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다 내 불찰, 그래도 난 기득권 세력의 파이터"
김현철, "다 내 불찰, 그래도 난 기득권 세력의 파이터"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5.10.19 09:1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현철 국민대 교수 "개혁공천, 정권재창출 위한 개혁주도세력 확장" "아버지가 정치입문 막았다? 상도동-동교동 차이" "무소속 출마 '글쎄', 정치는 정당활동 전제돼야" "'중도개혁세력' 통해 개혁 정치 계속하고 싶다"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에서 YS 따라올 정치인 없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지난 13일 오후 1시 20분 서울 장충동 시내에 위치한 한 카페,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두리번거리며 <시사오늘>을 찾았다. 이번에도 역시 약속 시간보다 10분 빨랐다.

기자는 수차례 인터뷰와 개인적인 자리에서 김 교수를 만나 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약속을 거르거나 늦춘 일이 없었다. 항상 정해진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마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다는 부친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피가 그의 몸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건 상도동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상도동에는 김 교수에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1996년 15대 총선 당시 그가 개혁공천을 주도하면서 상도동 핵심인사들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권에는 김 교수가 국정을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통령'이라는 불편한 별명이 붙여진 것도 이때였다.

김 교수는 사실 이번 인터뷰를 몇 차례 거절했다. 그간 많은 매체를 통해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오해가 해소되기는커녕 부풀려지기 일쑤였다는 이유에서다. 기자는 김 교수에게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설득했다. 김 교수가 명예를 회복해 정치 전면에 당당히 서야만 진정한 YS 재평가가 이뤄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고민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사오늘> 170호 커버스토리 '김현철을 위한 변명'은 그렇게 시작됐다.

▲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 ⓒ 시사오늘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요즘엔 강의 준비로 바쁘다. 국민대 정치대학원에서 '한국 정치와 권력'이라는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나도 많이 배운다. 주말에는 평창동에 있는 예능교회에 나간다. 벌써 20년째 출석하는 교회인데 8년 전부터는 주차 봉사도 하고 있다. 내가 한 주라도 빠지면 교인들께서 '무슨 일 있느냐'며 바로 연락한다. 참 친근한 교회다."

-얼굴도 예전보다 좋아진 것 같다.

"(웃으면서) 요즘 산에 다닌다. 주변 지인들, 그리고 일반인분들과 같이 ‘일맥산악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한 달에 한 번씩 근교에 있는 산에 올라간다. 산을 타서 얼굴이 좋아졌다기보다는 좋은 사람들과 친목 활동을 하다 보니 그런 모양이다."

-오늘은 다소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내 문제와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은지 꽤 됐다. 아무리 해명을 해도 메아리가 없었다. 사실관계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 걸 다 떠나 보내고 명예를 회복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과거의 일들이 내게 '낙인'으로 다가왔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정치적인 행보를 할 때면 항상 옛날 이야기가 먼저 나오더라. (쓴웃음을 지으며) 다 내 불찰이고, 내가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혁명보다 어려웠던 개혁공천

김 교수는 문민정부 당시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오해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입을 뗐다. 그는 개혁은 문민정부의 숙명이었고, 개혁공천은 개혁주도세력들을 확장시켜 나가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국정에 과도하게 개입했다는 말이 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 결국 호랑이를 때려잡았지만, 사냥꾼의 수는 적었고 사냥술은 미숙했다. 이를 보충하고 강화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했다. 그래서 임기 초반 아버지를 도와 그야말로 혁명보다 더 어려운 개혁들을 추진했다. 그게 문민정부의 성공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다 보니 나에 대한 공격이 거세졌고, 기득권 세력에서는 이를 국정개입으로 몰아붙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방법론에 있어서 미숙한 면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해 반성하고 있고, 새로운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성찰하고 있다."

-혁명보다 더 어려운 개혁이라면 무얼 의미하나.

"개혁을 말하면 정권이 망하지만,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일념이었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개혁 작업이었다. 궁극적인 개혁 목표는 '인적개혁', '제도개혁'. 그리고 '의식개혁' 이렇게 세 가지였다. '공직자재산공개'로 기득권을 어느 정도 척결했다. '금융실명제' 역시 금융 부문을 투명하게 해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자는 명분이 있었다. '하나회 청산'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인적개혁과 제도개혁은 이 같은 방식으로 추진할 수 있었지만, 의식개혁은 사회 전반에 걸친 기득권 세력과 이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을 바꾸는 작업이기에 문민정부 임기 내에 완료하기 힘들었다. 나는 정권재창출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려 했던 변화와 개혁을 지속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개혁주도세력의 확장을 꾀했다."

-개혁주도세력의 확장이라면 공천을 말하는 건가.

"정권재창출을 위해서는 개혁주도세력을 확보하고 양성하는 작업이 절실했다. 당시 우리들은 국민들이 문민정부의 개혁을 지지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선택을 좀 달리하더라. 1995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것이다. 이대로는 정권재창출이 요원했다. 나는 1996년 총선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대선도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혁신적인 공천 방향이 나와야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나는 15대 총선에서 공천개혁을 주도했다."

-공천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제도권 내부뿐만 아니라 제도권 밖에서 보더라도 파격적인 인물, 참신한 인물들을 내세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여당 내 기득권 인사들이 반발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공천 작업을 1년 가까이 준비했고, 합리적인 선출 방식을 적용했기 때문에 그들도 조직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허주 김윤환' 등 당시 민정계 핵심 멤버들과도 많은 대화를 했었다. 일방적인 기획 공천은 결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현 정치권에서도 15대 총선 공천을 성공적인 공천이라고 평가하지 않는가. 소통과 공감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같은 민주계 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꽤 있지 않았나.

"내 큰 그림은 정권재창출이었다. 이에 동참하려는 사람들을 구했던 것뿐이었다. 민주계를 배제하고 추진한 공천도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분들은 그걸 본인들 중심으로 끌고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대선이 그 다음 해 있었기 때문 아닌가. 민주계 핵심 최형우, 김덕룡 등을 지지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 같다.

"그분들과 나눠서 생각할 필요 없다. 야당과 여당 내 기득권 세력, 그리고 비판적인 여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기득권 세력들을 개혁 대상으로 삼는 것은 보통 지난한 일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개혁적 의식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 그게 바로 민주계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눠서 생각하면 안 되는 거다. 그분들과 나는 어떻든 한목소리로 아버지가 주도하는 변화와 개혁에 앞장섰다."

-그럼에도 '김현철이 공천권을 마구 휘둘렀다'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 뭐라고 생각하나.

"(웃으면서) 한 지역구에서 10명의 후보가 나온다고 해도 결국 선출되는 사람은 1명 아닌가. 나머지 9명은 얼마나 많은 실망을 했겠는가. '누가 공천을 했느냐'는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내가 그 표적이 됐다. 실제로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결국 1997년 대선에서 정권재창출은 이루지 못했다.

"제일 아쉽고 안타깝다. 문민정부가 시작한 개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중도개혁세력' 하의 정권을 재창출하는 게 목표였다. 기득권 세력을 청산함으로써 민주화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경제민주화 역시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것이었다. 지금 현 시점에서 보면 결국 민주화는 후퇴했고, 개혁 역시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변질된 느낌이다. 우리가 정권재창출을 반드시 이뤘어야 했다. 지금도 참 안타깝고, 답답하고,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보사태, 그리고 기상천외한 '대선잔금 조세포탈죄'

▲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 ⓒ 시사오늘

개혁 공천은 성공적이었다. 당시 김 교수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 이재오, 김문수, 손학규, 정의화 등은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권을 주름잡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총선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김 교수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비수'였다. 개혁주도세력의 세는 확장됐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극심했다. 그러던 중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고 김 교수는 기득권 세력의 타깃이 됐다. 그는 개혁주도세력 핵심 인사에서 순식간에 부패 분자로 매도당했다.

-'한보사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내 인생에서 매우 큰 불행이자, 억울한 사건이었다. 이제는 당시 상황을 성찰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당시 집권당의 민정계, 민주계 중진, 그리고 야당은 개혁이 이뤄질 경우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한보와 연결시켜야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오해의 부분이 많았다. 나는 한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보사태로 구속된 것도 아니었다. 재판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당시 대선 경선을 앞두고 김 교수가 이홍구를 지지한다는 후문이 돌았다. 한보사태는 이와 동시에 터졌다. 야당과 여론은 물론, 여당 내 반(反)개혁세력 역시 한보사태의 배후로 김 교수를 지적했다. 그는 마녀사냥 식으로 구속됐다.

대법원은 대부분의 사안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애초에 표적수사였다는 방증이었다. 검찰은 죄를 찾지 못하자 김 교수에게 '대선잔금 조세포탈'이라는 기상천외한 혐의를 씌운다.

-'대선잔금 조세포탈혐의'를 받았다.

"그야말로 희대의 촌극이었다. 어떻게든 날 잡아두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전무후무한 법 적용이다. 아직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직접 대선자금을 모은 것도 아니었고, 난 단지 잔금 관리자에 불과했다. 대선잔금에 대한 이자소득을 안 냈다고 조세포탈죄를 씌우는 게 말이 되느냐. 법리해석을 잘못한 것이다."

-검찰이 억지 혐의를 씌운 배경에 YS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건…(잠시 말을 멈추다가), 아버지께서 회고록에도 쓰셨지만 죄를 만들어서라도 구속시키라고 김기수 당시 검찰총장에게 지시한 게 사실이다. 아마 아버지가 직접 지시했다기보다는 주변 참모들이 권유했을 거다. 대선 정국을 눈앞에 둔 시점에 터진 사안이었으니 당장 진흙탕 위기를 넘겨야 할 텐데, 사회적 여론이 워낙 안 좋았기 때문에 나를 구속시킬 수밖에 없었던 거다.

더욱이 내가 개혁공천으로 총선 승리 견인차 역할을 했기 때문에 야당은 물론 여당 내 기득권 세력에게도 난 걸림돌이었다. '김현철'을 제거해야 한다는 여러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음지(陰地)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여론이 더 좋지 않았다.

"공개적인 활동을 안 한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다. YS의 아들이니까. 어쩌면 가장 가까운 민주계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전면에 나서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꼈으리라고 본다. 더욱이 대권 자리매김을 스스로 하던 쪽이 있지 않았는가. 그쪽에서는 내가 거기에 반대하고 다른 쪽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위기의식을 느낀 것 같다."

-그럼에도 대통령 친인척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론에서는 '김현철'을 거론한다.

"새로운 중도개혁세력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민주계의 싹을 자르려다 보니 사회적으로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희생양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여기에 IMF사태까지 가미되면서 사회적 낙인이 강하게 찍힌 것 같다. 이게 나를 거론하는 배경인 듯하다. 나도 너무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이제 와서 뭐 어쩌겠는가.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내 진심을 알아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리라고 본다."

정계입문 도전기, 그리고 YS

▲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 ⓒ 시사오늘

김 교수는 양지(陽地)로의 진입을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고개를 떨구어야 했다. 번번이 그를 가로막은 존재는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정치권 전면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정치입문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나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내가 총선에 출마하고, 정치를 같이하려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시도는 여러 번 해본 것으로 아는데 그때마다 포기한 이유가 무엇인가.

"말하지 않는 게 낫겠다."

-안타까워서 묻는 거다.

"(잠시 망설이다) 1988년 13대 총선 때 처음 기회가 왔다. 아버지께서 부산 사하구로 출마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먼저 제안하더라. 그런데 하필 거기 서석재 의원이 계셨다. 더욱이 나는 29살에 불과했다. 선뜻 출마를 결심할 수 없더라. 아버지가 공천권을 거의 200% 행사하실 때였으니, 만약 아버지가 좀 더 적극적으로 얘기했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일이 잘 안 풀리더라. 3당통합 때는 민정계·민주계·공화계가 한데 다 모였으니 수요가 너무 많이 늘었다. 또 아버지께서 대선에 출마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내가 출마를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대통령 되신 다음에는 제가 정계에 꼭 입문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일종의 약속이었다."

김 교수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경남 거제 출마를 추진했다. 당시 신한국당은 경남 거제 지역구를 가졌던 김봉조를 경남지사로 보내고, 김 교수를 그 자리에 앉히는 전략을 짰다. 하지만 이는 김봉조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 배경에도 역시 YS가 있었다.

-15대 총선에서 경남 거제 출마를 추진했었다.

"나는 나가야겠다고 했다. 그런데 언론에서 대통령 아들이 국회의원 출마한다고 반대 목소리가 나오더라.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이 누구겠느냐. 야당은 이미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이 나왔으니까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내부의 반대가 심했다. 내가 정치적으로 워낙 개혁적인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던 사람들이 있었다.

솔직히 아버지가 나섰으면 안 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분명했다. 아버지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다. 나의 출마에 대해 부정적인 기류가 돌자, 아버지는 내게 나가지 말라고 했다."

YS는 그 이후에도 김 교수의 정계입문을 지지하지 않았다. 되레 YS는 "나는 현철이가 정치를 안 했으면 좋겠다"며 반대하기도 했다.

-YS가 중요한 순간마다 출마를 막아선 것 같다.

"(소리 내 웃으면서) 그렇다. 꼭 결정적인 순간마다 관철을 안 시켜주더라. 사실 그건 상도동과 동교동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DJ는 아들의 정치입문을 위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기존 사람을 뽑아내고 자기 아들을 꽂지 않았는가. 상도동은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다. 너무 민주적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뭐…. 결국 내 탓이다. 반대 세력들에게 파워게임에서 밀렸다."

19대 총선에서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김 교수를 밀어냈다. 경선에 참여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무소속으로 도전할 생각은 없었나.

"일반적으로는 무소속이라도 도전해서 낙선도 해 보고 경험을 쌓아서 계속 나오다 보면 나아지지 않겠느냐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다르다. 나에 대한 정치적인 편견과 외부적 환경, 그리고 내부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문제들을 다 조율해야지 무턱대고 무소속 출마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정당활동을 통해 정치에 입문하려 했다. 정치라는 건 정당활동이 전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소속 출마는 원치도 않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정계에 입문하게 되면 같이 정치 활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 나를 부담스러워하거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때문에 과거의 문제들을 빌미로 해서 나를 '보이콧'하는 게 아닌가 싶다."

-김 교수를 통해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당권을 쥐고서도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섭섭하지 않나.

"(웃으면서) 그런 건 없다. 어차피 개혁공천을 추진한 이유가 내 세계를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시작한 작업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중도개혁세력의 필요성

김현철 교수는 20대 총선 출마에 대해 아직 관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문민정부 이후 후퇴한 개혁작업을 원상복귀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20대 총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나.

"과거보다 지금이 더 내가 정치를 하려고 했던 목표가 뚜렷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문민정부 이후 정치가 너무나 후퇴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측면에서도 후퇴했고, 개혁적으로도 후퇴했다. 역사교과서 문제만 봐도 그렇다. 모든 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약 정계 입문을 하게 된다면 적어도 20년 전 문민정부가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 그리고 소중한 개혁들을 원상복귀뿐만 아니라 다시 발전시키고 싶다. '중도개혁세력'을 통해 개혁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치를 나는 하고 싶다.

지금은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관망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언제까지 관망할 수만은 없겠지만."

-'중도개혁'의 개념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야권의 신당 세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분들도 새로운 세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는 있지만, 거기에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구심점이 있는지 의문이다. 새로운 개혁주체세력이라고 포장한다고 해도 쉽지 않으리라고 본다. 뚜렷한 성격도, 노선도, 그리고 주도세력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얘기하는 '중도개혁세력'은 과거 문민정부에서 개혁을 주도했던 세력과 흡사하다. 그때 당시 개혁세력은 무조건적인 보수, 무조건적인 진보가 아니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때문에 영남 기반이긴 했어도 전국적인 지지를 골고루 가져올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중도개혁세력'이었다. 현재 현역 의원들 중에서도 그런 개혁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다만, 그걸 견인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한데 지금은 좀 안타깝고 답답하다."

-그런 점 때문에 김 교수를 '회색 인간'이라고 보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구체적 현실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 개혁을 추구하는 실사구시의 정치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중도개혁의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는 내 생각이 회색으로 보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허나, 묻고 싶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현실정치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현철의 정국 진단

▲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 ⓒ 시사오늘

-여권보다는 야권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지도 않다. 나는 야당 역시 여당처럼 기득권을 좇는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민주화의 혜택을 받은 10%의 소수층을 대변하고 있다. 90%의 국민을 대변하지 못하고 기득권화돼 있는 거다. 90% 속에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데 결국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기득권층에 매몰돼 있다. 그래서 지금 야권에 표 확장 능력이 없는 것이다. 90%의 국민을 대변하는 혁신이 시급하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주최한 야당 60년사 기념식에도 불참했다.

"3당합당은 야합이라는 전제를 깔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우리 쪽에서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하는데, 설사 그렇게 보진 않더라도 YS가 호랑이굴 가서 호랑이를 때려잡은 게 사실이고, 민주화 발전시키고 개혁정치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따지면 DJ는 JP(김종필 전 총리)와 손잡고 DJP연합으로 정권 잡은 게 아닌가. 3당합당은 야합이고, DJP는 야합이 아닌가. 문민정부가 있기에 국민의 정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일부 언론에서 YS가 야당 60년사 기념식에 대리인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그건 아마 새정치연합 쪽에서 나온 얘기 같은데, 내가 아는 한 전혀 없다. 누구를 얘기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야당 입장에서는 나와 동지적인 차원에서 내년 총선, 그리고 대선까지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YS 적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행보는 어떻게 보고 있나.

"사실 김무성 대표는 오랫동안 상도동에서 한솥밥을 먹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평가하기 좀 그렇다. 그저 잘 해주길 바랄 뿐이다. 다만, 요즘 모습을 보면 앞으로 갈 길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같은 행보로는 힘들다고 본다. 앞으로 총선과 대선 정국이 전개될 텐데 대표로서 어떻게 헤쳐 나갈지…. 여야를 막론하고 리더십 실종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김 대표가 좀 더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천룰을 놓고 김 대표가 당·청 사이에 낀 듯하다.

"YS 문하생이라고 하지만 김 대표는 아버지처럼 베이스가 강한 분은 아니다. 본인은 어쩔 수 없이 현재권력과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본인 입지를 구축하려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를 좀 내어주더라도 일단 '궁극적인 목표'만 도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 내가 생각하는 YS 적자 행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박근혜 정권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평가해 달라.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반개혁적', '반민주적', 그리고 '기득권층 이익 대변'이다. 경제민주화를 과감하게 실천하고 국민통합을 선제적으로 실천해야 할 텐데, 요원해 보인다."

YS 따라올 자, 대한민국 정치사에 없다

▲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 ⓒ 시사오늘

김 교수는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버지, 정치인 YS를 꼽았다.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일구어낸 부분만큼은 어느 누구도 YS를 따라올 자가 없다고 말했다.

-YS 재평가 바람이 일고 있다.

"바람직한 움직임이다. 안타깝지만 불행히도 문민정부의 수많은 개혁작업들이 IMF라는 엄청난 사태로 묻히고 말았다. 어느 정권보다도 과감히 개혁에 나섰다고 생각한다. 잘한 점과 못한 점이 객관적으로 평가돼 지속적인 개혁의 완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발전의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다. 상도동에서도 김영삼민주센터가 학계와 함께 YS 재평가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YS 차남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YS의 아들이라는 건 평생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워낙 큰 정치를 해 오신 분이니까 당연하다. 차후에 내가 만약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면 내 나름대로의 평가를 받아야 될 거다. YS 차남이라 불리기보다는 '정치인 김현철'이라고 불리고 싶은 건 사실이다. 김현철만의 정치를 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아직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곧 새로운 수식어가 붙지 않을까 싶다."

-정치인으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민주정부가 시작된 지 20여 년이 다 됐는데도 우리나라는 과거 시스템에 머물러 있다. 세월호 참사는 그 방증이었다. 사회구성원리, 생산시스템, 그리고 정치체계 및 국민의식 등이 모두 그대로다. 심지어 민주화 20년이 실패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문민정부의 개혁정신을 이어받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정치를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해 매진하겠다."

-마지막으로 존경하는 정치인을 하나 꼽아 달라.

"아버지, 정치인 YS다. 아버지라서가 아니다. 정치인 YS에 대한 평가가 IMF사태로 인해 무척 왜곡돼 있다. 재평가 받으리라 난 확신한다. 오랜 야당 생활을 하면서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고, 문민정부에서도 민주주의를 공고히, 확고히 하는데 확실한 역할을 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만큼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그런 부분까지 폄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가장 훌륭한 정치인이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 및 재계를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그렇군 2015-10-27 18:59:23
그동안 김현철에 대한 이미지가 안좋았었는데 진심어린 인터뷰를 보고 나니 모든 것이 오해였다는 것을 알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