있더라도 이런 경우 없는 돈은 낼 수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나랏일을 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정도의 돈도 낼 수 없는 사람이 무엇 하러 출마를 합니까? 노병구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먹은 음식 값이나 내라는 것도 거절합니까?”

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나를 지지해주셔서 고맙긴 한데, 나는 지금까지 이런 것을 없애려고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투표를 하든 안하든 당신들의 자유인데, 이 돈을 나에게 꼭 부담시키려는 생각을 했다면 당신들의 표는 나를 찍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까지 해서 당선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럼 나는 갑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 경옥과 만나 그날의 일을 말하는데, 경옥이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 있어요. 내가 오늘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어떤 분이 ‘노병구 씨 사모님이십니까? 우리 동네에 이번 선거에 꼭 노병구 씨가 당선돼야 한다고 아주 열심히 선전하고 다니는 여자 분이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운동원을 두셨네요.’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의 성함을 물었더니 성함은 모르고 광복아파트에 살고 있을 거라는 말만 들었어요. 당신 혹시 광복아파트에 사는 여자 중에 우리 사무실에 오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나는 아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 경옥에게 당부했다.
“당신이 내일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봐요. 연유도 알아야겠지만 우리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니 꼭 찾아서 고마움도 표시하고 격려해주면 더욱 힘껏 선거운동을 할 게 아니오?”

다음 날 경옥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왔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어요. 그 분은 30대의 SIS인데, 그 부인이 그러더군요. 자기 남동생이 대학생인데 학교에서 학생간부로 학생운동을 하다가 경찰에게 쫒겨다녔는데, 노태우가 6·29항복을 한 지 1년이 다 되도록 전혀 소식이 없어 이는 필시 군사정권이 어떻게 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더래요. 그런데 출마한 후보 중 당신만이 군사독재와 싸운 분이기 때문에 당신의 당선을 자기일로 알고 사람들을 만나면 열심히 ‘노병구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고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당신이 당선돼야 그나마 위로를 받겠다면서요. 그러면서 눈물을 짓더라고요.”

아내의 말을 듣고 나는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군사독재가 저지른 죄악이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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