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과 노무현>두 사람의 정치신념, '같은점…다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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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노무현>두 사람의 정치신념, '같은점…다른점'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0.06.14 1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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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노무현 일평생 ‘군정종식’과 ‘지역주의 극복’위한 노력
독재자들로부터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 속에서도 일관성 보여
YS, 군정종식 어렵게 되자 3당합당 통해 정권교체 이뤄낸 진정성

전직 대통령 중 필자의 가슴속에는 ‘김영삼(YS)과 노무현’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고요? 이들의 일관된 정치행보 때문입니다. YS는 25세의 청년으로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50여년간 정치를 해 오면서 ‘군정종식을 통한 민주주의 회복’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습니다.
 
독재자들은 YS를 향해 끊임없는 ‘협박’과 ‘회유’를 시도했습니다. YS가 1969년 3선개헌을 전면에 서서 반대하자, 괴한의 청년들로부터 초산테러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뿐입니까? YS가 대권후보 혹은 야당의 대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작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전에서 독재정권은 이재형 의원을 회유해 YS를 지지하지 못하게 했고, 76년 전당대회에서는 당시 YS 지지파였던 고흥문씨를 협박해 이철승을 지지케 하기도 했습니다.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야당지도자들을 향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대부분의 야당 지도자들이 전두환 정권에 투항을 하거나 ‘반성문’ 한 장 써놓고 외국으로 나가버릴 때에도 YS는 “나를 외국에 내보내려고 한다면 차라리 시체를 만들어라”라고 저항하며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였습니다.

YS의 목숨을 건 투쟁과 6월 항쟁을 통해 87년 마침내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지형 상 군정종식은 불가능했습니다. 야권의 강력한 대권주자인 '김대중(DJ)'이 통일민주당을 깨고 나가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야권이 분열됐기 때문입니다.

군정종식이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되자 YS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3당합당을 감행했습니다. 3당합당을 통해 군정을 종식시키겠다는 ‘도박’을 감행한 겁니다. YS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습니다.

“25%(YS계)대 75%(민정계)의 싸움으로 시작했으니 정치 생명이 위험했어요. (합당 당시) 정치상황이 경상도와 전라도가 완전히 쪼개져 있었고 경상도는 경남과 경북이 갈라져 있어서 (합당을 안하고는)군사정권을 못끝내 군사정권을 업고 정권교체를 하려 했던 겁니다. 노태우는 옷갖 술수를 써서 내가 대통령이 못되게 하려 했지만 나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정신으로 정정당당히 싸웠습니다.”
 
20여년간의 정치역정 통해 지역주의 극복위한 계속된 시도일관
노무현, 지역주의 정당 속으로 들어가 대권잡고, 정국정당 창당
자서전 통해, 자신의 정치일생 전면부정... 진한 아쉬움 남겨


YS의 정치일생을 몇 마디의 글로 대체할 순 없지만, 일관된 신념을 통해 그가 군정을 종식시킨 것은 분명합니다. 그의 일관성은 퇴임 후에도 또렷이 나타납니다.

지난해 YS와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호불호’를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정성을 보여줬습니다. 당시의 인터뷰 내용을 실어봅니다.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용서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화해했다고 말을 했지요. 박정희는 나를 제명해서 죽은 겁니다. 내가 박 정권으로부터 제명당하고 했던 말이 있지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YS는 3당합당과 관련해 “호랑이를 잡기위해서는 호랑이굴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진짜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아낸 겁니다.
 
88년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 간판을 가지고 첫 정치무대에 들어선 ‘노무현’도 ‘지역주의 극복’을 모토로 정치를 해 왔습니다.

그는 95년 민주당 간판을 들고 YS의 정치적 아성이라 할 수 있는 부산에서 시장선거전에 뛰어 들었습니다. 노무현이 ‘민주당 깃발’을 들고 선전하자 집권당이던 민자당도 긴장할 정도였습니다. 노무현의 선전은 ‘지역주의’를 뛰어넘기 위한 도전으로 큰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거 중반 19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한 대권 3수생 '김대중(DJ)'이 유세장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DJ는 ‘지역등권론’을 들고 나오며 지역감정을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지역등권론은 모든 지역이 잘 살자는 뜻이다. 한 줌도 안되는 특권층이 모든 권세를 독점하는 지역패권주의를 깨야 한다.”

DJ가 지역감정을 건드리자 부산에서 노무현은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당시 노무현은 “DJ의 지역등권론은 국민대중을 ‘졸’로 보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반역사적 행위다. 한마디로 지역대결구도를 다시 부활시키는 논리”라며 DJ를 맹비난했습니다.

DJ는 지역등권론을 앞세워 서울과 호남을 석권하자 신당(국민회의)을 창당했습니다. 대부분의 의원들이 다음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 신당으로 배를 갈아탔지만 노무현은 “DJ의 신당은 지역주의 망령을 되살리는 것”이라며 당 잔류를 선언했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야인으로 수년간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노무현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지역주의자라고 맹비난했던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회의’에 입당했습니다. 필자는 당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YS가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해 군부세력과 합당했듯이, 노무현도 지역주의를 끝장내기 위해 지역주의 정당에 들어간 것이라고….

실제로 노무현이 대통령에 오르자 민주당을 쪼개 열린우리당을 만들며 ‘전국정당’을 표방했습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도 노무현의 ‘지역주의 종식’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2010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었습니다. 이 책이 또다시 필자의 생각을 바꿔버렸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운명이다’를 통해 자신의 정치역정을 부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책을 통해 “3당합당으로 맹목적인 지역주의가 조장됐다”며 지역주의 책임을 3당합당으로 돌려버렸습니다. 백번을 양보한다고 해도 이해 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당시 통일민주당을 쪼개 평화민주당을 만들고 4자필승론을 외치며 지역주의에 기대 대통령이 되려 했던 사람이 누굽니까?

또한 자신이 그토록 맹비난했던 지역등권론도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은 ‘왜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겁니까?’, ‘왜 집권당시 한나라당하고 연정을 시도한 겁니까?’ 필자의 머리는 복잡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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