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의 최후진술(39)>처와 딸 앞에서 수갑을 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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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최후진술(39)>처와 딸 앞에서 수갑을 채우고
  • 유성환 자유기고가
  • 승인 2014.12.0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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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유성환 자유기고가)

구속 전후의 사건들

① “통일이라는 단어를 빼면 좋겠습니다.”

1986년 10월 나의 대정부 정치분야 질의를 하기 20분 전 민정당의 〇의원이 급히 만나자는 국회 5층에 있는 방에 갔다. 양순석 보좌관이 나를 수행케했다. 방은 조용했다. 일종의 긴장감을 느꼈다.

“유 의원, 원고 모든 부분에 있는 “통일”이라는 단어를 빼세요.”

“내가 국회에 온 목적은 통일이라는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유 의원을 위해서입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통일을 말하고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는 그의 왼쪽 상의 안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는 것 같이 보였다.

나는 “〇의원 이것은 ‘역사’입니다.” 흰 봉투는 다시 들어갔다. 그러나 이 정권의 반통일성, 반민족사적 성격을 접했을 때 통일 문제가 얼마나 민족사의 정도에서 소외되고 있는가를 통절히 느꼈다.

만남은 끝났다.

② 나의 처와 딸 앞에서 수갑을 채우고

1986년 10월 17일 새벽 1시 30분쯤 사복차림의 검찰인지 경찰인지 7, 8명이 방배동 나의 집으로 칩입해 들어왔다. 그 중 2, 3명은 구두를 신은채 방안에 들어왔다. 서재의 책을 모두 방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약 20여 권을 압수해 갔다.

그들은 가족이 다 보는 앞에서 내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날 낮에는 집 바깥에 경찰 1,000여명과 상이용사 1,000명이 서로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상이군인들이 낫과 곡괭이 등을 긴 장대에 메어달아 나의 3층 연립주택 유리를 깨려고 하였다. 경찰은 그의 본래의 의무대로 나를 포위 보호하려고 했다. 그들끼리 싸우고 난리를 부렸다. 경찰은 나를 상이군인들로부터 보호하였다. 살인강도범도 체포할 때, 수갑을 채울 때는 가족 앞에서는 피하거늘 그 날 검찰과 경찰의 공무집행 수준은 참으로 야만적이었다.

동원된 2,000여명이 나 한사람을 포위하고 있으면서 피의자 방안에서 그것도 처자들이 보는 앞에서 수갑을 채웠으니…….

③ 내가 쓴 원고를 두 비서가 각각 다른 필체로 정서한 것을 모측에서 타인이 써준 원고라고 모략

나는 원고지에서보다 백지 위에 글쓰기를 좋아한다. 통일국시 원고도 백지 위에 쓰고 그 자 수를 알기 위해 내가 쓴 원고를 4촌 아우 유만석에게 원고지 안에 글을 써넣어 그 자수를 3,000자 넘지 않게 했다. 나는 국회에서 연설할 때 글자가 크게 보이게 원고지 안의 글을 다시 백지 위에 국문으로 크게 쓰게 했다. 그 담당이 나의 막내 처남 남영진 군이었는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영진군이 한문 실력이 모자라 유만석군이 쓴 원고지에 있는 한자에 한글로 음을 달아 달라고 한 것이다. 유만석은 경희대 신문편집인 경력이 있어서 남영진의 요구대로 아주 쉬운 한자에도 음을 달아주었다.

검찰은 세 사람이 쓴 세 가지 필체의 원고를 다 압수한 것이다. 어느 날 중앙일보 가십란에 유성환 의원은 改革이란 한문도 모르는 사람이며 원고도 제3자가 써 준 것이라고……. 폭로성 기사를 실었다.

같은 국회 내무의원인 경기지사를 역임한 김태호 의원이 그렇게 보도 되게 했다. 그는 원고가 세 사람의 손을 거친 것을 모르고 한 것 같다.

④ 유 의원은 고급 반공주의자입니다.

내가 9개월간의 옥중생활에서 가장 괴로웠던 때는 정민수 검사의 21일간의 신문을 받을 때였다.

밤까지 신문을 받고 교도소의 나의 감방에 갈 때가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감방이 아니라 나의 숙소였다. 21일간의 까다로운 ‘이념’에 관한 신문은 참으로 괴로웠다. “공산주의의 역사를 너무 알아도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는 것 같고, 모르면 “그것도 모르느냐,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 같았다.

신문이 끝나고 교도소 감방에 갈 때 그 한평 반의 감방이 나의 편안한 안식처에 손색이 없었다. 감방에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하고, 나를 신문하는 검사가 없고, 나만이 갖고 있는 나의 심성의 자유가 천지를 배회할 수 있는 작은 방, 나의 신체를 삼중사중 철문으로 둘러싸 나의 ‘통일국시’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어쩌면 완벽한 ‘통일국시의 요새’ 같았다.

나는 21일간의 검사의 신문을 마치고 검사에게

“정 검사께서 나를 심층 조사했는데 내가 어떠한 사람으로 보입니까?”하고 물었다.

정 검사는 “글쎄요. 유 의원을 조사해 보니 고급 반공주의자 같습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검사의 말에 법가의 양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재판부에 나를 3년 징역, 3년 자격정지의 구형을 했다. 나는 정 검사의 저 구형은 인간 정민수의 본심이 아닌 것을 굳게 믿고 있다.

⑤ New York Times의 오보

1986년 10월 14일, 나는 국회에서 총리를 상대하여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을 하게 되었다. 오전 11시 30분 나의 대정부질문은 시작되었다. 약 8분 가량 지났을 때 여당인 민정당 의원 100여 명이 일어나 나의 연설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조직적이었으며 격렬했다. 나는 이재형 의장이 동료들의 국정질의 연설을 방해하는 민정당 의원들에게 주의를 주고 장내 질서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믿었으나 이의장은 되려 “유성환 의원, 유성환 의원” 하면서 나에게 주의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꾹 참고 연설을 계속했다.

민정당 의원 거의 전원이 다 일어나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나의 연설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 의장은 마이크를 끄도록 하였다. 나는 큰 목소리로 계속 연설을 했다. 내가 의도한 가장 중요한 대목까지 마이크가 꺼진 상태에서 연설을 계속 했다. 내가 국민과 우리 민족사 앞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연설은 8분 30초만에 끝났다.

신민당 임시 원내 회의에서 나는 나의 연설의 배경에 대해서 소상히 말씀드렸다. 하오 6시 경 이기택(李基澤)부총재가 나와 몇몇 의원들을 함께 하는 저녁 식사모임을 가졌다. 이 총재는 전두환 정권의 앞으로의 초법적 만행을 예상하면서 우리 당의 단호하고 현명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내게 닥쳐올 “수난”을 염려해 주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홍사덕(洪思德) 대변인과 나를 김영삼 총재댁으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홍의원과 나는 함께 상도동 김총재 댁으로 갔다. 하오 7시 경이었다. 1층 접견실에 들어가니 김동영(金東英) 총무가 먼저 와 있었다. 김영삼 총재가 앉자마자

“그래 지금은 개헌정국이지마는……”하면서 김동영 총무를 보고,

“김총무, 어떤 노력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하였다.

김총무는 연신 “예, 예”하였고, 홍대변인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나도 침묵하고 있었다.

그 이튿날 New York Times에 김영삼 총재를 찾아간 유성환에게 김총재가 꾸중을 했다. “He rebuked Mr. Yoo.”라고 Susan Chira 기자가 보도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실과 다른 보도였다고 믿고 있다.

Susan Chira 기자가 김영삼 총재를 직접 안 만난 것이 못내 섭섭하다. 김영삼 총재가 나를 꾸중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었다. 후일 김영삼 총재의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어떠한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라는 연설의 의미를 음미해보면 김영삼 대통령의 뜨거운 민족관을 알 수 있다. 건국 이후 역대 대통령 가운데 대통령의 민족관을 밝힌 첫 대통령이기도 했다.

⑥ 경찰관 조한경, 강진규 씨와 6월 10일. 항쟁

1987년 5월 초, 고법의 재판을 앞두고 별안간 사건담당 변호사 〇씨가 항소장을 쓸 수 없다는 통고를 해와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내가 직접 쓰기로 결심을 했다. 나에게 여태까지 교도소에서는 일체의 필기도구나 신문, 방송, 교회 예배 등을 허용치 않았다. 다만 나무 판자와 비닐 같은 것과 그 위에 글을 쓸 수 있는 가느다란 젓가락 모양의 막대기를 주었을 뿐이다.

나는 이 원시적 필기체 위에 일심 재판의 최후진술 대요를 몇 번이고 연습했다. 나는 교도소장에게 고법재판을 위한 항소장은 내가 직접 쓴다는 것을 통고했다. 5월 초에 용지와 볼펜을 받았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이 피의자 신문 도중 사망하였다는 보도가 있은 후 1월 18일 경찰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혐의자로 구속했다. 1월 24일에는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사망했고, 치안본부는 사망원인을 발표했다. 나는 영등포교도소에서 이부영 씨와 방을 이웃하게 되고 또 나의 요청으로 교도소장이 나와 이부영 씨는 매일 오후 4시 반에서 5시까지 운동을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교도소내의 젊은 수감자들이 보내는 과일과 과자 등으로 위로를 받았으며, 감사하였으며 이것을 또 이웃방의 여러분께 대부분 드렸다. 교도소에 수감된 조한경과 강진규는 입소 하루만에 방을 바꾸거나 타교도소로 이감해 달라고 교도소 소장에게 요청을 했다. 세면장에서 유성환 의원을 만나게 되면 큰 욕을 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부영과 나는 내가 갖고 있던 다과류를 두 경찰관에게 드리기로 의논했다. 교도관은 우리 둘의 유능한 통신원이었다. 다과류를 먹으면서 두 경찰관들이 “이렇게 좋은 분들인데” 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전해왔다.

나는 이번에 더 좋은 선물을 보냈다. 밤늦게 교도관에게 조한경과 강진규는 “우리는 억울합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다.” 하고 흐느낀다는 것과 교도관 300여 명 중 90%가 고졸이며 전두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정의감을 가진 교도관들은 면회 온 경찰관들의 아내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경찰관 조한경 씨와 강진규 씨는 마침내 소상한 경과를 실토했다고 전해왔다. 내가 항소장을 쓰기 위해 교도소장으로부터 받은 볼펜이 이 역사적 순간에 쓰이게 되었다. 이부영씨는 깨알 같은 글을 써서 비상루트로 김승훈 신부에게 보냈다. 김신부의 일차 폭로회견 내용을, 진실폭로를 당국이 부인했다. 이부영씨는 더 상세한 내용의 범죄조작 구조 실상을 김신부에게 보냈다.

5월 21일 김승훈 신부는 기자회견에서 더 상세한 범죄조작극을 발표했다. 전국민이 분노했다. 5월 22일 김영삼 총재는 내각총사퇴를 요구했다. 5월 29일 드디어 대검찰청은 박종철 사건은 은폐조작되었으며 진범은 치안본부 5차장 등 간부 3명이 고문조작을 은폐했다고 발표했다.

그 익일 교도소 모간부가 밤2시쯤 되었는데 나와 이부영씨는 교도관방으로 안내되었다. 뜨거운 커피와 동아, 조선 신문 두 장이 책상에 놓여 있었다. 커피를 마시니 온몸에 김이 솟아올랐다. 교도관은 주의를 살피는지 바깥으로 나갔다. 우리들은 신천지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신문을 읽어가는데 너무나 감동적인 순간이라 이미 읽은 글도 아깝고 새로 읽어나가는데 남은 글이 줄어드는 것도 아까웠다. 하늘이 분노하여 살인정권을 벌하는 순간들이었다. 피의자 신분으로 교도소 내에서 글을 쓸 펜과 용지를 구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6월 10일 전후 시위군중이 교도소 앞에서 자유 민주 인권의 함성을 외칠 때 교도소내 우리 모두는 ‘일송정’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제지하는 자 없었다. 그것은 혁명전야였다.

※ 변호사가 항소장을 쓰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썼고, 그러기 때문에 교도소 소장이 나에게 볼펜을 주었으며, 나는 그것을 옥중투쟁의 경험이 많은 이부영 씨에게 사용케 한 것과 매일 같은 시간에 운동을 하면서 공동 대처를 한 것은 인간세계의 운수좋은 날로만 치부하지 않는다.

경찰관 조한경씨와 강진규 씨가, 고위층의 범죄은폐조작음모를 폭로 한 것은, 한국 민주화 투쟁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세웠다.

⑦ 보안법 피의자는 신앙의 자유도 없어

1986. 10월 16일 교도소에 끌려가기 하루 전, 천 명에 가까운 무장한 경찰부대에 의해서 나의 연립주택은 포위되어 있었고, 거기에다가 1,000명이 넘는 전국의 상이군경들이 나의 주거지에 몰래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긴 장대 나무창, 낫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국립경찰은 이들을 막느라고 양측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구호는 빨갱이 국회의원을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오후 5시쯤 김영삼 총재께서 격려의 전화가 왔다.

“유 의원 성경 이사야 40장 10절을 펴게”

총재는 읽기 시작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나는 벌써 울먹이고 있었다. 핍박받는 자를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어진 손이 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한 시간이 안 되어 김대중 총재로부터 격려전화가 왔다.

“유 의원, 유 의원의 부당한 수난이 가슴 아프네. 그러나 유 의원, 정치인이 구속과 형을 받는 것은 그 정치인에 행운이 오고 있음이야……….

국민의 지지도도 비로소 굳게 되는 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두 지도자의 투쟁의 철학이 분명히 비교됨을 느꼈다.

⑧ 10월 17일 새벽 3시경, 나는 가족들과 둘러 앉아 찬송가 364장을 함께 부르니 두려움이 가시고 마음이 안정 되었다. 30분쯤 지났을 때, 검찰관인 듯한 5, 6명이 집안에 방까지 들어와 2, 3명은 신도 벗지 않고, 나의 서재의 책을 성경책도 함께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압수할 책 20여권은 챙기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수갑을 채워 나를 영등포 교도소로 끌고 갔다. 살인강도도 처자 앞에서는 수갑을 채우지 않거늘,

교도소 생활 일주일 후 나는 교도소장에게 교도소 내에 있는 간이 교회에서 예배 보는 것을 요청하니 한마디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죄수’들은 되는데 왜 나는 안되느냐? 고 하니 말이 없었다. 국가보안법 피의자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감방에서 혼자 기도하기로 했다. 나는 어느 날 검찰에 조사 받으러 갈 때 10여 명이 함께 가는데 다른 죄수들은 다 ‘푸른 밧줄’로 묶여 가는데, 나는 ‘붉은 밧줄’로 상반신 전신을 묶여졌다.

나는 데모를 했다. 차 타는 것을 거부하고 버티었다. 최종판결이 나기 전 까지는 무죄로 추정되거늘 어찌하여 나를 벌써 빨갱이로 규정하느냐, 소장이 검찰에 알아보더니 가슴에 붙이는 수번(囚番) 2번만 붉은색으로 하고, 팔과 허리의 밧줄은 푸른 색 밧줄로 바꿔서 검찰에 갔다.

정민수 검사는 나의 푸른 밧줄을 보고 놀라는 것 같았다. 이러니 어린 학생들이 보안법 피의자로 들어오면, 학생의 온 몸이 붉은 밧줄로 칭칭 감기게 된다.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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