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 이후 민주주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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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 이후 민주주의를 말한다
  • 최신형 기자
  • 승인 2010.06.1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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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로 특정정당 독점...선거구제 개편 등 제도개편 절실

1987년 6월 29일 아침, 서울 관훈동 민정당사 9층 회의실에 나타난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긴장된 표정으로 국민 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여야 합의하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6·29선언이었다.

18대 국회 사회적 합의 과정 무시 여전
대화·타협 등 민주주의 과정 중시해야

한국 헌정사의 대전환을 가져왔던 6·10 항쟁이 올해로 23주년을 맞았다.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정치적 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시대적 요구 그것을 우리는 ‘87년 체제’라고 부른다. 시민의 자유로운 발현을 방점에 두는 87년 체제는 이후 군정을 종식시킨 문민정부,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낸 국민의 정부, 시민주권에 의해 탄생된 참여정부를 거쳐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인 자산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과정에서 우리는 빈부· 지역·노사·좌우이념 세력간 분열과 갈등이 과도하게 팽창됐다는 과오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6·10 항쟁 23주년을 맞은 지난 10일 여야 정치권은 6월 민주항쟁 정신의 계승을 다짐하면서도 현 시점에서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선 여전히 미묘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정미경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6·10 항쟁은 4·19혁명, 5·18민주화운동과 같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기폭제였다”라고 평가하면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그때의 투쟁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선언과 구호에 그쳐서도 안 된다”고 말하며 장외투쟁을 일삼는 야당을 겨냥했다.

반면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은 “6·10 항쟁 이후 정착된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등이 현 정부 들어 급격히 위축되면서 무서운 민심이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표출됐다”며 “분명한 것은 23년이 지난 오늘 여전히 6월 항쟁 당시 제기됐던 과제가 논의될 정도로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맞받아쳤다.

우위영 민주노동당 대변인 역시 “23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광장을 오만과 독선의 이명박 정권에게 빼앗겨 그때 6월의 감동을 감추어야만 하는 폭정아래 놓여 있다”고 평했다.

반면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은 이날 SBS라디오 <서두원의 SBS전망대>에 출연, ‘현 정부 출범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지적과 관련 “지금 누가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생각하겠느냐”고 반문한 뒤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하는 건 정치공세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이어 386운동권의 정치활동과 관련해서는 “당시 386학생운동의 세대들이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면서도 “제도권 정치에 진입해 변화나 발전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자만에 너무 도취되면 새로운 변화에 둔감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이자 ‘쇄신 추진체’ 핵심 멤버인 정태근 의원은 “6월 항쟁이 남긴 민주주의와 인권은 진보나 보수 모두 놓칠 수 없는 가치”라면서 “단순히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고착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했다.

 

▲ 지난 1월1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직권상정하자 야당의원들이 강하게 반발을 하고 있다.     © 뉴시스

낡은 정치지형 재편 필요


87년 체제 이후 2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 정치권은 타자(他者)의 다양한 가치를 재구성하지 못하고 비타협적인 신념만을 고수하는 문화를 반복하고 있다. 지난해 미디어법, 세종시, 4대강 사업 등에서 보듯 18대 국회는 여전히 논의와 합의과정을 무시한 정치문화를 지속했다. 그러자 정치권에선 그동안 잠복해온 국정개혁 과제가 일제히 터녀나왔다.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지역감정을 확대 재생산해온 선거제도 및 행정구역에 대한 개편과 9차 개정헌법 이후 손대지 않았던 낡은 헌법의 개정 문제가 그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역감정에 바탕을 둔 지역주의 투표행태로 인해 특정정당이 특정지역을 독식, 국회가 민의를 대표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제헌절 당시 김형오 국회의장은 정치권의 개헌논의를 공식 제안한데 이어 이 대통령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선거구제 개편 등을 언급했다. 이후 논의가 지지부진하던 선거구제 개편은 지난 8일 대통령 소속 사회통합위원회(위원장 고건)가 이 대통령에게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혁 필요성을 보고하면서 재점화되고 있다.

사통위는 이날 전체회의에서 “지역주의 정치구조가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라고 단정한 뒤 “이러한 지역주의 정치 갈등은 지역별 일당독점이 주요 원인으로, 현행 선거제도에 대한 개선책이 시급한 실정”이라고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어 “한국정당학회가 지적한 현행 선거제도의 문제점은 지역적 지지를 가진 정당만이 유리하다는 것”이라며 “다른 당을 지지한 표가 사표가 돼 국민의 표심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말했다.

박선규 청와대 대변인은 “여당이 손해를 보더라도 민의가 전국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개편이 필요하다”면서 “선거제도를 개편하는 것은 국회가 풀어야 하는 의미 있는 숙제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는 이 대통령의 의중이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현재 여권내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나 홍준표 의원 등 중진급 상당수가 중대선거구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중대선구제의 경우 현재 지역구를 몇 개 단위로 통폐합해야 하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지역기반이 뚜렷한 정당들이 반대할 가능성이 높아 정치권 합의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참여연대 의정감시팀 관계자는 중대선거구제와 관련, “이 제도가 지역주의 해소에 도움이 되는지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지역주의는 단지 제도개편뿐 아니라 시민의식 향상 등 문화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대안으로 시민사회단체가 주장하는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있다.

민주노동당이 지난 17대 총선 결과를 가지고 독일식 정당명부제로 시뮬레이션 한 결과, 39.53%의 정당지지율을 받은 열린우리당은 의석수가 119석(실제 의석수 152석)으로 줄어든 반면, 정당지지율 13.19%에 그친 민주노동당은 40석(실제 의석수 10석)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독일식 정당명부제 역시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거대 양당의 반대가 만만치 않아 논의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이밖에 대통령 권력구조 문제의 경우 5년 단임제 폐지에는 공감하지만 여야간 또는 여당 내 친이-친박이 팽팽히 맞서 있어 여론수렴 절차와 사회적 합의 과정에서 대립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 1987년 6월26일 부산 문현 로터리에서 열린 6·26 평화대행진에 참여한 한 시민.

문제는 소통이야!


전문가들은 87년 체제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정치선진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제도개편뿐 아니라 토론과 합의를 통한 여야간 공존 문화 역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정치선진화를 국정 프레임으로 삼고 있는 이명박 정부와 18대 국회는 미국산 쇠고기 시장 개방, 미디어법 처리 과정 등을 두고 극한 대치 상황을 연출했다. 또 18대 국회 하반기 때는 세종시 원안과 수정안을 두고 이명박·정운찬·친이계 vs 야당·친박계로 극명히 갈리며 사실상 식물국회가 돼 버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0년도 예산안 심의·확정을 두고 여야는 2009년 12월 9일 정기국회 마지막 날까지 4대강 사업 예산 등을 두고 끝없이 대립하는 등 파행에 파행을 거듭했다. 당시 18대 국회는 예산안을 법정 기한내 심사착수 조차 못했고, 앞서 하루 전인 12월 8일 국토해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은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였던 4대강 살리기 사업 예산을 기습 통과시켜 정국을 파행으로 몰아넣었다.

 야당인 민주당 역시 한나라당의 기습처리에 반발, 이날 오후 국회 본회의 출석을 거부했다.
이남영 전 한국정치학회장은 이에 대해 “현 정부는 목표를 세워두면 모든 정치적 자원을 총집결해 밀고나간다”면서 “단순 다수결, 결과도출만을 위한 표결은 민주주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어 “결과도출만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면 상임위에서 논의하지 말고 그냥 본회의에서 표결하면 될 것”이라고 꼬집은 뒤 “절차적 민주주의에는 보이지 않는 대화와 타협이 있다”고 조언했다. 이 같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의 속도전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소통 부재에서 찾는다. 현 정부의 소통담론에 대한 부재는 새로운 참여, 개방 네트워크를 추구하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한다는 것. 김호기 연세대학교 교수는 ‘2.0세대의 사회학’이라는 논문에서 쌍방향 의사소통을 통해 자아의식과 사회의식을 스스로 형성해 가는 젊은 세대를 2.0세대라고 규정했다.

김 교수는 “2.0세대는 외환위기 이후의 88만원 세대와는 다른 참여 지향적, 탈물질화된 디지털 감성세대”라면서 “인터넷 공론장이 매개하는 네트워크화된 개인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2.0세대는 단순히 정치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공적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중시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87년 체제 이후 한국정치는 과거 권위주의 정당과 지역구도에 의한 선거판세, 퇴행적 정당정치 때문에 국민주권 확보라는 사회적 협약을 이끌어내지 못한 측면이 크다.

정치선진화를 국정 과제로 삼고 있는 2010년 정치권과 국민 모두 쌍방향 소통을 할 준비가 됐을까. 우리 모두 ‘한 나라의 정치수준은 국민의 정치의식을 결코 넘지 못한다’는 명제를, 근대 사회학은 이 이상의 이론을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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