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부와 생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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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부와 생살부
  • 환타임스=김영인 편집인
  • 승인 2010.06.0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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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살릴 사람부터 살리고 나머지만 죽이는 생살부
오늘날 먼저 죽이고 나머지를 살리는 살생부의 시대...살벌한 세상

계유정난 때의 과거사다.  수양대군의 참모 한명회에게 염탐꾼의 보고서가 올라왔다.  정적인 김종서와 황보인이 눈치를 채고 메모로 의견을 주고받았다는 보고서였다.  

계획이 들통나면 역적으로 몰려서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쫓아가서 대책을 논의했다.  거사를 가급적이면 앞당기기로 했다. 

"눈치챘다고 하더라도 모여서 의논하는데 3일, 방침을 정하고 일을 추진하는데 3일, 그리고 자기들끼리 약속하는데 또 3일이 걸릴 것이다.  그러면 모두 9일이다.  우리가 그 안에 거사를 일으키면 성공할 수 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병법에도 "사람을 잡으려면 말을 먼저 쏘고, 적을 잡으려면 적의 두목부터 잡아라((射人先射馬, 擒賊先擒王)"고 했다.  36계 병법 가운데 18번째인 금적금왕(擒賊擒王)이다.  적을 제압하려면 적장부터 잡는 법이다.  그래야 적 전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무장한 장정들이 곳곳에서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수양대군이 찾아왔다는 소식은 곧바로 김종서에게 보고되었다.  데리고 온 보디가드가 2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보고였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김종서는 칼을 뽑아 벽에 걸어놓고 아들 김승규를 시켜 맞아들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수양대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김종서는 별 수 없이 김승규와 함께 밖으로 나가야 했다. 

김승규는 무예가 뛰어날 뿐 아니라 힘도 장사였다.  수양대군은 그런 김승규를 본 순간, 잠깐 당황했다.  임기응변으로 쓰고 있던 사모(紗帽)에 달린 뿔을 부러뜨리면서 말했다.  "대궐로 들어가는 길인데 뿔이 부러지는 바람에 대감 것을 하나 빌리려고 왔다." 
김종서는 아들에게 뿔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수양대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보여줄 서찰이 있다며 김종서에게 내밀었다. 

김종서가 서찰을 달빛에 비춰보는 사이에 보디가드가 품속에 숨겨두었던 철퇴를 꺼내서 내리쳤다.  뿔을 가지고 나오던 아들이 달려들어 김종서의 몸을 감쌌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보디가드는 아들의 몸까지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밖에 있던 김종서의 장정들은 대처할 기회조차 없었다.     

한명회도 맹활약을 했다.  생살부(生殺簿)를 들고 대궐에 가서 황보인 등 정적을 제거했다.  오늘날의 살생부(殺生簿)였다.  덕분에 정난공신 1등으로 책봉될 수 있었다. 

6·2 지방선거가 야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살생부가 떠돈다는 보도가 있었다.  고위직이 대규모로 바뀔 것이라는 보도였다.  의외의 인물이 당선된 지역에서 더욱 심할 것이라며 술렁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 살생부라는 이름이 무서웠다.  살생부라고 하면 먼저 죽이고, 나머지를 살려두기 위해서 작성하는 명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수양대군 시대의 생살부는 살릴 사람부터 살리고, 나머지만 죽이는 것처럼 들리는 명부였다.  글자의 순서가 지금과는 달랐다. 

말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살을 생보다 앞세우는 겁나는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각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을 타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지하철에 푸시맨이 있었다.  승객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고 뒤에서 등을 떠밀어주는 사람이었다. 

요즘에는 푸시맨 대신 커트맨이다.  승객을 한 명이라도 더 떨쳐버리려는 사람이다.  함께 가자는 세상이 아니라, 남을 밀어내고 나 혼자 가겠다는 살벌한 세상인 것이다.  [김영인 편집인]
원본 기사 보기: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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