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아주 오래된 친일 청산 이야기', 당신 견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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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아주 오래된 친일 청산 이야기', 당신 견해는?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5.08.13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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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 친일 청산을 하지 못했나
'반민특위' 이후, 친일 청산 작업…YS '주고', 盧 '받고'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 친일 청산을 요구하는 시민단체 ⓒ 뉴시스

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지도 어느덧 70년이 흘렀다.

그간 대한민국은 시련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경제·문화 중심지로 발전해 왔다. 동시에, 진작 직면했어야 할 '미래'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70년의 풍파에 스러져갔다.

'과거를 잊고 새로운 미래로 도약하자'는 구호가 난무하는 시대지만, 그 아픈 과거 깊숙이 파묻혀있는 '오래된 미래'를 발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한 발자국은 우리 민족에게 요원한 일이 되리라.

'오래된 미래'란 바로 친일(親日) 청산을 말한다. 우리 민족은 해방 직후 마땅히 거쳐야 할 '일제강점기 하 반민족행위자 처벌 과정'을 건너뛴 채 7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거쳐야 할 '미래'를 거치지 못한 대한민국은 오늘날 친일파의 후손들은 정·재계를 주름잡고,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쪽방촌을 전전하는 현실을 목도하기에 이른다.

광복 5년 만에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친일 청산이 유야무야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왜 우리 민족은 '오래된 미래'를 마주하지 못한 채 70년을 보내야 했나. 대한민국이 해방 직후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이유, <시사오늘>이 짚어본다.

'반민특위'는 왜 실패했나

사실 해방 직후, 친일 청산 작업이 아예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발족, 특별재판소·검찰부 등을 구성하면서 친일 청산에 나섰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활동 343일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그 까닭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그리고 그들을 위시한 잔존 친일 세력들의 방해 공작에 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40년이라는 긴 일제 식민 지배는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에 의한 남북분단을 한반도에 불러왔다. 그리고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곧 친일파의 재(再)득세를 초래했다.

특히 남한에 자리한 미군정은 옛 조선총독부 산하 친일인사들을 미군정과 공권력의 요직에 앉혔다. 이는 북한에 자리한 '냉전시대' 최대의 라이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군정의 '반공 책략'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출범한 이승만 정권 입장에서는 반민특위의 구성이 탐탁스러울 리 없었다. 실제로 이승만은 국회가 반민특위 구성을 추진하려하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반민특위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자, 이승만 정권과 잔존 친일파도 '국회프락치사건'과 '반민특위습격사건'으로 본격적인 반민특위 방해 공작에 나섰다.

국회프락치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일부 강경파 반민특위원들에게 남로당 프락치 혐의를 씌워 체포한 일이며, 반민특위습격사건은 이승만의 직접 명령을 받은 공권력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테러를 자행한 사건이다. 이후 반민특위는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반민특위' 실패는 이승만 책임 아니다", 이견도 있어

▲ 故 이승만 박사 ⓒ 뉴시스

이처럼 반민특위가 실패한 결정적 요인이 이승만 정권과 잔존 친일파의 방해공작이라고 보는 시각이 학계의 정설이기는 하나, 일각에서는 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지난달 31일 CBS<박재홍의 뉴스쇼>에 출연, "(이승만이 반민특위 구성에 반대한 것은)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친일파와 이승만을 연결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반민특위습격사건은)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을 위배했기 때문에 시정조치를 내리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친일파의 방해공작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권 교수는 "그건 부분적인 것만 가지고 침소봉대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이어 '반민특위의 친일 청산 작업이 제대로 안 된 건 사실이 아니냐'는 진행자의 물음에 권 교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며 "국가 정책에 따라 강온책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민특위' 이후, 친일 청산 작업…YS '주고', 盧 '받고'

▲ YS(김영삼 전 대통령) ⓒ 시사오늘

반민특위의 친일 청산 실패 이후, 이승만은 독재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는 독재 정권의 수족이 됐다. 일제강점기 하 반민족행위를 자행했던 식민지 지배세력이 해방 이후 반공이데올로기를 이용해 대한민국 지배계급으로 '세탁'된 셈이다.

그런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반공이라는 시대정신은 더욱 증폭됐고, 친일 청산의 목소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거한 국민들은 1960년 4·19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새싹을 틔웠고, 친일 청산에 대한 열망도 다시 재점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또한 잠시였다.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민주주의의 새싹은 1년 만에 군홧발로 짓밟혔고, 친일 청산에 대한 열망은 박정희 군부정권이 수립되면서 수그러들었다.

친일 청산의 목소리는 YS(김영삼 전 대통령)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YS는 취임 이후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 친일 청산을 재환기시켰다. 조선총독부 철거는 그 일환이었다.

정당은 다르나 YS 계보라고 분류할 수 있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YS의 '역사바로세우기 운동'과 흡사한 '과거사 청산'을 대권공약으로 내세웠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발족, 친일반민족행위자 1000여 명의 명단을 발표했으며, 몇몇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문민정부 이후의 이와 같은 친일 청산 움직임은 한편으로는 '남남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친일 청산 실패가 '남남갈등'의 뿌리이긴 하나, 민주화 이후의 과격한 친일 청산 작업은 또 다른 측면의 '남남갈등'을 낳았다는 지적이다.

참여정부가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의 객관성 문제가 대표적이다. 해당 도서 집필을 맡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당시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잣대로 친일파를 구분해 많은 물의를 빚었다.

일례로 편찬위는 조선일보 제2의 창업자 계초 방응모를 1933년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일파에 포함시켰다. 방응모는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135만 원을 조선일보에 투자, 일제강점기 당시 국민 계몽에 앞장섰던 인물로 평가된다(관련기사: '방응모, 전재산 계몽사업에...친일파?',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39).

이와 관련,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연구실장은 <한국 민주화와 친일 청산 문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1년)에서 "반민특위가 실패한 이후 친일 청산 문제는 오랜 잠복기를 거쳐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다시 대두됐다. '제2의 친일 청산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었고, 운동의 방향도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인적·제도적 청산보다는 진상규명을 통한 역사적 청산에 중점을 뒀다. 그 성과는 컸다"고 밝혔다.

이어 박 연구실장은 "그러나 그 성과가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적 문제가 원인이지만, 최근 친일 청산운동이 갖고 있는 특성, 즉 해방 직후 해결되지 못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역점을 둔 나머지 반민특위 와해 이후 친일청산 문제를 소홀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며 "따라서 친일 청산이 내포하고 있는 민주적·평화적 가치를 확산시키고 사회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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