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일, "새누리당엔 애증이 교차…당복귀? 생각 중"
박세일, "새누리당엔 애증이 교차…당복귀? 생각 중"
  • 홍세미 기자
  • 승인 2015.09.1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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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일 서울대 교수“YS는 설득의 귀재, 애국심·포용력 커…역사평가 공정해야”"여의도연구원장, 중도 거부했으면 박근혜·김무성에 부담…" “2005년 행정수도 이전 반대, 지금이어도 의원직 사퇴할 것”“통일 이루려면 통일의지, 북한동포 마음잡기, 통일외교 필요”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홍세미 기자)

▲ 박세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 시사오늘
서울대학교 박세일 명예교수는 평생 ‘교육’과 ‘연구’를 업으로 삼았다. 대한민국에 거대 담론을 제시하며 공론화했다.
 
문민정부 시절엔 세계화(Globalization)를 화두로 던졌다. 대한민국도 세계화 흐름에 발맞춰 나아가야 한다며 구체적인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현재는 ‘선진통일’을 주장하고 있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통일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진통일 이후에는 한반도는 세계국가(global state)로 비상할 것으로 보고 있다.  
 
1980년부터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 법학 교수로 재직했다. 1994년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교육과 연구를 업으로 삼던 그가 어떤 이유로 정계에 입문하게 됐을까?
 
첫 질문으로 ‘YS와의 인연’을 물었다. 박 교수는 소리 내 웃으며 “좋은 질문”이라고 답했다. “그게 언제인가…”라고 말하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1987년, 내가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교수하던 시절이다. 6·29 선언 전이다. 부산의 박종웅 전 의원이 교수실로 날 찾아왔다.”
 
‘총재가 경제학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YS가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면서 날 찾는다고 말했다. 나는 KDI(한국개발연구원)에 있다가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박 전 의원에게 ‘그런 이야기면 KDI 연구원에게 가서 이야기 하든지, 아니면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찾아가라’고 답했다. 전두환 정권 때였다. 경제학 교수도, KDI 박사들도 어떤 불이익을 당할까봐 야당 대표를 만나는 것을 꺼린다고 하더라.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불공평한 것 같았다. 학자들은 여야를 떠나 올바른 정책을 이야기하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내가 알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YS와 처음 만나게 됐다.”
 
박 교수는 주로 저녁에, 앞문과 뒷문 있는 음식점에서 YS를 만났다. YS가 앞문으로 들어가면 박 교수가 뒷문으로 갔다. 기자는 ‘감시 때문에 앞문, 뒷문을 이용한 것이냐’고 물었다. 
 
“꼭 감시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만나는 게 알려지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6·29 선언 전이니까. 그리고 나도 정치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 때 만나서 경제 이야기를 나눈 게 첫 인연이다.”
 
박 교수는 1987년 대선에서 YS를 도왔다. 캠프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다. 경제정책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줬다. 하지만 YS는 당시 대선에서 2등 낙선했다. 그 후 1990년,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YS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JP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했다.
 
“난 3당 합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동안 야당이라서 힘이 없어서 도와드렸는데 합당을 해서 여당이 됐다. YS도 합당은 했지만 속은 편치 않았던 것 같다. 
 
한번은 나를 상도동 자택으로 불러서 2-3시간 동안 3당 합당을 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본인도 참 힘들었다고 말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잘한 선택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정권 교체가 힘들다는 확신이 있어 했다고 말했다.
 
이해는 하지만 심정적으로 공감은 못 했다.  나는 1992년 초 미국에 세계화(Globalization)에 대한 연구를 하러 갔다. 1992년 말 대선에선 YS가 대통령이 될 줄 알았다. ‘선거 잘 치르겠지’라고 생각했다. YS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도 미국에서 TV를 통해 봤다.”
 
대선 전, 박 의원은 김덕룡 전 의원과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YS가 또 경제학 공부하시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이제 힘 있는 여당의 대표신데 내가 굳이 도울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화가 진전되기도 했다. 그래서 경제학과 교수한테 가보라고 했다. 그 때 발탁된 사람이 박재윤 전 경제수석이다.”
 
박 교수는 YS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인 1992년, ‘세계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빌 클린턴 정권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당시 하버드대 로버트 라이시 교수가 쓴 <국가의 책무(The Work of Nations)>라는 책을 우연히 읽고 나서부터다. 
 
“전 세계적으로 문명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 전까진 산업화(industrialization) 시대를 전제로 한 ‘국가 경영’이 주 관심이었다. 1992년 를 읽었는데, 상당히 큰 충격이었다. ‘산업화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세계화 시대라는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세계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연구부터 해야 했다. 세계화 시대가 도래하면 국가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지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1992년 뉴욕의 콜럼비아 법대로 갔다.”
 
 박 교수는 미국에서 안식년을 마치고 1993년 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해 말 12월부터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에 발탁됐다. 정치 참여에는 손사래치던 박 교수는 어떤 계기로 청와대에 몸을 담게 됐을까.
 
“미국에 있는 동안 YS가 하나회 척결, 실명제 도입, 공직자 재산공개 등 큰 국가과제를 잘 풀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가 운영 시스템은 거의 바꾸지 않고 있었다. 세계화 시대에선 산업, 노동, 교육, 문화 등 정책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시스템 개혁에 대한 문제 의식이 거의 없었다. 
 
1994년 1월에 ‘대한민국은 왜 시스템을 바꾸지 않느냐’고 <신동아> 모두 칼럼을 쓰면서 문민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내 기억으론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 같다.
 
그해 여름 YS에게 연락이 왔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나는 YS에게 ‘세계화 시대에 맞게 대대적인 제도와 의식 개혁이 필요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체적인 국가 운영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메모를 드렸다.”
 
개혁은 국가가 위기에 당면할 때 주장하기 쉽다. 그러나 당시엔 큰 문제가 없었다. 대통령 지지율도, 경제성장률도 높았다. 박 교수도 당장 YS가 개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해 12월에 학교에 있었는데, 아침에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여비서가 ‘여기 청와대입니다, 각하 전화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큰일났구나. YS가 이내 ‘도와 달라’고 했다. 나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당시엔 학생들 가르치는 데 큰 보람을 느끼고 있을 때다. 대외적으론 경실련 활동을 바쁘게 했다. 나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 그때 청와대로 가려면 교수직 사표를 내야 했다. 40대 후반이었다. 사표 내고 청와대에 들어가서 몇 년 일하고 나면 학교로 돌아올 수도 없었다. 참여 안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박 교수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YS는 ‘그럼 점심이나 먹자’고 했다. 박 교수는 YS를 만나기 전날까지 그 어떤 자리도 맡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정권을 잡고 2년 간 많은 일을 했지만, 내가 더 해야 될 게 있을 것 같네.  10년, 20년 후에 서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돌아보면 내가 지금 반드시 해야 할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감이 잡히질 않아. 세계변화를 보면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이뤄야 하는데 그걸 모르겠네. 박 교수가 강연이나 글을 보니까 세계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구체적 아이디어가 많은 것 같은데, 진정 애국심이 있다면  밖에서 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서 직접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나고 나서 내가 설득 당했다. YS는 만만한 분이 아니다. 지식인들은 본래 권력이나 돈의 유혹에는 사실 강하다. 그런데 약한 게 ‘명분’이다. YS가 나라와 시대의 대의를 위해서 일을 하자고 하니까 정말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학교에 있으면 편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자기가 몸을 던져서 이 시대를 위해 뭘 해보겠다고 하는데, 내가 내 편안함만을 따지고 있는 것은 정의가 아니고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몸을 던지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개혁을 할 때 사전에 상의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개혁을 하면 사회는 반드시 시끄러워집니다. 그러나 절대 물러서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말했다. 그 전날까지 굳게 다짐했지만 점심을 먹다가 수락을 한 게 돼버렸다.” 
 
1994년 12월 박 교수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들어갔다. 과거 청와대엔 정책기획수석이 없었다. 박 교수가 들어가면서 생겼다. 모든 정책분야를 관장해 ‘왕수석’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들어가자마자 세계화를 화두로 던졌다. 처음에 할 일은 세계화 개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1994년 12월이었다. 100년 전인 1894년에 갑오개혁이었다. 갑오개혁은 근대화를 위한 개혁이었고, 그 100년 후 세계화를 위한 개혁을 외친 것이다.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1995년부터 사법 개혁과 5·31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온갖 시끄러움이 있었지만 노동 개혁도, 정보화를 위한 행정 개혁도, 그리고 생산적 복지 개념을 처음 도입한 복지 개혁도 추진했다. 연금 개혁도 일부 추진했다.  3년이 너무 짧았다. 사실 그 당시에 정치 개혁, 재벌 개혁 등에 대한 개혁안도 준비하고 있었으나 정권 말기에 힘이 빠지고 더구나 정권이 바뀌면서 못 이루고 나왔다.”
 
YS는 설득을 잘한다고 알려졌다. 박 교수에게 YS의 설득 능력에 대해 물었다.
 
“말을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설득력이 컸다. YS와 대의를 놓고 이야기하면 그분은 쉽게 동의한다. 사실은 개혁할 때도 YS가 정치적으로 불리해지는 게 많았다. 특히 선거가 가까워지면 분명 지지율이 떨어질 법한 정책이 많았다. 그러나 ‘각하, 이것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러곤 밀어붙였다. YS에겐 애국심이 있다. 또 YS는 포용력이 컸다. 손학규 전 상임고문, 이인제 최고위원, 노무현 전 대통령 등 YS는 사람을 광범위하게 많이 모았다.”
 
▲ 박세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YS에게 애국심이 있어 대의를 중시한다고 말했다 ⓒ 시사오늘
이수성 대망론과 박세일
 
YS정부 때 총리로 발탁된 이수성 전 총리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대망론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이 전 총리 발탁에 박 교수가 개입됐다는 후문이 돌았다.
 
“이 전 총리는 법대 선배다. 인품이 좋다. 균형 감각이 있고 친화력이 뛰어나다. 총리감으론 좋다고 생각했다. YS에게 ‘이 전 총리는 굉장히 유능한 분입니다. 일을 맡으면 친화력과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잘하실 것입니다’라고 건의 드렸다. 그러나 이 전 총리 본인이 그 자리를 마다했다. 서울대학교 총장 할 때였다. 그래서 마지막에 내가 가서 설득했다.
 
율곡이 퇴계에게 쓴 편지를 인용했다. ‘선배님, 정치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시대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총장은 명예롭고 편하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 몸을 던지는 게 학자의 도리가 아닙니까? ’라고 이야기했다. 이게 계기가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로 다음 날 총리 발표가 났다.”
 
이 전 총리의 인기는 대망론까지 이어졌다. 박 전 교수는 인품도 좋고 친화력이 뛰어나 대권 주자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 전 총리에게도 단점은 있었다고 말했다.
 
“대권 주자가 된 이후에 보니까 한두 가지 부족한 점이 보였다. 일단 국가의 지도자가 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인품’이 있어야 한다. 지도자로서의 ‘덕’과 ‘용기’가 있느냐다. 이 전 총리는 그점은 충분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이 ‘정책적 안목이 있느냐’다.

국가의 지도자는 국가 정책에 대한 준비 과정을 탄탄하게 거쳐야 한다. 이것은 비단 이 전 총리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한국의 정치인 대부분은 국가 정책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화 시대에 국가를 운영하려면 어느 정도의 전문성과 종합적인 정책 안목이 필요하다. 적어도 국가 정책의 큰 기둥은 알고 있어야 한다. 자세한 부분은 전문가나 공무원들에게 맡기면 되지만, 큰 방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식견과 준비는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 문제라고 하면, 세계화 시대 노동 문제를 올바로 풀어 갈 큰 정책 방향이 무엇인가 정도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큰 방향에 대한 올바른 소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다. 과거나 현재나 대권 후보자로 거론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국가 비전 국가 정책을 소홀히 한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 국회에서 튀는 말을 하고 몇 가지 이미지 관리만 잘하면 대권 주자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수성 전 총리가 국정운영에 대해서 정책적으로 관심을 크게 가져야 하는데 ‘좋은 사람 쓰면 되지’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점을 단점으로 꼽는다.”
 
박 교수는 이회창 전 총리의 발탁에도 도움을 줬다고 언급했다.
 
“이회창 씨는 그때 외부에 있었다. 그분이 개혁적인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이회창 전 총리를 만나러 갔는데, 그 비서실장이 황우여 변호사였다. 
 
이회창 씨는 참 단아했다. 보기 힘든 담백하고 반듯한 이미지였다. 이 사람이 잘하면 당의 책임자도 되고 뭔가 나라를 바로잡는 데 기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회창 씨는 처음에 대표직에 응하지 않았다. 내가 몇 번 만나고, 다른 여러 사람들도 설득하고 YS도 찾고 해서 맡게 됐다.”
 
저평가된 대통령, YS
 
박 교수는 YS가 대단히 저평가된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하나회 척결 △세계화개혁 △5·31교육개혁 △사법개혁 △노동개혁 △행정정보화개혁 △지방자치제 도입 등 YS가 한 일은 꼽을 수도 없이 많다고 설명했다. 특히 우리가 피부로 와 닿는 현실적인 정책도 많이 추진했다고 언급했다. 앞으로 YS의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YS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다. 문민정부 때 출입기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YS가 너무나 저평가되고 있어서 제대로 알리기 위해 책을 집필하고 있다고 들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반드시 재평가될 것이다. 마지막에 IMF가 터져 이미지 타격을 입었고, 정권이 바뀌면서 아주 불리해졌다. 그러나 YS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우리 사회가 상당 부분 많이 달라졌다. 일일이 다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앞으로 YS가 한 일이 세상에 더 널리 알려지고 퍼질 것이다. 역사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
 
행정수도 이전과 의원직 사퇴
 
박 교수는 2005년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을 반대, 의원직을 사퇴했다. 박 교수는 수도 이전에 대해 “해방 이후 최대의 망국적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지금이어도 의원직에서 사퇴할 것인지 물었다. 박 교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갈수록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려고 수도 분할하는 나라도 없고, 수도 분할해서 균형 발전을 이룬 나라도 없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균형 발전하려면 권력과 돈을 지방으로 분산해야 한다.  하루빨리 수정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어떤 장관을 만났더니 '공무원들의 1/3은 버스 속에 있고, 1/3은 서울에 있고, 1/3은 세종시에 있다'고 한다. 공무원들의 고통과 국민의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이래가지고 국정운영이 제대로 되겠는가? 메르스 사태도 공무원들 사이에 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걷잡을 수 없이 퍼지게 되기도 했다.”
 
▲ 박세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양당제를 타파하려 국민생각을 창당했다고 밝혔다 ⓒ 시사오늘
국민생각과 제3정당
 
박 교수는 2012년 총선을 앞두고 ‘국민생각’을 창당했다. 박 교수는 서초갑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대패의 이유를 물었다.
 
“나의 능력과 안목 그리고 스스로의 준비가 크게 부족했다. 여러분들과 함께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했다. 깃발이 옳으니까 그것으로 시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  우리나라 양당제는 지역주의, 이념 양극화에 의지해서 만들어 졌다. 상당히 기득권화 돼있다.

문제는 국가 비전과 국가 정책을 소홀히 한다는 점이다. 본래 민생은 여의도 정치보다도 국가정책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 나는 국가비전과 국가정책을 가볍게 생각하고 부실하게 대하는 것이 지금 양당제의 가장 큰 문제이다. 올바른 국가비전과 정책을 내세워서 표를 얻는 게 아니고 지역 감정이나 이념 편향에 호소하여 표를 얻으려고 한다. 국가를 어디로 어떻게 끌고 나갈지 별 생각도 없는 분들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세계화 시대는 국가 비전과 국가 정책을 가지고 국가 간 경쟁을 하는 시댄데, 지역과 이념에 의지하는 양당제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국민생각당을 만들어 국가 정책을 소중히 하는 ‘합리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를 모아서 국회에 진입하려 했다. 몇십 석이라도 만들면 국회 의결에서 캐스팅보트가 된다.

우리나라 정치를 단순한 권력 투쟁형 정치가 아니라 국가 경영형 정치가 되도록 몰고 나가려 했다.  즉 국가 비전과 국가 정책 간의 선의의 경쟁이 중심이 되는 정치가 되도록  몰고 나가려 했다. '여야 정치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지지 않겠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준비도 부족하고 내 개인 능력도 많이 부족했다. 작지만 열린 공간을 만들어내려 했는데 하지 못했다.”
 
박 교수와 함께한 장기표 통일 2016포럼 대표는 중간에 국민생각을 떠났다. 일각에선 박 교수와 장 대표가 공동대표와 1인 대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장 대표는 서울대학교 다닐 때부터 알았다. 서로 아주 좋아하고 신뢰하는 사이다. 그 친구는 진보로 갔고 나는 미국으로 가서 더 공부를 했다. 나는 사민주의같은 진보 이념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종북은 용납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진보적이었으나 종북은 아니다. 그래서 같이했다. 
 
‘공동 대표’냐, ‘1인 대표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당을 만들고 두 사람이 대표로 있다 보니까 의사결정 과정 등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1인 체제로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장 대표에게 일정 기간씩 돌아가면서 하자고 제안했다. 
 
장 대표는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권력 투쟁의 경험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아마 장 대표가 양보하는 게 힘들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리의 신뢰 관계엔 문제 없다. 당 운영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나라 정치에 좋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을 돕는 것이 내 목표지, 내가 어떤 자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박 교수는 국민생각 패배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표했다.
 
“그때 여러 선배와 후배들이 나에게 정치 개혁에 대하여 말만 하지 말고 몸을 던지라고 했다. 그때 기존 여야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깊었다.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에서도 여야가 워낙 인기가 없으니까 딱히 내세울 후보도 없었다. 안철수 의원이 등장해서 박원순 시장에게 양보해 시민운동가가 당선됐다. 기존 여야는 인기가 없었다.
 
당시 여당 안에서도 친박과 친이 간 갈등이 심해 분열의 기운이 있었다. ‘선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이 많이 나왔다. 바른 우파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진보, 보수를 통틀어서 국가 비전과 국가 정책을 소중히 하는 합리적인 사람들을 모으는 게 어떻겠냐는 주장이 나왔다.”
 
박 교수는 2012년 총선에서 여당이 이긴 결정적 계기를 설명했다.
 
“한동안 국민생각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져 갔다. 그러나 분위기가 반전된 게 김정일이 죽으면서다. 사람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민주당에선 한명숙 전 의원이 등장했다. 한 전 의원이 대표를 하면서 통진당과 연대하고, 제주도 해군기지 반대하고, 한미FTA 재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새로운 보수 개혁적 보수를 지지해보려는 여론이 생기려 했다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에서 국민생각으로 오려고 했던 친구들도 등을 돌렸다. 오히려 민주당에서 우리당에 오겠다는 친구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제3정당을 만들어 우리나라 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보려 생각했지만 결과는 대패였다. 
 
우리나라 정치가 발전하기 위해선 기존 정당이 자기 개혁을 하든지, 제3정당이 개혁을 하도록 압박하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두 가지 다 어렵다고 본다. 당내 개혁은 기득권에 안주하다 보니까 되지 않고, 제3정당은 우리나라 정치 풍토상 성공하기 쉽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는 가장 낙후돼 있는 답답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박 교수는 제 3정당이 만들어진다면 반드시 깃발이 선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누군가 창당한다면 반드시 깃발이 선명해야 한다. 왜 3당을 해야 하는지 확실해야 한다. 대의를 확실히 해야 한다. 일시적 인기 몰이나 단순한 선거 전략의 일환이면 안 된다.”
 
야권의 신당과 창당에 대해 박 교수에게 물었다. 박 교수는  현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왜 그러냐고 묻자 “사실 요즘 등산하면서 책을 읽고, 집필하고 있다. 구체적인 정치권 상황을 전혀 몰라 코멘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교수에게 현 정치권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묻자 “공자께서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지금 정치권 밖에 있다. 더구나 잘 알지도 못한다”고 답했다.
 
▲ 박세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2006년 민간 싱크탱크, 한반도선진재단을 만들었다 ⓒ 시사오늘
박세일의 재기, 한선재단
 
한반도선진화재단(한선재단)은 지난 2006년 만들어진 단체다. 박 교수가 주축이 됐다. 한선재단은 대한민국의 선진화와 한반도 통일을 위한 국가 전략과 국가 정책 과제를 연구하는 단체다. 학계가 중심이고 전 현직 관료 정치인, 그리고 기업인들도 참여하고 있다. 박 교수에게 한선재단이 만들어진 계기를 물었다.
 
“2005년 행정수도 이전이 결정된 이후 국회를 떠나 우리 사회를 돌아봤다. 당시 수십 개의 역사청산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과거 역사를 가지고 하는 정치 싸움만이 만연했다. 역사 싸움이 동학농민혁명 때까지 올라가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고를 따지고 있었다. 국가 미래와 비전에 대한 담론은 전혀  없었다.

'이러다가 선진국 못되겠구나'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 것인가'생각했다. 그 기본 철학과 정책 방향을 담은 < 대한민국 선진화전략>이라는 책을 썼다. 기대 이상의 관심을 모았다. 자신감을 얻고 2006년 200여 명의 학자들과 함께 민간 싱크탱크를 만들어 '이제는 선진화 혁명의 시대'라고 선언하고 각 정책 분야의 선진화 전략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다.”
 
박 교수에겐 ‘통일 전도사’라는 별명이 붙는다. 우리나라가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선 통일이 필수라고 주장한다. 
 
“선진통일이란 한반도 전체, 즉 남과 북을 선진화하는 통일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다. 여기서 1등 국가가 되기 위해선 선진화와 통일을 즉 선진통일을 이뤄야 한다. 
 
분단이 지속되면 북한은 중국화된다. 중국의 변방 속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남과 북이 대립이 격화됨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에선 미·일을 축으로 하는 ‘시장자본주의’ 세력과, 중·러를 축으로 하는 ‘국가자본주의’ 세력 간 패권 쟁탈전이 일어날 것이다. 한마디로 제2의 냉전 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3류 분단 국가로 추락하고 동아시아의 미래는 전쟁 시대가 된다. 그래서 통일은 한민족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가 달려있는 문제다.”
 
박 교수는 우리가 통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 세 가지를 언급했다. △통일 의지와 열정 △북한 동포의 마음잡기 △통일 외교다. 우리가 스스로 통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1순위라고 밝혔다. 북한 정권 마음 얻는 것보다 북한 동포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북한 동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2만 8천의 탈북 동포들과 적극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은 통일외교다. 이웃 나라들에게  ‘통일하겠다’고 밝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통일이 당신 나라에게 좋은 것이다’라고 설득해야 한다. 박 교수가 통일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통일외교였다.
 
“2008년, 스탠퍼드로 안식년을 갔다. 그때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이제 냉전이 끝났는데 중국과 잘 지내 동아시아 미래를 G-2가 공동 관리하면 된다. 굳이 한반도 문제에 끼어들어 미국이 고생할 필요가 없다. 북한 문제와 북핵 문제를 모두 중국에 넘기고 미국은 떠나자’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때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북한의 중국화와 분단의 고착화는 중국에게도 큰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랬더니 그들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한민국과 국민은 통일을 원하느냐?’고.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랐다. 밖에선 우리가 통일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2009년부터 국제회의를 조직하면서 ‘우리는 통일하겠다. 우리 통일이 당신들 나라에게도 좋은 것’ 이라고 주장하며 뛰었다. 지난 6년 간 건강을 조금 해할 정도로 전국 강연도 다녔다. 그리고 2013년에는 구체적인 선진통일 철학과 전략을 담은 <선진통일전략>을 출판했다.”
 
▲ 박세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중간에 여의도연구원장직을 사퇴하면 김무성 대표와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담을 줬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 시사오늘
최초의 여의도연구원장
 
박 교수는 2005년 행정도시 이전과 2012년 국민생각을 창당하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여의도연구원장직에 임명하려 했으나 친박계의 반발로 무산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수도 분할 반대로 의원직 사퇴한 것은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반발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국회 전체의 잘못된 정책 결정에 대한 반대였다. 수도 분할은 너무 잘못된 것인데 국회에서 통과됐다고 해도 누군가 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우리나라 헌정사가 후세에도 할 이야기가 있지 않겠는가? 떠날 때 ‘당원 동지에 드리는 글’을 썼다. 내가 나가더라도 한나라당 의원들이 잘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그 글에 담았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반발은 아니다. 서로 주장하는 정책은 다를 수 있다. 국민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보자는 마음으로 창당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총선 때는 따로 가도 대선 때는 힘을 합칠 생각이었다.”
 
지난 대선 당시 박 교수는 박 대통령을 공개 지지했다. 
 
 “본래 대선에는 조금도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한반도선진화재단에서 전문가들을 불러서 대통령 후보 세 사람에 대한 대북 정책을 분석했다. 듣다 참 놀랐다. 문재인 대표의 대북 정책은 북한의 대남 정책과 거의 같았다.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하는지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기본적으로 북한의 대남 적화 노선과 그 방향을 같이했다. 안철수 의원 것을 보니까 반쯤 똑같았다. 예를 들어 평화협정 체제를 주장하면서  ‘평화협정 체제가 안 돼 있어서 북한이 핵을 만드는 것’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평화협정은 북한이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주장해온 것이다. 휴전협정도 안 지키는 친구들과 평화협정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평화협정 주장은 본래가 대남적화 전략이고 주한미군 철수 전략이다. 월남도 평화협정 체결하고 2년 만에 망했다. 그런데 이것을 문재인 대표 측에서 주장하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측의 국가 안보 정책을 봤는데 무난했다.  그래서 큰일 났구나 하고 내가 자청해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 대표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  이번에는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선언했다. 
 
그 후에 박 대통령으로부터 ‘고맙다’는 전화가 왔다. 내가 ‘나한테 고마워하는 것보다 반드시 선거에 이겨서 훌륭한 대통령이 돼달라’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이 나한테 개인적으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히 모른다. 그러나 특별히 부정적인 것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크게 보면 오히려 긍정적이지 않을까?  밑에 있는 친박계 의원들이 반대했다면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용을 잘 모르고 솔직히 이해도 되지 않는다. 2005년에도 박 대통령에게 잘 하시라고 하고 떠났다.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감정은 없다. 지금도 잘하시길 바랄 뿐이다.”
 
박 교수에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왜 여의도연구원장으로 내정했는지 물었다.
 
“처음에 나와 만난 자리에서 김 대표가 ‘보수 정권이 재창출하려면 보수의 새 이념을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누리당도 새 비전을 제시해야 하고 무엇보다 보수의 스펙트럼을 크게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혁적이면서 중도적인 보수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얘기했다. 나에게 ‘평상시에 언젠가 같이 일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면서‘여의도연구원장이 돼서 국가 미래 비전과 당의 미래비전을 만들지 않겠느냐. 와 주셨으면 좋겠다’ 고 제안했다.”
 
여의도연구원은 최초로 어떤 사람들이 만들었을까?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박 교수다. 그는 문민정부 당시 청와대에 있을 때 ‘앞으로 정당도 정책연구소가 필요하다. 정책 중심의 정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만들었다.
 
“내가 참여해 만든 연구원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4년에는 잠깐 직접 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또 10년 후에 맡아 달라고 하니까 이게 좀 우습기도 했다.
 
김 대표가 보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자고 말했다. 보수와 중도를 묶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내가 들어도 옳은 얘기다. 동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정권을 재창출하려면 크게 묶고 다시 국가 비전과 당의 미래를 세워야 한다. 시간을 달라고 하고 주변 사람과 상의를 해봤다. 2주 후에 그럼 같이 해보자고 말했다. 그래서 그날 이사회에는 통과했는데 그 다음 주 최고위원회의에서 걸렸다. 일부 반대가 있었던 것 같다. 김 대표가 ‘좀 기다려 달라’고 말해 침묵을 유지했다.
 
솔직히 나는 연구원 책임을 안 맡으면 개인적으로는 참 편하고 좋다. 그래서 도중에 언론에서 시끄러울 때 ‘하지 않겠다’ 고 말할까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면 김 대표 입장이 곤란해지고, 또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에 친박이 반대해서 내가 안 하기로 했다면 그것이 박 대통령에게 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언론의 요구가 많았지만 절대 침묵을 지켰다. 
 
시간이 흘러도 합의가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김 대표도 힘들어 보였다. 선거도 가까워지는데 여의도연구원의 장을 너무 오랫동안 비우는 것도 당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정하시라’ 고  말했다.”
 
김 대표가 미안해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박 교수는 “물론 안타까워했다”고 답했다.
 
▲ 박세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통종교적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 교수에게 새누리당 복귀 계획은 없느냐고 물었다. 박 교수는 소리 내 웃으며 “생각해보지”라고 답했다.
 
“새누리당에겐 애증이 있다. 좋아하는 마음도 있고 싫어하는 마음도 있다. 기득권만 지키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점은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은 새정치연합이 정권 잡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치보다도 외교, 국방, 안보가 심각한 문제다. 국내 정치는 어느 정도 진보적이라도 좋다. 과도하면 내부에서 체크할 수 있는 사회적 힘들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친노동자로 가면 친기업인 세력도 있고, 너무 친기업 쪽으로 가면 친노동자도 있다. 그래서 내치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어느 정도 정책 견제와 조정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통일, 외교, 국방 정책은 우리가 잘못하면 우릴 위해서 도와줄 나라가 없다. 우리의 잘못을 이용하면서 다른 나라들이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외교와 내치의 큰 차이이다.
 
나는 아직 일부 종북 좌파적 생각과 친노들이 장악하고 있는 새정치연합은 대외 정책 분야에서 안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새누리당이 정권 잡기를 바란다.
 
그러나 국민 입장에서 보면 보수가 잡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반드시 ‘성공하는 보수’가 돼야 한다. 개혁과 변화에 앞장서는 보수가 되어야 한다.  안보를 핑계로 정권을 잡기만 해놓고 국내 정치 개혁이나 경제 사회 개혁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국가 비전을 세우고 민생을 챙기고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푸는, 그래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유능하고 유덕한 보수가 나와야 한다.

두 번의 보수 정권에 대해 국민들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적지 않게 실망을 준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선진통일과 국가 개조에 더 철저히 준비된 개혁 보수, 비전 보수, 그리고 국민의 민생을 제대로 챙기는 정책 보수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도 또 표 달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정작 박 교수는 자신이 대권주자에 자신이 오르내리는 것에 대해선 손사래를 쳤다. 
 
“나는 전체가 잘되는 것을 기본으로 살아왔다. 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라의 지도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돼도 안 된다. 대덕(大德)·대지(大智)·대용(大勇)이 있어야 한다. 나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동안 나는 21세기 초세계화, 초정보화 시대에 우리나라의 올바른 국가 비전과 국가 전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연구를 집중해 왔다. 앞으로도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에 대해 어떠한 비전과 꿈을 제시하면서 선진통일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 국내적으로는 어떠한 국가 전략과 정책 구상을 가지고 민생문제를 풀어 나갈 것인지, 지금도 그것을 늘 고민하고 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마지막 자신의 꿈을 언급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공부와 연구로 내공을 다진 박 교수가 대한민국을 위해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내 꿈은 선진화와 통일이다. 통일 후에는 한반도가 동아시아 중심 국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당당한 세계 국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랜 기간의 변방 국가의 시대를 살아 왔다. 이제 이 땅에 세계 국가의 역사를 활짝 여는 것을 보는 것이 내 소원이다. 
 
그리고 여력이 남는다면 유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 등 통(通)종교의 시대를 열기 위한 통종교적 사상·철학을 연구하고 싶다.  앞으로  동아시아를 유럽연합처럼 하나로 묶어,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려면 동아시아 사상이 나와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통일 한반도가 세계 국가가 되려면 동양과 서양을 포용할 수 있는 세계 보편 사상을 제시해야 한다. 
 
인구의 1/3이 유교와 불교고, 1/3이 기독교와 카톨릭이고, 이들이 모두 평화롭게 잘 사는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특별한 나라다. 여기서 앞으로 홍익인간의 세계 보편 사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언젠가 그러한 사상 운동에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난 수년 간 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면서 공동체자유주의연구소라는 작은 연구실을 하나 운영하고 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새누리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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