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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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공화국’
  • 유재호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3.3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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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호 영어이야기
“선생님, 숙제 안 해왔어요.”
“그래? 다음에 해와...”
“예~!”
 
▲     © 시사오늘

 
이게 학생이 숙제를 안 해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다. 숙제를 자주 안 해오는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다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선생님들이 실제로 쓰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숙제 왜 안 해왔니?”
“학교 때문에 바빴어요.”
“바쁘다고 학원숙제를 안 해서야 되겠니? 이렇게 숙제를 안하다보면 남들 보다 뒤 처질 텐데, 그래도 괜찮아?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숙제를 꾸준히 하면 많은 발전이 있을 거야. 그러니 다음엔 꼭 숙제를 해오도록. 약속!”

이런 식으로 학생들에게 은연중에 압박이 가해진다. 스트레스를 받은 학생은 남들한테 ‘뒤 처질까봐’ 결국 숙제를 해오고 만다.

하지만 나는 숙제를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 중 80%이상은 꾸준히 숙제를 해온다. 숙제를 아예 해오지 않는 학생은 60명 중 단 1명밖에 없다. 

 가끔씩 학생들한테 숙제해오라고 할 때도 있다. 오로지 학부모님들의 ‘특별한’ 부탁을 받았을 때만 이다. 애가 숙제를 안 해서 그만 둘 것을 고려해봐야겠다는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그 학생을 불러다 숙제의 ‘중요성’에 대해 일깨워준다.

하지만 굉장히 형식적이다. 예전에는 아무리 학부모님이 숙제에 대해 아이한테, 나한테 압박감을 줘도 끝까지 굴하지(?)않았다. 숙제 강요 없이 잘 할 수 있다고 끝까지 학생을 변호했다. 하지만 Kathy사건 이후로 내 고집이 한풀 꺾였다. 물론 아직도 내 기본적인 마인드는 고수하고 있다.

Kathy는 1학년 여학생으로 타고난 끼로 인해 활발한 수업의 선봉장이었고 나와도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영어 자체를 진심으로 즐기는 게 느껴졌으며 어느새 부턴가 ‘Jay’s Class’의 ‘Role Model’이 되어 버렸다. 내가 Kathy를 높게 샀던 이유 중 하나는 지루할 수도 있는 Book Reading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너무나 맛깔나게 소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Reading을 보면 마치 구연동화를 보는 것 같았다. 표정하나하나가 살아있었다. ‘“Oh, how did I get myself into such a mess?!” Boy cried.’ 라는 문장이 주어지면 정말 소년이 우는 것을 흉내 내며 문장을 따라 읽었다. 이 친구의 동작 표정 하나하나는 반 아이들이 주목하기 충분했고, 모든 아이들이 ‘Kathy Style’로 Book Reading을 하자 수업 전체가 마법에 걸린 듯 활기가 더해졌다. 
 
▲     © 시사오늘

 
매일매일 Kathy와의 수업이 기다려졌다. Kathy의 어머니도 Kathy와 나와의 호흡을 잘 아시고 변함없는 믿음을 주셨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Kathy가 숙제를 빼먹는 날이 생겼다. 어머님께서 걱정하셨지만 나는 이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지금 1학년 학생이고 숙제 없이도 반에서 제일 많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숙제 없이 부담 없이 다니는 게 이 학생 실력 향상에 더 도움 되고 있습니다. 믿고 맡겨 주세요.”

“근데 다른 숙제들은 열심히 하는데 이 숙제만큼은 잘 안하네요. 아무래도 책임감이 준 것 같아요.”

 걱정 어린 말투로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Kathy는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의 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이 사실을 안 나는 Kathy를 ‘숙제 공화국’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Kathy는 학원에서 즐기고 가기만 해도 실력이 많이 늘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증명 시켜주곤 했었다.

하지만 결국 Kathy는 학원을 관뒀다. 학원을 그만 두기 전 수업... 나는 이 친구와 최고의 수업을 했다. 그녀의 어머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지만 그 수업은 결국 마지막 수업이 됐다.

Kathy와 더 이상 수업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실장님이 방에 들어오셨다.

“상담 File을 보니 Kathy를 놓친 이유는 어머님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들어주지 않았음에 있어요. 이럴 경우 어머님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필요가 있어요. 안 그러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지요.”

한동안 나를 자책했다. 그 사소한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 나를 탓했다. 그래서 Kathy와 같은 사례가 반복하지 않도록 약아지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로 숙제 때문에 관둔 학생은 없었다. 내가 미연에 다 방어책을 마련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특수한 Case를 제외하고는 내 철학을 고수했다.

여기서 말하는 ‘내 철학’이란 바로 ‘숙제를 안 해와도 실력이 발달한다.’라는 철학을 말한다. 원래 내가 존경하는 정찬용 박사님의 철학인데, 이 사상으로 많은 아이들이 숙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있었다.
 
▲     © 시사오늘

 
사실 숙제를 하면 실력 발달에 도움 되는 것은 사실이나, 숙제는 아이들을 위한 거라기보다는 부모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성격이 짙다. 다른 ‘무서운 학원’들의 불안심리 자극으로 인해 많은 학습량을 소화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사실상 강압적으로 시키는 과도한 숙제는 오히려 ‘실력 향상’에 큰 걸림돌이 되며 오히려 ‘영어 공포증Phobia’현상을 조장한다.

C모군은 1학년 남학생으로서 수업에서 좀처럼 즐기질 못했다. 12명 중 11명이 신나게 즐기는 동안 C군의 얼굴은 고통 그 자체였다. 상담 끝에 알아낸 사실은 C군의 할머님이 교사 출신으로서 C군에게 학원 숙제 이외에 다른 과제를 꾸준히 시켜온 것이었다.

하루는 C군이 울면서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엄마가 이 단어들 외우래요.”

 이토록 그가 받고 있던 스트레스는 말로 하기 힘들었다. 이러던 C군이 학원을 관둔다고 했을 때, 나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곳에서 똑같은 고통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C군은 영어를 싫어하게 됐다...

C군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학생들이 은근히 많다. 친구 한명이 구청에서 아동 놀이 심리 치료사를 하고 있는데, 많은 학생들이 영어유치원, 영어학원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영어Phobia’ 현상을 호소하며 심리 치료사를 찾아온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의 과도한 사랑(?)이 아이들을 심리 상담소로 몰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현실에 맞게 숙제도 하고 즐기기도 할 것인가?

정답은 ‘즐거운 수업’이다. 자율적으로 숙제를 하도록 유도하면 된다. 사실 “너 숙제 해와.”라고 말하는 것은 1차원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런 말없이 누군가를 숙제를 알아서 해오도록 만드는 것이 진짜 교사의 임무이며 이것에 성공했을 때 진정으로 학생의 실력 발전이 있는 것이다. 

교사는 최대한 수업에만 충실하면 된다. 숙제를 잘 안 해오는 학생들이 수업에서 즐거움을 느끼면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선생님께 더 칭찬받고 싶어지는 욕구 또한 강해진다. 이 때 교사는 숙제를 하면 더 즐거운 수업을 할 수 있고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 살짝 귀띔해주면 된다. 자연스레 숙제에 손이 간다.

어느 날, 실장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자네가 해줄 일이 있어. Peter라고 숙제가 하기 싫어서 그만 뒀던 학생이 있는데, 지금 울면서 수업 안 들어온다고 그러네. 내가 자네 반으로 편성 할 테니, 숙제 안 해오는 학생들 스페셜리스트인 자네가 한 번 책임지도록.”

“Sure!”

자신 있게 대답하고 Peter를 만났다. 소극적으로 보이는 학생이었다. Peter에게 말했다.

“우리 반에서는 숙제 안 해도 되니까, 수업만 재밌게 즐기다가 가도록. OK?”

환하게 웃는 Peter를 볼 수 있었다. 이 날 이후로 Peter는 재밌는 수업에 매료 되었다. 이 때 마침 축구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고난이도 슛을 성공 시켜 친구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 계기로 한층 자신감을 얻었다. 몇 주 뒤, 수업 오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된 Peter에게 한마디 했다.

“이제 숙제 1/5만 해보자. 별거 아니고 여기 한줄 씩만 쓰고 듣고 따라 하기 한 번씩만 하면 돼. 숙제 하면 수업이 더 재밌어져. 힘들면 말해.”

Peter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숙제를 꼬박꼬박 해왔다. 그리고 점차 양을 늘려 여느 학생과 다름없이 숙제를 열심히 해왔다. 지금 다른 선생님 반에서도 즐기면서 열심히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학생들은 스스로 숙제를 할 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숙제를 안 하는 학생은 발전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더 빠른 실력 향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숙제를 안 해오는 Harry(이제희)도 남들 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숙제를 안 해오면서도 수업 시간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하기 때문에 어느 새부턴가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 되 있었다. 아직까지도 이 친구를 숙제 안하면서 실력 발전한 대표적인 학생으로 꼽고 있다.

물론 그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Writing은 거의 발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에게 억지로 쓰라고 시키지 않는다. (가끔 장난으로 간지럼 태우면서 시킨 적은 있지만...) 하기 싫어하는 영어 Writing을 억지로 시키다가, 그가 사랑하는 영어를 혐오하는 존재로 만들고 싶지 않다. Writing Skill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가 영어를 즐긴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원에서도 숙제 안하는 학생들을 위한 ‘숙제 Program’을 실시하곤 했다. 물론 따로 시간을 내어 노력하시는 선생님들의 공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런 ‘숙제 Program’에 반대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사교육이 사교육을 낳는다.’라는 말과 흡사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수업의 보충인 숙제를 위한 보충 수업...  취지는 좋았다. 처음 취지는 숙제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부추겨주겠다는 의도였으나, 현실적으로 자가 주도적인 학습을 유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숙제를 대신 시켜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내가 이 시스템을 반대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솔직히 효과는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들에게 숟가락을 들어 떠먹여주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의 효과보다 나중에 아이들이 겪어야 할 부작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숙제 Program으로 인하여 숙제로 인한 퇴원은 0명을 기록했고, 이는 지속적으로 숙제 Program을 운영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지금은 이 숙제 Program이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본연의 마인드로 돌아가서 ‘모든 것은 수업에서’에 라는 모토로 돌아간 것이다. 

내 숙제에 대한 철학은 전혀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이 사상으로 많은 아이들을 가르쳤고 많은 성장을 보았다. 서초동에서 까다롭기로 유명하신 학부모님들도 내 이런 방식을 지지해주신다. ‘무서운 학원’들의 온갖 공포감 조성과 엄청난 유혹들 가운데서... 나도 이런 분들의 마음을 담아 최선을 다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최대한 영어를 즐길 수 있을까 여러 방면으로 연구한다.

나는 아이들이 숙제로 스트레스 받고 있는 것이 싫다...
 
유재호  (서초 Too English 영어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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