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동문과 모교의 발전을 위해 희생·봉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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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동문과 모교의 발전을 위해 희생·봉사할 것”
  • 차완용 기자
  • 승인 2009.01.22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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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등학교총동문회 김영웅 회장

호남지역 최고의 명문 광주고등학교(이하 광주고)는 오랜 시간 불리한 환경을 딛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호남 출신 명사들을 길러낸 산실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광주고 출신들은 유달리 결속력이 강하다. 하지만 이러한 결속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 시사오늘


각계각층에 흩어져 있는 동문들의 결속력을 다지기까지는 ‘리더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동문들의 리더인 동문회장은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다. 자신의 이익 보다는 동문들과 학교에 대한 봉사가 우선이고, 이를 게을리 할 경우 그동안 쌓아 올렸던 결속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 학교의 동문회장 자리는 유명 인사나 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도맡아 한다. 더욱이 광주고 같이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고들은 더욱 그렇다.
이에 필자는 당연히 광주고의 총동문회장은 대기업 CEO나 이름만 들으면 알수있는 유명인사 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광주고의 김영웅(65) 총동문회장은 30년 동안 한국토지개발공사에서 임직원 생활을 한 ‘공기업 맨’ 출신 이었다.
다소 의외라는 생각을 품은 채 필자는 지난 16일, 겨울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김영웅 동문회장을 만났다. 필자는 김 회장과의 첫 대면에서 동문회장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는 다름 아닌 첫인사에서 소탈함 속에 감춰진 따뜻한 포용력과 겸허함이 엿 보였기 때문이었다.
 
-광주고등학교 총동문회장을 맡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사실 동문회장이라는 자리는 어느 정도 재력이 뒷받침 돼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재력 보다는 모교에 대한 자부심과 동문들에 대한 열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동문회장 선거에 나가게 됐고 경선을 통해 운 좋게 선출되게 됐습니다.”
 
-광주고등학교총동문회 회장 임기 1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연임을 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3만 동문의 역량을 결집해 모교와 총동문회의 전통을 계승하고 위상을 더욱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히 동문회칙을 정비하고 동문회 재정 안정 방안 등을 적극 추진했으며 ‘광주고등학교60년사’ 발간 사업을 시작하고 동문회관 신축도 가시화시켰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동문들의 신뢰가 연임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나는 동문회장이라는 직책은 한 개인에게 명예나 영광을 더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모교와 총동문회의 발전을 위해 희생·봉사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1년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광주고 총동문회장 외에도 많은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과의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나는 평생 신의와 우정을 지키며 살아왔고, 나를 아는 사람들도 나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연들이 밑거름이 돼 미국 L.A 한글학교 이사, 21세기 경제사회연구원 부회장, 로울러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 한국선수단장, 사단법인 한국 권투위원회 부회장, 법무부 교정위원, 고려대학교 생명과학환경대학원 교우회 고문, 대한프로레스링 협회 고문, 좋은나라포럼 자문위원장, 한나라당 중앙당 특보단 자문위원, 광주고등학교 총 동문회 회장, 정우회 회장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7년 한나라당 중앙당 특보단 자문위원을 맡으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놨습니다. 호남분으로 ‘한나라당’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정치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정치에 입문 했다기보다는 광주와 한나라당 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특보단 자문위원을 맡았습니다. 광주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인 곳입니다. 하지만 여당인 한나라당과의 사이에는 이렇다 할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나눌 창구가 없는 셈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한나라당과 광주를 잇는 매개체 역할을 광주고등학교총동문회회장의 입장에서 추진한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한나라당측 인사들과의 인연이 있어서 도움을 주고자 함도 있었습니다.”
 
-힘든 결정을 한 것 같습니다.
“힘들다거나 어려운 것은 못 느낍니다. 나의 현재 생활권은 서울입니다. 광주지역의 사람들과는 동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또한 내 개인적으로 정치적 지역갈등과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2010년 지자체 선거나 19대 총선에 출마계획은 있습니까.
“그런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정치에 대한 꿈도 있었습니다. 40대 초반에는 정치에 대한 여건도 형성해 봤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광주고 동문회장으로서의 일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포부를 듣고 싶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능력을 배양해서 어려운 사람들과 주변의 가까운 사람에게 보탬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합니다.”
 
-위치를 끌어 올리겠다는 욕심이 있습니까.
“나는 명예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남들과 더불어 살고, 봉사도 함으로써 나의 명예를 더 아름답게 만들 것 입니다.”
 
-삶의 철학이 있다면.
“손해를 보는 인생이 있더라도 남에게 부담을 안주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철학입니다. 또한 남이 갖지 못한 것을 내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 때문에 ‘선행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자리 잡고 있습니다.”

▲     © 시사오늘

-살아온 배경이 궁금합니다.
“편모슬하에서 3남중 장남으로 자랐습니다. 내가 7살이던 초등학교 1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에 참전하셨던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이로 인해 어머님은 나와 두 남동생을 키우셨습니다. 편모슬하에서 자랐지만 어머니가 교육자(일제시대 초등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았습니다.

이후 시간이 조금 흘러 광주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시절 나는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였습니다. 공부도 안했고 특별한 교내활동도 안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를 졸업했고 잠시 동안 금융회사에서 근무도 했습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게 됐고, 때마침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창립돼 입사하게 됐습니다.

1976년도에 토지공사에서 입사한 이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2003년도까지 28년간 근무하면서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또한 2003년부터는 토지공사에서 경영고문으로 3년간 일을 했습니다. 토지공사 역사상 퇴직한 직원이 경영고문으로 재직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 토지공사에서 나의 업적을 인정해 줬기 때문입니다.”
 
-토지공사 제직시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이 있었습니까.
“토지공사에서 3번 강제 해직을 당했고 다시 복직됐습니다. 첫 번째 당한 해직은 1980년도 광주민주화투쟁 당시 나는 공기업 직원으로 있었지만 내 고향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실상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광주에 내려갔습니다. 이 때문에 강제해직을 당하게 됐고 1982년도에 다시 복직 됐습니다.

이후에도 민주화 과정에서 노태우 정부 시절 ‘DJ측 인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1년 3개월간의 억울한 옥고 생활을 했습니다. 당연히 토지공사로 부터는 강제 해직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에서는 나에 대한 혐의를 ‘정치 탄압’으로 인정해 무죄를 선고 받고 다시 복직하게 됐습니다.

3번째는 1997년 토지공사 목포 대불공단 단장으로 있을 당시 뇌물수수혐의로 구속이 되 1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뤘습니다. 이로인해 세번째 핵직을 당하게 됐고, 이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려 2000년에 다시 복직됐습니다.“
 
-당시 정치 활동에 대한 권유도 많이 받았을 것 같습니다.
“내가 토지공사에 있을 당시만 해도 평민당 의원들과 많은 친분을 쌓고 있었습니다. 사실 몇 번의 권유도 받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내 개인적인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내가 공직의 장으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공기업의 일개 과장이었기 때문에 지명도라는 것 자체가 없어 정치 활동에 대한 엄두를 못 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우리 3만 동문은 광주고등학교라는 어머니의 한 형제입니다. 우리는 비록 얼굴과 이름은 다르지만 정과 의리를 바탕으로 소통하는 유기체입니다. 지금 사회 전체에 여러 모로 어려움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 동문의 이런 특성을 살리고 키운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은 앞날을 위한 도약대가 될 것입니다.

이에 나는 올해 목표를 ‘생활의 지해’로 정했습니다. 여기에는 ‘조금 더 실속 있는 삶을 살자’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나의 실속 있는 삶을 통해 내 주변사람 특히 모교와 동문들에게 조금 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렇듯 인터뷰 내내 자신의 이익 보다는 모교와 동문들의 앞날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는 김영웅 광주고등학교총동문회장의 모습에서 필지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에 필자는 ‘김 회장과 같은 사람이 조금 더 큰 곳(정치)에 나가 ‘리더’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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