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8 수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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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 “MB정권 過, 내가 짊어지는 건 숙명”
이재오 국회의원
“MB 대선캠프 들어가기 전 개헌, 4대강, 행정구역 재편 약속 받아내”
“시간 지나면 MB정권에 대한 재평가 있을 것…때를 기다리는 게 정치”
“박근혜 대표와 선공후사 자세로 당 이끌었을 때가 가장 재미있던 시절”
“개헌, 지금 대선주자들도 현행 헌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 알고 있을 것”
2015년 11월 13일 (금) 정진호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대한민국 헌법 제46조.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

그러나 이 조항을 지키는 국회의원은 드물다. 공천권을 쥔 실력자의 눈에 들기 위해 소신을 버리고, 권력자의 입과 손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국회의 풍경이다.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는 헌법 조항은 공허하고, 헌법기관의 존엄성은 빛을 잃은 지 오래다.

1945년생으로 어느덧 칠순을 넘겼지만, 여전히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에게 ‘신선함’을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당 속의 야당’이라는 별명처럼, 할 말은 하는 여당 내 국회의원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그가 “권력자들은 자기가 밀고 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줄 착각하기 쉽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정부여당을 강하게 비판한 것도 이 같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행보였다.

이런 이재오 의원의 정치 스토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의원은 인터뷰 제의를 한사코 거절했다. 아직은 ‘조용히 있어야 할 시기’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시사오늘>이 지역구 유권자인 소속 기자를 앞세워 거듭 요청했고, 11월 5일 이 의원의 작은 지역구 사무실 문은 열렸다.

   
▲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던 이재오 의원은 지역구 주민인 <시사오늘> 소속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 시사오늘

 "1965년 한일협정은 굴욕적이었다"

이 의원의 정치 인생은 1965년 한일협정 반대로부터 시작된다. 경제 개발을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해 일본과 비밀 회담을 갖고 합의를 이끌어냈다. 1965년 2월 20일에는 비밀 회담에서 교환한 메모를 근거로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 그러나 주요 의제였던 대일청구권문제·어업문제·문화재반환문제 등에서 우리 측이 지나치게 양보하는 등 한일협정 추진 과정과 합의 내용이 굴욕적이었음이 밝혀졌고, 이로 인해 거센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이때 대학생이던 이 의원은 반대 투쟁을 이끌다가 강제 입대를 당한다. 이른바 ‘6·3 사태’로 인생이 바뀌게 된 것이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참여한 배경이 궁금하다. 협정 내용에 그렇게 문제가 많았나.

“한마디로 한일협정에서 모든 것이 일괄타결 된거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모든 걸 반대했던 거다. 회담이 굴욕적이었으니까.”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한일협정 할 때 일본에 의해서 피해를 당한 모든 사안은 이걸로 모두 마무리한다, 국가가 배상받는 걸로 한다, 개인과 단체에 대한 손해배상은 없다는 내용이 한일회담에 들어가 있었다. 위안부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포함된 거다. 그런데 그때는 군사정부니까 위안부 문제 등을 쟁점으로 내세우기 어려웠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강제 입대했던 이 의원은 제대 후 복교를 하지 못했다. 당시 정부는 이미 3선 개헌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고, 한일협정에 반대했던 학생들을 복교시키면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다.

-민주화 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64년, 65년 데모하다가 군대에 끌려갔다. 68년에 제대해야 맞는 건데, 그해에 김신조가 넘어왔다. 김신조가 넘어오니까 복무 기간이 졸지에 30개월에서 36개월로 늘어났다. 68년 10월에 제대해야 하는데 69년 4월에 제대했다. 제대하고 중앙대 복교 신청을 하니까 학교에서 ‘3선 개헌을 해야 하므로 한일협정 반대 데모를 주도한 사람들은 복교시키지 말라는 지침이 위에서 내려왔다’는 거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을 복교 안 시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권력 연장을 위해서 개인의 꿈을 묵살해버린 거다. 그래서 먼저 군사정권부터 무너뜨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민주화운동을 하게 된 계기다. 만약 복교했다면 오늘날 이재오는 없었을 거다. 꿈이 학교 교사였으니까 원래.”

이때부터 이 의원의 삶은 투옥 및 수배의 연속이었다. 이 같은 고난의 시절은 1987년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고 형식적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끝나는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비록 직선제로 들어선 노태우 정권이지만 그 본질이 군사 정권이었던지 이 의원은 감옥에 또 들어간다. 다섯 번째 투옥이었다. 이 의원은 ‘재오’라는 자신의 이름대로 다섯 번 감옥 생활을 하게 된 것이고 더 이상 감옥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노태우 정권은 군사정권의 연장…억지로 국보법 붙여 투옥”

-1989년 노태우 정권 때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이후 투옥됐는데, 그래도 민주화된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나.

“노태우 정부는 민주화된 정부가 아니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서 비로소 민주화가 된 거지. 임기 5년으로 87년 헌법에 의해 등장했지만 노태우 정부 자체의 성격은 군사정권의 연장이다. 노태우, 전두환이 쿠데타를 통해 등장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들은 민간 정치인들로 정치한 사람이 아니라 쿠데타를 통해 정계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 의원이 당시 감옥에 들어간 과정은 좀 황당하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에서 제1차 남북 범민족대회를 주관했다. 당시 내가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이었는데, 북한 조평통에서 남한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로 공문 보낸 걸 (남한) 적십자를 통해 전달받고, 우리도 그 공문을 총리실에 제출하고 그랬다. 이홍구 총리와 면담도 하고. 이후 정부가 남북 범민족대회 실무자 회의를 해도 좋다는 식으로 얘기를 해서 북한 실무자들과 우리 실무자들이 실무회담을 하러 판문점으로 갔던 거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임진각에서 저지당했다. 반공법에 걸린다고. 그런데 그때 잡아간 것이 아니다.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고 난 다음에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가 '문익환 목사 방북에 대해서 알지 않느냐' 해서 잡아간 건데, 사실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정보부에서 뒤집어씌워서 잡아간 거다. 그때 범민족대회 남북실무협상을 하자고 하는 것까지도 정부가 알고 있었다. 숨기고 몰래 하는 게 아니었다. 금방 얘기했지만 북한 조평통에서 우리에게 보낸 공문을 적십자를 통해 전달받았고, 그걸 통일부에 주고 공식적으로 다 한 거다. 그런 걸 반공법, 국가보안법, 적으로부터 잠입·탈출·예비음모 등등 말이 안 되게 죄를 붙였다. 그렇게 해서 다섯 번째 감옥에 갔다가 90년에 나와서 만든 게 민중당이다.” 

이 의원은 전민련이 문 목사 방북을 몰랐다고 했는데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좀 더 정확한 내용은 이렇다. 문 목사는 당시 전민련 고문이어서 방북 직전 이부영 의장을 통해 방북 의사를 전민련에 전했고, 이에 전민련은 급히 주요간부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회의에서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무산, 공안탄압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이미 문 목사는 방북을 위해 출국한 뒤였다. 1989년 당시 노태우 정권은 당초 약속과 달리 민주화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에 전민련을 비롯한 민중운동 진영은 중간평가를 통해 노태우 정권을 퇴진시키려는 ‘불신임투쟁’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바로 이때 문 목사의 방북사건이 터졌고, 예상대로 공안탄압이 시작됐다.

“민중당, 소위 주사파가 말하는 계급 정당과 무관”

-민중당은 어떤 정당이었나.

“당시 민중당은 계급 정당으로서의 민중당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소위 주사파가 말하는 계급 정당이 아니고 대중 정당으로서 서민과 소외계층 등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정당이었다. 농민, 노동자, 기타 서민 등을 위한 정당이었기 때문에 기존 정당에 비해서는 진보적 정당이 맞지만, 이념적 성향으로 분류하면 계급 정당은 아니고 국민 정당이었다. 그런데 모여 있는 사람들이 운동권 사람이니까 계급 정당처럼 보인 거다.”

당시 전민련 사무처장인 장기표는 공안정국 속에서 민중운동이 위축되는 것을 보면서 '민중의 정치 세력화'를 미룰 수 없다고 보고 '합법정당'의 건설을 전민련 상임집행위원회에서 주창한다. 장기표가 '합법정당'이란 말을 쓴 이유는 그 당시의 운동 이론이나 운동권 정서로는 정당이라고 하면 당연히 노동자 계급에 기반한 '비합법전위정당'을 의미할 뿐이어서 비합법전위정당이 아닌 합법적인 대중 정당이란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중당은 김근태 전민련 정책실장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의원을 비롯, 장기표, 이우재, 김문수 등이 함께하며 1990년 11월 10일 창당된다. 소위 ‘종북’으로부터 깨끗한 진보 정당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민중당이라는 이름 때문에 계급 정당의 느낌이 강하다.

“옛날에 윤보선 씨도 민중당을 했다. 그때의 민중당은 이상하지 않았는데 운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민중당을 하니까 이상하게 본 거다. 민중당이라는 이름은 전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명 공모를 했는데 민중당이라는 당명에 제일 많은 표가 나왔더라.”

-민중당 실패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선거에서 졌으니까 실패한 거지(웃음). 우리나라 유권자 성향을 보면, ‘우리나라에도 진보 정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20~30%는 되는데, 선거를 하면 아직 낯설기 때문에 투표하기를 꺼려 한다. 진보 정당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사람들에게 투표를 하려고 하면 망설여진다.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도 않은 데다 우리는 전국에 67명밖에 후보를 못 냈으니까 기존 정당하고는 경쟁이 안 됐던 거다. 생각으로는 진보적 성향의 정당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막상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투표를 하기에는 쉽지 않았던 거다.”

-그래도 그 당시 이 의원은 은평구에서 상당히 많은 득표를 했다.

“나는 은평구에서 표를 많이 받았다. 당선자한테 2000표 차이인가로 졌다. 대성고등학교 교사를 했고, 이 지역에서 40년 이상 살았으니까 대중적 지지가 있었다. 언론에서도 운동권의 대표 선수로 자주 다루고, 감옥도 갔다 오고 한 걸 사람들이 아니까.”

“생각이 맑아야 사물 바르게 볼 수 있어”

이 의원은 5선 의원이다. 그러나 그는 23평짜리 단독 주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광역 근처에 위치한 사무실도 들어가자마자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좁았다. 문득 무능한 ‘돈벌이’에 대해 물어봤다.

-민중당 출신들은 모두 돈벌이를 못하는 것 같다.

“정치하는 사람이 돈벌이를 하려고 정치하면 안 되지. 우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도 없고, 자기들이 돈벌이할 젊은 나이에는 다 감옥살이를 했으니까 돈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무엇보다 정치하는 사람이 돈 벌려고 정치하면 안 된다. 돈 벌고 싶으면 다른 거 해야지.”

-그래서 그런지 민중당 출신들이 유독 정치 현안에 대해선 입바른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아무래도 민중당 출신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민중당 사람들이 돈벌이에 관심이 없다. 마음속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킬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벌이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생각 자체가 맑을 수밖에 없다. 사물을 바로 볼 수 있는 거다. 마음에 때가 끼고 욕심이 끼면 사물을 삐딱하게 보는데 마음에 욕심이 없으니까 사물을 바르게 본다. 그러니까 매 사안에 대해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다.”

   
▲ 이 의원은 매 사안마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비결을 '돈벌이에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 시사오늘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이후 이 의원과 김문수, 이우재는 새누리당(당시 민자당, 신한국당)에 입당하며 전혀 다른 정치 인생을 시작한다.

-새누리당에 민중당 출신들이 다수 입당했다.

“이우재 이런 분들은 민자당 때 들어오셨고, 나는 2년 정도 늦게 신한국당 때 들어왔다. 지금 새누리당에는 민중당 출신이 나, 김문수, 이우재가 있고, 김용태도 민중당 따라다니던 사람이다. 김성식도 민중당 출신이고, 차명진도 그렇고.”

이날 이 의원이 언급한 민중당 출신들은 모두 수도권을 지역구로 한다. 영남을 기반으로 하며 수도권에서 취약한 보수정당으로서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강한 민중당 출신들이 너무나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공천을 받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그 당시 은평을 지역구에서는 민주당 사람들이 계속 당선됐기에 민주당에서는 나를 영입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나를 데려다가 고향 경북에 공천을 할 수도 없는 거고. 어차피 내가 살고 있는 데가 은평구라 여기에 공천을 줘야 하는데 민주당에는 자리가 없었던 거다. 반면 그 당시 신한국당은 은평구에서 계속 민주당에게 졌다. 세 번 내리 패배한 위원장에게 공천을 또 줄 수 없는 노릇이고. 나는 민중당으로 나와서 득표도 많이 했고 대성고등학교 교사도 했으니까 나를 영입해서 다른 데 안 보내고 은평구에 공천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나를 영입했던 거다.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도 영입 제안이 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진보 정치인이 보수 정당에 입당하는 건 어지간한 결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다.

“나는 신한국당에 들어갈 때 대한민국의 정치가 바로 서려면 보수가 바로 서야 된다고 생각했다. 보수가 수구적 보수나 고리타분한 보수가 아니고 개혁적이고 진보적 성향의 보수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수가 깨끗해야 나라가 깨끗해지는 거지, 보수가 부패하면 나라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는 보수가 다수니까. 그래서 보수를 깨끗한 보수로 만들려면 내가 몸을 담아야지 밖에서 비판만 해서는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내가 보수의 옷을 입고 내 스스로 개혁하는 모습을 보이면 보수의 색깔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스스로 평가할 때 입당 당시의 뜻을 펼쳤다고 생각하나.

“지금까지 그렇게 하다 보니까 맨날 비주류인 거지. 그러니까 매 사안마다 내 목소리를 내고 그러는 거다.”

“MB가 대통령 되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나 자신을 버렸다”

MB(이명박 전 대통령)는 이 의원의 정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 의원은 ‘친이계의 좌장’이자 MB를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인터뷰 주제를 MB로 돌렸다.

-'왕의 남자'라는 꼬리표가 있다. 정치인으로서 ‘2인자’라는 꼬리표가 달가울 리 없을 것 같다.

“그런 걸 숙명이라고 하는 거다. MB를 만들었으니까. 내게 개인적인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면 그렇게 안 했을 거다. 남 좋은 일만 하고 2인자 소리 들으며 욕먹고 아무 일도 못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때는 나라를 위해서 MB가 대통령 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몸을 바쳐서 MB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나 개인이 권력을 잡은 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 감옥 안 가고 남아있다. 나는 직책만 얻어서 업무만 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 대한 공은 MB에게 돌아가고 과(過)는 다 이재오한테 돌아왔다. 그건 숙명이니까 감수해야 한다. 정치인이 사심(私心)을 갖고 남을 도우겠다고 하면 안 되고 남을 도울 때는 자기를 버릴 생각을 해야 한다. 나를 위한 계획으로 MB를 도운 게 아니고 MB가 대통령이 돼야 하기 때문에 도운 거다. 그때는 나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MB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을 뒤집어쓰게 되는 건데, 그건 어쩔 수 없다. 숙명이지."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 지난 2008년 4월 총선 당시 친이계가 친박계를 ‘공천학살’하자 박근혜 당시 의원이 한 말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2인자로 불렸던 이 의원은 ‘공천학살’의 주도자로 꼽혔다.

-MB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총선이 있었는데 그때 공천권을 휘둘렀다는 의심을 받았고, 아직까지 원성이 있다.

“공천에는 절차가 있다. 공천심사위원이 있고 최고위원회가 있다. 그 당시 나는 최고위원도 아니고 공천심사위원회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공천심사위원회에서 결정된 걸 취합을 하는 건데, 내가 학살을 해야 할 자리가 아니었다. 또 내가 공천심사에 누구를 밀어 넣어야 할 자리도 아니었다. 거기는 이미 우리당에 사무총장이 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공천 문제에 대한  모든 책임을 대통령이 질 수는 없는 거니까 결국 (2인자로 불렸던) 내가 지는 거다.”

-이방오 사무총장과도 친분이 있는 사이라 사람들이 더 의심을 했다.

“그런 식으로 책임을 내가 다 지는 거다. 18대 공천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하면 그건 내가 지겠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공천학살을 이재오가 했다 하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 당시 최형우 전 장관이 자신의 아들 공천 얘기를 꺼냈지만 ‘내겐 아무런 힘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형우 전 장관과 나는 형님 아우 하는 사이다. 그만큼 친하다. 그렇게 친한데도 공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것 자체가 내가 공천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게 아니냐.”

-MB 시절 총리를 지냈던 정운찬 총장이 사석에서 이 의원을 높이 평가하던데 두 사람이 친해지게 된 계기가 있나.

“정 총장이 총리를 했을 때 내가 장관을 했으니까 그런 것 같다. 회의를 하거나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나는 마음속에 욕심이 없으니 생각한대로 얘기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이 없으니 학계에 있다 들어온 정 총장으로서는 ‘정치권에도 저렇게 권력 눈치 안 보고 바른 소리 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지금도 친하다.”

대표적인 친이계인 이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과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당대표를 맡고 있던 지난 2006년, 이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되자 ‘과연 한나라당이 제대로 돌아갈 것인가’를 걱정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다. 그러나 박근혜-이재오 투톱 체제는 그 시절 각종 선거를 대승으로 이끌면서 ‘역대 최강의 한나라당’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이 의원이 원내대표, 박근혜 대통령이 당대표를 하던 시절에 처음에는 오월동주라는 우려가 나왔지만 결과는 아주 좋았다. 비결이 무엇인가.

“사람이 직책을 맡으면 선공후사를 해야 한다. 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개인 일을 뒤로 미뤄야 한다. 나는 어떤 직책을 맡으면 그 직책에 충실하다. 원내대표는 원내대표 역할을 충실히 하고 당대표는 당대표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내가 당대표 권한을 침해하는 것도 아니고, 원내대표 권한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 일에 최선을 다한 거다.”

-그 시절 한나라당이 가장 막강했다는 평가가 있다.

“역대 한나라당 중 제일 재미있는 한나라당이었지. 박근혜 대통령하고 나하고 두 사람이 할 때가.”

당시 두 사람은 서로의 생일에 꽃다발을 주고받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꽃다발을 잘 사용하는 것 같다. 부인인 추영례 여사의 생일마다 나이만큼 장미꽃을 선물한다고 한다.  

-얼마 전 본회의장에서 박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내가 일부러 인사치레를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예의를 다하려고 다른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서서 박수치고 있었다. 서서 박수치고 있는데 강창희 전 국회의장이 느닷없이 끌고 나간 거다. 강 의장이 그러니까 끝까지 버틸 수도 없고. 서서 박수치나 통로에 가서 박수치나 마찬가지니까 통로에 가서 박수치고 있었는데 대통령이 본회의장을 나가는 중에 김무성 대표가 느닷없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저 뒤에 이재오 의원 있습니다’ 이러더라. 그러니까 박 대통령이 ‘그래요?’ 그러면서 나가다 돌아서서 와서 악수하고 ‘오랜만입니다’ 하시더라. 그래서 나도 얼떨결에 ‘오랜만입니다’ 했다. 그러고 서로 간 거다.”

-대통령이 가던 길을 돌아서서 다가와 악수를 하는 건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잘 없지. 잘 없는 일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그냥 지나가는 인사다. 대통령도 개인적으로 감정이 어떠하든간에 당대표가 ‘뒤에 이재오 의원 있습니다’ 그런 건 ‘이재오 의원하고 악수하고 가시죠’ 이 말인데 어떻게 모른 척 그냥 지나갈 수 있었겠나.”

“박근혜 대통령과의 구원(舊怨), 그건 다 끝난 일”

지난 2006년, 이 의원은 한나라당 당대표 선거에 나섰다. 전임 원내대표 프리미엄에 민심에서도 앞선 그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연합’을 내걸며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7·11 전당대회 당일, 박근혜 의원이 이 의원의 연설 중간에 갑자기 일어나면서 청중들의 시선이 분산됐다. 결국 당선이 유력했던 이 의원이 박근혜 의원의 행동 한 번으로 당권을 빼앗겼다는 분석이 쏟아졌다. 더욱이 경선 과정에서 강재섭 전 대표로부터 색깔론 공격을 받으며 상처를 입었던 이 의원은 당시 지도부 사퇴까지도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7·11 전당대회에서 박 대통령과의 갈등이 표면화된 적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거야 다 지나간 거지. 정치인이라고 하는 게 사적 감정을 오래 가지면 안 된다. 그때그때 풀어버려야 한다. 그게 정치다. 정치인이라는 게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가 되고 오늘의 원수가 내일의 동지가 되고 그러는 거다. 정치는 소위 말하는 큰 바다와 같다. 이런 물줄기, 저런 물줄기, 구정물, 깨끗한 물이 다 모여서 바다로 가서 대해를 이루고, 작은 물줄기가 모여서 큰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다. 정치인은 지나간 건 빨리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정치는 개인의 감정을 가지면 안 된다. 설사 그 사람하고 개인적으로 나빴다 하더라도 그걸 정치에 반영하면 안 된다. 잊고 지내야지. 박정희 대통령 때 감옥을 갔다 왔고, 고문을 당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나 당대표 되는 걸 막았고, 그런 구원들이 있지만 그런 건 그때로 다 끝나는 거다. 그걸 지금까지 염두에 두고 있으면 정치인이 안 된다. 그건 소인배지. 기자들은 기사를 재미있게 쓰려고 그런 걸 쓰지만, 그건 다 끝난 일이다.” 

   
▲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 ⓒ 시사오늘

“이명박 대통령과 개헌 약속”

이 의원은 개헌 전도사다. 개헌에 정치 인생을 걸다시피 한 모습이다. 이 의원 입장에서는 개헌이야말로 필생의 과업일 것이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어김없이 개헌 이야기를 꺼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개헌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18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개헌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개헌을 추동하려면 당에서 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떨어지고 없으니까 이명박 대통령하고의 개헌 약속이 흐지부지됐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개헌하기로 약속해놨지만, 개헌을 추동할 세력이 없어져버렸던 거다."

-이명박 대통령과 미리 약속을 했는가.

“이명박 대통령하고 세 가지 약속을 했다. 개헌, 4대강, 행정구역 재편. 이 세 가지를 우리 정부에서 하자고 약속하고 대선 캠프에 들어갔다.”

-4대강만 하고 나머지 두 개는 안 됐다.

“4대강도 원래는 한반도 대운하를 하려고 했던 건데 정비로 끝났다. 손을 대긴 했지만.”

-당시 박근혜 의원 입장에서는 대통령을 염두에 두었을 텐데 개헌 얘기를 꺼내는 건 어려웠을 것 같다.

“그래서 집권하자마자 해버렸어야 했다. 근데 내가 낙선하고 미국 가서 1년, 중국 가서 1년, 중앙대 가서 6개월 교수하다가 정부에 진입을 해 보니까 이미 그때는 다음 대선을 노리는 사람들이 여야에 다 생겼더라. 박 대통령도 그중의 한 명이고. 여당의 유력 후보였으니까. 그런데 개헌하려고 하면 ‘당신들은 5년간 다 하고 왜 내가 하려니까 왜 개헌하려고 그러느냐’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을 거다. 야당도 마찬가지고. 그때는 타이밍이 반대 세력에 부딪히게 돼 있었다. 발의는 국회 과반수가 필요하고, 국회에서 과반수가 안 돼도 대통령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발의해봐야 국회의원 2/3가 찬성해야 통과되는데 여야 주자들이 다 반대하고 대권 주자 주변의 의원들이 다 반대하니까 2/3를 국회에서 확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 된 거지.”

-얼마 전에도 개헌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번에는 왜 실패했나.

“이번에는 또 2/3를 확보했는데 대통령이 못 한다니까 여당이 물러섰다. 그래도 총선 끝나면 해야지. 그때는 분위기가 또 달라진다. 아직 한 번 더 기회가 있는 게, 대선이 2년 넘게 남았다.”

“내년 총선 이후에 다시 개헌 기회 올 것”

-김무성, 문재인 등 유력 대권 주자들도 개헌을 마땅찮아 할 것 같다.

“그분들도 대통령 혼자서는 정국을 못 이끌어 간다는 걸 박근혜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을 통해 교훈을 얻었을 거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이 구조 하에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나 혼자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고,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자는 거다. 협치의 개념이다. 혼자 나라를 이끄는 게 아니고 총리에게도 권한을 주고 지방 정부에도 권한을 주고 내각에도 권한을 주고 함께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구도로 다음 정권을 설정해야지 ‘내가 대통령 해서 5년 동안에 지나간 대통령처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겠다’ 하면 지금과 같은 혼란만 반복된다. 그건 지금의 주자들도 잘 알 거고. 지금 대선 주자들의 지지율이 20%를 안 넘어간다. 이렇게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이미 국민들도 ‘아 이제 한 사람이 나라를 이끌 시대는 지나갔구나’ 하고 판단하는 거다. 그러니까 특정 주자들에게 쏠림이 안 가는 거지."

-개헌에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가 있나.

“한 정치인이 뜻을 세웠으니 관철해야지. 나라의 정치 스타일을 바꾸고 정치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나라의 형태로 한 단계 발전하는 거니까. 그게 내 목적이다. 내가 그걸 통해서 정치적 이득을 얻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 그랬으면 내가 이명박-박근혜 두 사람 사이에서 필요로 할 때 한쪽에 서지 않았을 거다. 내가 중립만 지켰으면 오늘 왕의 남자 소리 듣고 이렇게 있겠나.”

이 의원 자신이 이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유도 개헌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정치적 현안에 잘 목소리를 안 내는 것 같다.

“자중하고 자애하면서 침묵하고 있는 거다. 내가 지금 나서면 ‘이명박 정부 5년 잘하지도 못했으면서 왜 지금 와서 딴 소리하냐’는 얘기가 나오게 돼 있다. 그런데 내년 총선 지나면 어느 정도 평가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사자방’이라고 해서 4대강, 자원외교, 방산비리 등 요란했지만 ‘이재오’는 이름 한 자도 거론 안 됐다. 이명박 정권 때 정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산을 가진 것도 없고 부패 혐의를 받은 것도 없다. 이런 게 내년 총선 끝나면 재평가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4대강에 대한 얘기도 꺼냈다.

"4대강도 그렇다. 그렇게 반대했지만 가뭄이 드니까 4대강 활용 안 하면 안 되게 생겼다. 인천, 계양, 김포, 강화 그쪽은 지금 한강물 끌어들인다고 한다. 한강물 안 끌어들이면 농사가 안 되는 지경이니까. 그러니까 4대강도 재평가되고 있다. 이 정도 가뭄이 내년 봄까지 지속되면 충천, 호남, 영남 저쪽에도 4대강 안 끌어들이고는 식수도 해결 못하는 상황이다. 핵보다 무서운 게 식수인데, 4대강 안 했으면 나라가 어떻게 될 뻔했나. 그러면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이 4대강 잘한 거구나’ 할 거고, ‘4대강 전도사 이재오도 선견지명이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거다. 내가 나서서 나를 알아달라 그러는 건 아니다. 때가 안 오면 때를 기다리는 게 정치인이다. 때를 기다려도 영원히 안 올 수도 있지만, 그럼 그걸로 끝나는 거고. 그런 것이다."

인터뷰 중에도 계속 민원실을 왔다 갔다 하던 이 의원은 밀려드는 지역구 주민들의 요청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낼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 의원을 붙잡고 기자는 마지막으로 역대 대통령 중 누구를 가장 높이 평가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이 의원은 껄껄 웃으며 “이명박 대통령이지. 대통령 만들어놓고 다른 소리 하겠나”라며 민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진호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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