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서거①]김영삼, 군정종식 ‘신념’…의회민주주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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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서거①]김영삼, 군정종식 ‘신념’…의회민주주의 ‘원칙’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5.11.22 03: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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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서 이명박까지 함께 정치, 현대정치사 ‘거목’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1954년 국회에 들어간 YS는 1992년까지 9선 의원을 지냈고, 14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YS는 한국 현대정치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승만에서부터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정치를 해왔다.

‘정치9단’ 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있지만 YS 정치일생은 반독재투쟁과 군정종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시사오늘>의 그의 삶을 살펴봤다.

▲ 1983년 YS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기 위해 23일간 단식투쟁을 감행했다.ⓒYS자서전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그의 말처럼, 유신체제 붕괴와 전두환 정권이 항복을 선언하고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YS는 야권의 지도자로서 목숨을 건 투쟁을 이어 나갔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야당의 지도자들이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모진고문을 받을 때 YS는 국회 국무위원 자격으로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부인인 손명순이 “지금 게엄령이 선포됐다. 미국에 머물면서 때를 기다려라”고 했지만 YS는 “감옥에 가는 일이 있어도 내 나라로 가서 싸워야 한다”며 국내로 들어와 반유신체제에 맞섰던 일화는 아직까지 회자된다.

1979년 유신말기, 박정희 정권은‘YS 제거’에 나서며 상도동 직계로 분류되던 문부식 김덕룡 등을 구속시키고 서석재 문정수 등을 지명수배했다. 그리고 YS의 ‘총재직’과 ‘의원직’까지 빼앗으려 했다.

YS가 뉴욕타임스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정부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은 나설 의무가 있다”고 말한 것을 계기로 박 정권과 공화당은 이를 ‘사대주의적 망언’이라고 규정하고, YS 의원직 제명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중재에 나서 “뉴욕타임스 기자회견은 다소 과장되고 와전된 것이라는 말을 해달라, 그러면 의원직 제명은 막을 수 있다”고 타협점을 제시했지만, YS는 “나는 제명을 당하든 감옥에 가든 상관없다. 나는 잠시 살기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맞섰다.

YS의 의원직 제명은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로 번지며 이른바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이로인해 유신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1983년 5월 전두환 정권에 맞서기 위해 YS는 23일 간 단식투쟁을 감행했다. 이를 통해 가택연금이 풀리자, 사람들을 모아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만들고 신민당 창당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신민당은 12대 총선에 참여해 민정당과 관제야당이었던 민한당의 양당구도 체제를 깨고 ‘신민당 돌풍’을 몰고 왔다. 제1야당이 된 신민당은 민한당을 흡수 통합시키며 103석 이라는 거대야당이 됐고,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하는데 선봉에 섰다.

YS 원칙과 소신 ‘의회민주주의자’

이처럼 반독재투쟁과 군정종식에 앞장섰지만 YS에게는 다른 야당지도자들과는 달리 분명한 원칙과 소신이 있었다.

가장 큰 원칙은 정당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73년 유신체제하에서 치러진 9대총선. 153개이던 전국의 지역구가 절반도 못되는 73개로 줄어들었다. 국회의원 중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했다. 대부분의 야당 지도자들은‘보이콧’을 주장했지만 YS는 ‘의회 안에서 유신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1979년 이철승 체제를 몰아내고 당 총재에 선출돼 유신정권 몰락의 기폭제역할을 했다.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서 민추협은 선거 참여여부를 고민했다. 대부분의 인사들은 “총선참여를 하게 되면 우리의 투쟁이 희석될 수 있다”며 반대했고 미국에 체류 중인 김대중(DJ)도 “민추협은 선명재야로 남아달라”며 총선 보이콧을 전달했다.

하지만 YS는 “여당인 민정당과 관제야당인 민한당의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선명야당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해야 한다”며 신민당을 창당했고, 마침내 대통령직선제를 일궈냈다.

또한 YS는 장외투쟁을 자제했다. 정치현안을 원내에서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만약 길거리로 나선다면 앞장선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투쟁 때 길거리로 나선 YS는 선봉에 섰다. 그러다 일명 ‘닭장차’에 실려 가는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계속>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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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ON 2015-11-22 10:12:02
기사는 잘썻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