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안·피안의 경계 허문 천년고찰…보광사 주지 정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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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안·피안의 경계 허문 천년고찰…보광사 주지 정인스님
  • 박지순 자유기고가
  • 승인 2008.12.02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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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 준비하다 불법이 육법보다 심오함 깨달았죠”

경기도 남양주 보광사(寶光寺, 주지 정인 스님)는 천 년 고찰이다. 고려 광종 원년인 949년에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보광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일주문은 사찰 초입에 세워진 문을 일컫는데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상징한다.

일주문 밖이 성역에 포함되지 않는 세속의 공간이라면 일주문 안은 초월을 추구하는 신앙의 공간이다. 그러나 일주문 밖이라고 하더라도 문 전방의 일정 범위는 근신(謹身)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예부터 일주문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말을 타고 온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고 잡담을 삼가고 의관을 정제하며 바른 몸가짐을 가졌다.
천 년 고찰이라면 보통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과 천왕문, 불이문이 이어진다. 일주문과 달리 이 문들은 이미 종교적 공간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참배자들에게 부처님 세계로의 접근을 실감케 한다.

보광사에는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 어떤 문도 찾아볼 수 없다.
보광사는 천 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여러 차례 화마를 겪으면서 한 때는 절터만 남아 폐허 상태로 아픔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850년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제창으로 중흥기를 맞았고 1894년 봉성화상이 건물들을 중수하면서 사찰의 면모를 일신했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전소하고 말았다. 대웅전은 1953년 무렵 재건했다가 다시 1960년 화재로 소실돼 보광사는 20년 가까이 빈 터나 다름없이 한을 간직한 세월을 보낸 것이다.

보광사가 천 년 고찰로서의 위용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1982년 화담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부터다. 화담 스님은 대웅전을 복원했고 이후 선우 스님과 현재의 정인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보광사는 점차 고풍스런 자태가 배어나오고 있다.

보광사를 찾아가보면 으레 있어야 하는 일주문과 금강문 등이 없어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보광사 인근은 한적한 농촌 마을이어서 절을 찾는 이들의 마음에 여유와 편안함을 주는데다 절 주위를 천마산이 둘러싸고 있어 자연 풍경이 빼어나다.

보광사 경내로 들어오는 길은 농촌의 흙길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아담한 돌담으로 돼 있다. 어디가 차안이고 어디가 피안인지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경내에서 제일 먼저 시선을 끄는 모습은 절터를 감싸고 있는 아주 낮은 담이다.

사람 무릎 높이나 될까 말까한 담 위에는 기와가 올려 있어 예쁘고 앙증맞다. 일주문이 없어 절 밖과 안이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낮은 담은 세상과의 의사소통에 있어 자유인이 되라고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보광사의 시야가 훤히 트인 넓은 마당은 사찰 공간의 핵심은 눈에 보이는 전각이 아니라 빈 부분임을 알게 한다. 아무리 아름답게 지은 건물도 무념무상으로 막힌 곳이 없는 마당보다 아름답지는 못할 것이다.

대웅전 앞은 잔디가 곱게 심어져 있어 대웅전을 돋보이게 하면서 잔디 밭 위에는 7층 석탑이 고즈넉하게 서 있다. 보광사에 있는 유일한 탑이다. 기단부터 7층까지 얌전한 비례가 품위 있어 보이는데 이 탑을 보고서야 보광사가 불교를 국교로 했던 고려시대의 절이라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통일신라 대까지는 안정적인 3층 석탑이 유행한 반면 고려 대에는 다양한 형식의 다층 다각탑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대웅전에서 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사찰에서 스님이나 신도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건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수령 200년의 소나무가 서 있다. 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진 풍만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소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으면 소나무에서 나오는 독특한 기운으로 눈이 맑아진다고 한다.

요사채에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마당에 심어진 고추와 상추가 정겹게 느껴지고 보광사가 참으로 사람 냄새 나는 곳이구나 싶다. 텃밭 맞은편에는 작은 정자가 하나 있다. 보광사에 잘 어울리는 정자다. 네 기둥이 모두 제각각 모양이 다르다. 언뜻 보면 정성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기둥에 쓰인 나무는 본래 모양에 손상을 가하지 않고 개성을 살린 것이 멋드러진다.

삼성각 옆에 위치하는 요사채는 정인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바로 짓기 시작해 완공한 지 얼마 되지 않지만 천 년의 숨결이 감돌아서인지 낯설지 않다. 정인 스님은 기자를 방으로 안내했다. 스님은 기자에게 찬불가 합창단과 함께 찍은 사진을 먼저 건넸는데 가족처럼 다정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보광사는 불자들의 정신적 휴식처

-사찰 안으로 들어오면 낮은 담이 퍽 눈길을 끄는데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담이 낮은 것은 외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거나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기보다 외부 지형과의 조화를 추구한 것입니다. 풍수와도 관계가 있고요. 보광사 주위에 ‘가곡’이라는 계곡이 있어 지형이 낮기 때문에 담도 높이를 낮췄다고 보면 됩니다.”
 
-보광사는 1980년대 초 화담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건물을 복원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복원에 참고가 될 만한 고증자료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20여 년 전에는 조그만 요사채만 있던 상태였는데 절의 역사를 요약한 서류 한 장만 있고 고증자료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전통적인 사찰 건축 양식에 따라 복원하게 됐지요.”
 
-스님께서 기거하시는 요사채는 최근에 지은 것 같은데 건축에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요사채가 위치하고 있는 땅 일부가 모 기업체 소유여서 약간 잡음이 있었지만 시청에서 건축 허가가 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기업체도 건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건축 자금도 적잖이 들었을 것 같은데요.
“자금 마련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시청에서는 준공 후에야 자금 지원을 해 준다고 했고 시청 지원금을 받아도 돈이 많이 부족했는데 원력(願力)을 갖고 기도하니까 불가사의처럼 다 마련됐습니다.”
 
-보통 기도해서 기적 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건 기독교에서 있는 일인데 불교에서도 기도로 기적이 일어나나요.
“물론입니다. 처음의 원력을 지키며 기도하면 기적도 자주 일어납니다.”
정인 스님은 불교에서 기도의 힘에 대해 신비한 체험을 소개했다. 한 여성 신도가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갑자기 쓰러져 산소마스크를 쓰곤 했는데 병원에서는 치료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보광사에서 조용하고 편안한 밤을 보내고 정인 스님이 정성을 다해 기도하자 병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그 여성 신도는 깡마른 체구였다가 정인 스님의 원력으로 병이 나은 후에는 건강한 체구가 됐다는 것이다.
 
-스님께서는 평상시 기도생활은 어떻게 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기도는 늘 하는 것이지만 매월 둘째 주, 넷째 주에 밤 8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뱀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년부터 인터넷으로 법회 홍보
 
-주지로 있으면 절 안팎의 일로 바쁘실 텐데 밤 샘 기도하기가 힘들지 않으신지요.
“제가 본사인 봉선사에 10년 넘게 있었고 총무원에서도 일을 했지만 주지가 되니 여러 자금 걱정, 공사 추진 등으로 정신이 분주합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요. 부처님께서도 기도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하신 거지요.”
 
-최근 불교계에서 정인 스님이 화제가 됐습니다. 개인 명의 토지를 총무원으로 귀속시키는 일을 오랜 노력 끝에 성사시키셨습니다. 본래 누구의 토지였습니까.
“화담 스님이 사재로 구입한 토지 2,300 평이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소개해 주시지요.
“스승인 화담스님은 고아 출신이어서 스님의 기록을 찾는데 곤란을 겪었습니다. 스님과 인연이 있는 경찰의 도움과 법무사의 확인을 얻어 일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3,000 평의 대지를 갖게 됐지만 보광사가 천년 고찰로서는 좀 좁다는 생각이 듭니다. 망실 재산을 되찾겠다는 뜻도 갖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사찰 주변 재산을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 화담 스님께서 일부 찾기도 했지만 앞으로 돈이 들어가더라도 계속 찾을 생각입니다. 집착 없이 마음을 비우고 노력할까 합니다.”
 
-보광사는 남양주 지역 불자들의 정신적 휴식처가 되겠다고 밝히셨는데 어떤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계신지요. ‘산사 축제’가 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산사축제는 몇 년 전 사월 초파일에 열었습니다. 사물놀이와 통기타 연주, 힙합 댄스 공연까지 흥미를 가미했는데 경건해야할 ‘부처님 오신 날’에 어울리지 않은 행사라는 비판이 많아 일단 중단한 상태입니다.”
 
-만다라 전시도 열렸는데 작품은 어떻게 구했는지요.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만다라 작품은 티벳에서 구입했고 전시 후에 사찰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해 신도들에게 판매했습니다.”
 
마음비우고 원력 높여 기도하면 소원 이루어져
 
-대중포교활동이 불교 전반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데 보광사에서는 어떻게 준비하고 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매월 초하루에 법회를 열고 방생도 한 달에 한 번 하고 있습니다. 템플 스테이도 준비 중에 있는데 요사채가 부족해 내년에 시작할 생각입니다. 어린이 법회도 내년부터 인터넷 등으로 홍보할 것이고요. 영어 교육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언제 승려가 되려는 확신을 가지셨나요.
“제가 절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육법보다 불법이 더 심오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저는 8남 4녀의 막내로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독거노인들을 친부모처럼 모시고 사는 것이 소망입니다. 97년 동국대에서 노인복지도 전공했습니다.”
 
-보광사의 주지로서 법회나 기도회에서 신도들에게 특히 강조하는 덕목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기도는 욕구충족을 위해 드리면 안 된다는 걸 강조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원력을 높여 초지일관 기도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 소원하는 바가 이뤄집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발 밑을 잘 살피라는 말로 겸손을 강조한 말)의 정신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최근 정부와 불교계가 심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경찰청장 사퇴요구가 한 때 거셌는데 스님께서는 어떤 입장이신지요.
“총무원장 지관스님과 어청수 경찰청장은 동국대 선후배 사이고 지관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있을 때 어 청장이 지역 경찰청장이었습니다. 각별한 인연이죠. 지관스님이 어 청장에게 감정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어 청장이 지관 스님에게 직접 사과하지 못한 것도 신도들이 막아서입니다.”
 
-그럼 스님께서는 어 청장 사퇴에는 반대 입장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개인적 입장으론 반대합니다. 최근 불교계 강경 기류는 일부의 주장일 뿐이고 한국 불교는 아직 소박해요. 대승적 차원에서 상생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 종교를 남의 종교와 구분하려는 태도부터가 잘못이지요.”
 
정인 스님은 인터뷰가 끝난 후 기자에게 전통 차를 권하며 자신이 대학 시절 연주활동을 할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고 밝혔다. 기자는 스님과 티벳의 불교 명상음악 ‘진실의 세계’(Real World)를 같이 들을 수 있었다. 은은한 차 향기와 본래의 나를 찾도록 인도하는 종교 음악의 선율은 이미 속세를 떠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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