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산악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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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산악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 최신형 기자
  • 승인 2010.06.1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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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구심점 14대시 200만명...YS지시로 해체
6월중 사단법인화...‘밥퍼’ 등 사회운동도 전개키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 의해 영장없이 강제 연행됐던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사망하자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이같이 말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여기에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이 학교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군이 시위 도중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 두 사건은 6·10 민주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 민주산악회를 이끈 김영삼 전 대통령.     ©
1987년 6월 10일을 시작으로 20일 동안 전국적으로 500만 명 이상이 참가해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외치며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이끌어냈던 전국적 국민항쟁을 우리는 6월 민주항쟁이라 부른다.

6월 항쟁은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 스스로 쟁취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빛나는 분수령이었다.

김정렬 민주동지회 사무총장은 “대한민국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중요한 전환점”이라면서 “학생·재야인사·넥타이부대·종교인 등이 연대해 이룬 상징적 사건”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6월 항쟁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YS가 14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에 의미가 더욱 큰 것”이라며 “이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민주세력 집권으로 이어져 국정을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한 공론의 장으로 확장시켰다”고 말했다.
 
민주산악회, 6월 항쟁 이끈 가장 큰 정치결사체
 
우리에게 절차적 민주주의를 안겨줬던 6월 항쟁. 6·10 민주항쟁의 정치적 결사체로써 가장 큰 조직은 다름 아닌 YS가 이끌던 민주산악회였다.

민주산악회는 전두환 정권이 장기집권 음모 하에 5공화국 헌법을 통해 기존 정당들을 해산시키자 YS를 중심으로 이민우·김동영·최형우·김덕룡 등 정치활동 규제에 묶인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주축이 돼 만들었다.

표면상으로는 친목 단체였지만 독재정권에 대한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지방조직을 확대하는 등 사실상 YS계 정치조직이었다.

앞서 유성환 전 의원은 시사오늘과의 단독인터뷰를 통해 “제5공화국 헌법 전문이 개정된 날인 1980년 10월 27일, 대구경북 민주산악회(경민산악회)가 대구 팔공산에서 첫 창립총회를 시도했다”고 회고했다.

유 전 의원의 경민산악회에 이어 민주산악회는 1981년 6월 9일 첫 공식모임을 발족시켰다.
당시 YS는 군사독재 정권의 비민주적인 정치체제에 저항하다 1979년 신민당 총재 시절 총재 직무집행정지, 의원직 제명, 1980년 1차 가택연금 등을 당하는 등 정치활동 규제를 받았다.

YS는 자서전 <나의 정치 비망록>에서 민주산악회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1차 가택연금은 분노의 1년이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꽃봉오리가 무참히 짓밟힌데 대한 분노는 정말 삭이기 어려웠다. 잠도 잘 수 없고, 붓글씨를 쓰려 해도 잘 써지지 않았다. 책을 읽으려 해도 잘 들어오지 않아 한참 읽어도 무엇을 읽었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연금이 풀린 후 모임이 잘 안 돼 답답해하고 있는데, 김동영 전 의원과 정채권 목사가 찾아와 등산을 권해 함께 올랐다. 모임에 안 나오는 사람들을 등산에 초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아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등산을 권고해 점차 동반자들이 늘었다.”

이렇게 시작된 민주산악회는 각 지역마다 조직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유성환 전 의원의 대구경북 민주산악회를 시작으로, 김종순 전 신한국당 부산시지부 부위원장이 부산에 거산 산악회 등을 만들더니 1982년 11월 고문에 YS, 회장에 이민우, 부회장에 김동영·최형우·함기환, 운영위원에 김동영·최형우·김덕룡 등을 선임해 각 시도지부 및 지회 결성을 계속 추진하는 등 전국 조직망을 구축해나갔다.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독재정권 당시 민주화 운동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정치적 결사체가 바로 민주산악회"라며 "독재와 불의에 항거해 온 몸으로 맞서 싸워 정치적 민주화를 비롯해 의사결정에 있어 국민들이 직접 행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또 “민주산악회는 독재로부터 항거해오던 민주 인사들의 정치적인 요구이자 이상적인 조직체”라며 “권위주의적인 통치와 민주주의의 파괴를 막은 것은 민주산악회의 큰 자산”이라고 덧붙였다.

신군부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민주산악회는 이후 전국 104여개 시·군·구 지부장을 선정, 인준하는 등 전국적인 조직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노 전 회장은 “맨 처음 10만 명 규모에서 YS가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1992년에는 전국 시·군·구 268개 지구에 회원 수 200만 명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민주화 조직의 상징으로 급부상했다”고 말했다.
 
YS 단식투쟁 계기 탄생된 민추협
 
민주산악회는 YS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1984년 5월 18일 DJ의 동교동계와 함께 새로운 정치결사체인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로 확대됐다.

하지만 민추협의 출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학생, 재야, 노동자, 종교인 등의 시위 모습.     ©시사오늘
YS는 당초 정치인 중심의 조직이 아닌 재야인사까지 총망라한 국민연합을 생각했지만 동교동계에서 강력 반대했다고 회고했다.

자서전 <나의 정치 비망록>에서 YS는 “나는 민주국민협의회를 정당인이 아닌 재야 사람들도 참여하는 국민연합으로 발전시킬 생각이었는데 DJ계에서 정당인들은 언젠가는 정당으로 별도로 뭉쳐야 하니 재야와 따로 하자고 했다”고 술회했다.

또 민추협 발족 당시 강경투쟁을 하자는 의미로 ‘민주구국투쟁 동지회’로 하자고 했으나, 동교동계 김상현 전 의원이 이름에서 너무 강경한 이미지가 풍긴다며 반대해 결국 민추협으로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YS와 DJ의 공동대표 체제로 출범한 민추협은 양 김씨가 가택연금을 당해 동교동계의 김상현 전의원이 대표직무대행을 맡으면서 세를 확장, 마침내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이민우, 이기택 등 구 신민당 중진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해 총선에서 총 67석을 얻음으로써 제 1당으로 급부상했다.

또 민추협은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이 국민의 직선제 개헌요구 투쟁을 묵살하는데 반발, 즉각 호헌철폐와 정권퇴진투쟁을 전개했다.

이런 투쟁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돼 전두환 정권은 결국 6월 29일 대국민 항복을 선언,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9차 헌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민추협은 상도동계가 주축이 된 민주동지회와 YS의 단식투쟁, 그리고 동교동계와의 연합 등이 어우러져 1980년대 한국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데 일조했다.

이같이 민추협은 대한민국의 절차적 민주주의 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한국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 환담을 나누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 최형우 전 의원(좌로부터).     ©
민추협은 14대 YS를 비롯해 15대 DJ, 16대 노무현 전 대통령 등 3인의 대통령을 배출했고, 2001년 11월 23일 사단법인화를 선언하며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민주헌법쟁취와 반민주악법철폐의 요구라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었던 민주산악회 등은 제14대 대선에서 YS가 대통령의 권좌에 오르자 YS의 사조직이라는 비판을 받아 YS의 지시에 따라 해체수순을 밟았다.

YS가 집권 후 하나회를 해체하는 등 사조직 척결에 나선점을 감안할 때 민주산악회 해체도 이를 염두에 둔 사전 정지작업이 아니냐는 시각도 제기된다. 

노 전 회장은 “YS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5일 만에 민주산악회에 대한 해체 지사가 있었다”면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당시 민주화 동지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고 회고했다.

다만 노 전 회장은 “각 지역별로 회원들 간 친목단체처럼 활동은 계속하고 있었다”면서 “그 때도 역시 민주산악회 동지들이 각 지역에 민주화의 토양을 뿌리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민주동지회, 민주화 운동 세력의 합집합
1993년 해체한 뒤 지역별 친목모임 형태로 남아있던 민주산악회는 1999년 7월 21일 YS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주산악회 재건을 시도했다.

당시 도산동지회가 민주산악회 재건을 위해 움직였지만 당시 정치권이 야권분열, 혹은 3김 정치의 부활 등을 이유로 견제해 사실상 민주산악회의 재건은 불발됐다.

1999년 9월 13일 당시 YS의 대변인이었던 박종웅 의원은 “민산을 정당으로 만들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일부의 오해가 지금까지 불식되지 않고 있다”면서 “김대중 정권에 대항해 그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힘을 한데 모아 2000년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기 위해 민산 재건을 총선 이후로 미루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노 전 회장은 민주산악회 재건과 관련, “2000년 가을 민주산악회 재건이 이뤄졌다”면서 “정치세력화보다는 YS에 대한 재평가를 통한 그분이 남긴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권에선 사실상의 3김 정치의 부활, 즉 계파정치, 보스정치, 정치야합, 지역주의 등의 부정적 유산에 대한 비난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김정렬 민주동지회 사무총장은 사조직 또는 정치재건을 위한 조직이라는 비판에 대해 “그런 건 아니고, 일종의 정치 친목단체”라고 잘라 말한 뒤 “민주화가 됐지만 지금 얼마나 우리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가.
 
YS계 인사들이 더 낮은 곳으로 가서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기 위해 모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은 “민주동지회는 통일민주당, 민주산악회, 민추협, 나라사랑운동본부 등 4개의 조직이 모여 결성된 조직”이라며 “민주화 운동 당시 개별적으로 참여한 민주화 운동 세력들의 합집합”이라고 말했다.

이는 민주동지회가 기존의 정당 조직을 뛰어넘는 범민주세력의 최대결집체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김 사무총장은 “민주산악회는 지금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현실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것”이라면서 “밥퍼나눔운동 등과 같이 봉사활동을 통해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은 현재 민주동지회 회원 수는 전국적으로 1000여명에 이르고 매년 4회 모임을 통해 밥퍼운동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민주동지회는 이달 중 민주산악회의 법인화, 즉 ‘사단법인 김영삼 민주센터’로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조직의 공정한 운영, 회원들의 공적인 평가 등을 위해 민주산악회의 법인화를 하게 됐다”면서 민주산악회 회원 중 참여의사를 밝힌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직이 운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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