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은 도둑놈 배짱이 없으면 못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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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은 도둑놈 배짱이 없으면 못하는 거야”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8.12.0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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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구의 현대정치사]①5대 민의원선거와 김석원(金錫源) 의원

노병구 민주동지회장은 자유당 때부터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정치계의 산증인이다. 노 회장은 ‘진산계’로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한 이래 ‘고흥문계’를 거쳐 ‘상도동계’로 활동했다. 50여년간 정치현장을 누빈 노 회장에게 한국정치사를 듣기위해 ‘시사오늘’은 ‘노병구의 현대정치사’를 연재키로 했다.

김석원 후보 찬조연설로 정치권 발들여
 
자유당정권의 몰락으로 새로운 현정이 시작되는 1960년 7월 29일의 총선거가 예고되었다. 김석원 이사장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번 제5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영등포 갑구에서 출마를 하는데, 노 교장이 정견 발표회장에서 찬조연설도 해주고 또 청년 학생들을 동원해서 내 선거운동을 맡아서 적극적으로 해주어야겠네.”

김석원 이사장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나는 당황했다. 우범석 동장님을 위해 찬조연설을 한 것이 내 경험의 전부인데, 동회장선거와는 차원이 다른 민의원선거에서 연설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럽고 겁나는 일이어서 정치연설은 자신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김석원 이사장은 다시 부탁했다.

“내가 무소속으로 출마를 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찬조연설을 해줄 마땅한 사람이 별로 없네. 다만 학도의용군 용사회 부모 중에 윤남하(尹南夏) 목사님이 계신데, 연설을 아주 잘하셔서 그분에게도 부탁을 했으니 노 교장은 너무 큰 부담 갖지 말고 윤 목사님과 함께 내 요청을 거절하지 말아주게.”

나는 학교로 돌아와서 선생님들과 상의를 했다. 선생님들은 이쪽에서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잘 도와주시는 분의 간곡한 요청인데 우리가 다 같이 김석원 이사장님이 꼭 당선되도록 연설도 하고 적극적으로 운동을 해드리자고 나를 부추겼다. 나는 자신이 없고 어렵기는 했지만 그동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다 함께 지혜를 짜서 힘껏 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6월 27일, 선거일이 공고되고 영등포 갑구에는 무소속의 김석원 이사장과 민주당 소속 전의원인 유홍 선생을 비롯한 다섯 명의 후보가 등록을 마치고 한 달간의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자유당 독재에 시달렸던 유권자들은 연중 가장 무더운 7월 한 달의 선거운동 기간 내내 정견발표회장마다 수만 명씩 인산인해를 이루어 김석원 후보의 정견과 윤남하 목사님의 찬조연설과 풋내기인 나의 찬조연설을 경청하고 박수와 격려를 보내주었다.

연설하는 태도도 연설 내용도 풋내기였던 나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김석원 후보도 나에게 용기를 주었지만, 특히 윤남하 목사님의 지도와 격려는 이후 내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데 튼 보탬과 교훈이 되었다.

그때도 남에게서 돈을 받는 것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큰 문제가 되었는데, 전의원인 민주당의 유흥 의원이 봉투에 ‘촌지(寸志)’라고 쓰여진 돈봉투를 받은 것이 발각되어 선거가 끝날 때까지 찬조연설의 고정메뉴로 등장했다.

“유홍 의원은 촌지 30만 원에 자신을 팔아먹은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4·19 혁명으로 수많은 학생과 국민의 피로 얼룩진 새 시대에 우리의 대변자로 다시 뽑힌다고 하면, 이 나라에는 4·19가 열 번이 와도 학생과 국민 수만 수십만이 또 피를 흘리고 쓰러져도 또다시  4·19를 부르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인데 몇 푼의 돈과 인정에 휩쓸려 하나밖에 없는 내 목숨 같은 주권을 팔아먹어서야 되겠습니까?

아무리 민주당 공천 후보라고 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여러분의 깨끗한 한 표로 냉엄한 심판을 내려 이 나라에 다시는 부정부패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이번 선거에 아주 싹부터 잘라내야만 하겠습니다. 독재자 이승만 정권 아래서 군대 내의 잘못을 지적하고 옳은 건의를 하다가 미움을 사서 군에서 쫓겨나고도 당당하게 교육사업에 이바지하며 깨끗하게 살아오신 김석원 장군에게 여러분의 귀중한 표를 모아 압도적으로 당선시켜 확실하게 힘쓸 수 있게 여러분에게 머리 숙여 호소합니다.”
 
김석원, 민주당 후보에 1만여표차 압승
 
그때 나는 신길동교회 성가대와 고등부를 맡고 있었는데, 유홍 후보의 딸 중 이화여자대학교에 다니는 유○○선생이 같은 성가대 대원이었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우민화가 내가 맡은 고등부 학생이었다. 내가 정면으로 그들의 아버지를 공격해 낙선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나라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와 우리 학교와 김석원 후보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처제가 된 맹명자에게 간단하게 원고를 써주고 그것을 외우도록 해 유일한 여자 연사로서 연설을 하게 함으로써 많은 박수와 칭찬도 받았다. 맹명자는 유민화와 또래 친구로 내가 맡은 고등부 출신이었는데 반대편에서 유세를 했으니, 이러한 일을 통해 정치권의 냉엄한 현실을 나는 일찍이 체험했다.

선거결과 당시 서울에 국회의원 선거구가 16개였는데 15개 선거구에서 민주당 공천 후보가 당선되었고, 유일하게 영등포 갑구만 무소속인 김석원 후보가 무려 1만여 표 차로 압승을 거두고 당선되었다.

4·19 혁명 직후 치러진 총선거는 전국에서 막대기만 갖다 놓고도 민주당 공천장만 붙으면 당선되었다고 할 정도로 민주당이 압승을 했는데, 이곳에서는 민주당 소속 전의원인 유홍 선생이 낙선을 했으니 본인과 가족들의 낙담과 좌절은 오죽했을까 하는 딱한 생각도 들었다.

나는 입후보자의 선거운동원으로 정견발표회에서 찬조연사로 활동한 것뿐인데,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마치 내가 국회의원에 당선이라도 된 양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고 또 격려도 받고 보니 참으로 어깨가 으쓱할 정도로 힘이 나고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석원 의원은 늘 과묵한데다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탓인지 너무도 엄격해서 성남고등학교 교직원들은 물론 일반 주변사람들도 그 앞에서 제대로 말을 못하는 분위기였는데, 나한테는 늘 다정한 할아버지로서 대해주었다.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 집은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다니는 먹을거리 장사를 계속하고 아버지는 신발 꿰매는 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성남고등학교에서 학교 교사의 한 모퉁이를 내주어서 한쪽에 좌판을 놓고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서는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의 신발을 꿰매주고 얼마간의 돈을 버는 처지였다.

내가 김석원 이사장님을 만나러 가면 먼발치서 신발을 꿰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아버지가 측은하게도 보였고 또 무한한 감사도 드렸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창피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숨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많은 선생님들은 우리 부자관계를 알면서도 자기들이 존경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는 김석원 이사장님과 매우 가깝게 지내는 나를 만나면 무척 반가워하면서 어떨 때는 자기들의 일을 대변해달라고 은근히 말을 비치기도 했다. 김석원 이사장님도 우리 부자관계를 잘 알고 계셨는데, 내게도 아버지에게도 한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대해주셨다.

내가 성남고등학교로 김석원 의원을 찾아가면 넓은 이사장실로 직행했고, 김석원 의원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나를 반갑게 맞으면서 민심 돌아가는 내용을 자세히 묻고는 정치현안에 대한 의견을 말해보라며 손자 같은 나의 의견을 경청해주었다.

김석원 의원은 국방전문가로서 언론에 자주 나왔는데, 한번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군에서 쓰는 모든 운반수단을 자동차에만 의존하는 것은 우리나라 재정상 문제가 있으니 군마(軍馬)를 키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보도를 접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말을 키운단 말이냐?”고 빈정댔다. 그런대 그런 현실을 깨우쳐드려야 한다고 하면서도 직접 김석원 의원 앞에 가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석원 의원의 재출마 권고에 “국회의원은 도둑놈 배짱이 있어야 해”라며 거절
 
아울러 민주당정부의 국방장관으로 김석원 의원이 적임자인데 국방장관 자리를 고사하고 있다는 보도도 함께 나왔는데, 나는 그때 대방동에 살던 그분의 집으로 찾아갔다.
말[馬]에 대한 여론을 내게서 듣고 김석원 의원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국민의 그런 여론을 모르겠나? 지금 우리나라 재정이 말이 아니야. 기름은 그 귀한 달러를 주고 사와야 하는데 달러는 어디 있고, 국방은 하루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나라의 업무인데 자동차를 못 굴린다고 손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선 우리나라 재정형편이 좋아질 때까지는 말이라도 키워서 국방수요에 대체하자는 말이지. 자유당정권이 쌀을 바닥까지 긁어먹어서 쌀독에서 먼지만 나는 형편이야.
배가 고파도 밥을 지을 쌀이 없다는 말이야. 김칫독을 뒤져서 남은 김치를 물로 씻어 시래기죽이라도 쑤어 먹어야 연명이라도 할 게 아니냐 그 말이지. 국방장관? 요새 장관하려고 모두 혈안이 되어 있는데 나까지 끼어들어? 오죽한 놈이 장관을 하겠나? 나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임무에만 충실하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고 여러분들에게 전해주게.”

나는 김석원 의원이 애국심으로 가득 차서 욕심 없이 깨끗하게 의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행각하며 인사를 하고 나왔다. ‘뜨거운 염천 한 달 동안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비지땀을 흘리며 선거운동을  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뿌듯함을 안고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얼마 뒤 김석원 의원의 보좌관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만났더니 맹명자의 이력서를 한 통 보내달라고 했다. 이력서를 보내고 얼마후에 맹명자를 국방부 건설본부에 취직시켰으니 가보라는 연락이 왔고, 맹명자는 그때부터 국방부 건설본부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 맹명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상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집에 있었다. 제대로 된 직장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인데 크게 배려해준 김석원 할아버지에게 나는 충심으로 감사했다.

김석원 의원은 애국심뿐 아니라 의리도 남다른 분이었다. 그분이 타계한 지금, 왜정시절의 군인 경력을 들어 친일하라고 하기도 하지만 해방 후 그의 행적은 훌륭했다고 생각하며, 단지 9개월의 민의원 생활이었지만 사심 없는 모범을 보였던 것으로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미소짓던 할아버지를 지금도 나는 그리워한다.

나와 김석원 의원과의 인연 덕분에 성남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들 중에는 지금도 나를 성남고등학교를 졸업한 동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나는 성남고등학교 이웃의 서울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단지 서울고등공민학교를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관계로 좋은 인연을 맺었으며, 지금껏 나는 그분을 잊지 못한다.

김석원 의원이 의원이 된 지 9개월쯤 지난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서 헌정은 중단되고 의회는 해산되었다. 그후 민정이양 조치로 6대 국회의원선거가 1963년 11월 26일 실시되었는데, 당연히 김석원 의원이 출마를 한다면 아무도 그를 당할 수 없을 만큼 유권자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어느 날 재출마를 권고하려고 찾아간 나에게 김석원 의원이 말했다.
“나보고 또 출마를 하라고? 국회의원이 되고 보니까 국회의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국회의원은 도둑놈 배짱이 없으면 못하는 거야. 국회의원은 한번 해봤으면 됐지 두 번은 할 게 못되네. 나는 안 해요. 이제 우리 귀여운 아이들만을 위해 남은 여생을 교육에만 전념하기로 했네. 노 교장, 섭섭하게 생각지 말아줘.”

많은 사람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마당에 당시의 형편으로는 김석원이라는 이름만 걸어도 당선이 확실했지만, 김석원 의원은 깨끗이 재출마를 거절했던 것이다.
사심 없는 할아버지의 뜻을 나는 감격하여 받아들이고 ‘이런 분이 있기에 이 나라는 아직도 장래가 밝을 것이다’ 하는 뿌듯함을 안고 돌아왔다.
 
노병구(盧秉九) 이력
· 1960년 민중당 영등포 갑구당 부위원장
· 1963년 신민당 영등포 갑구당 부위원장
· 1967년 신민당 3선개헌 반대 투쟁위원
·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출마
· 1980년 제11대 국회의원 출마
· 1983년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운영위원
· 1987년 제13대 국회의원 출마
· 1992년 민주산악회 연수원 원장
· 1994년 한국마사회 유도부 단장
· 1996년 한국마사회 부회장 역임
· 현 민주동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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