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와 3당합당]문재인은 3당합당을 ‘야합’이라 말할 자격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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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와 3당합당]문재인은 3당합당을 ‘야합’이라 말할 자격 있나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5.11.26 13: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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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3당합당은 최선 아닌 차선”…‘주목’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김영삼(YS) 전 대통령에 대한 공과를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따라붙는 수식어는 ‘3당합당’이다. ‘평생 민주화운동을 해온 사람이 군부세력과 손을 잡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야합’이라고 몰아세운다.

때문에 지난 9월 새정치민주연합은 ‘야당60년史’를 정리하면서 ‘3당합당 이전의 YS만 인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시사오늘>은 1987년 대통령직선제 이후 야권의 후보단일화 과정과 3당합당의 뒷얘기들을 추적해봤다. 3당합당이 야합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김영삼은 1988년 야권통합을 통해 군정종식을 하려 한 흔적들이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사진은 1985년 YS와 DJ. ⓒ뉴시스

YS, DJ안 전격수용하며 ‘경선’ 촉구

1987년 야권의 후보단일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야당인 통일민주당에는 걸출한 두 명의 후보가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DJ). 이들은 후보단일화만 이루면 국민의 염원인 국정종식이 이뤄질 것처럼 보였다.

당내 지분은 통일민주당 창당 때 50 대 50으로 하기로 했지만 김대중 측이 열세였다. 전국 92개 지구당 중 창당지구당 56곳과 미창당지구당 36곳이었다. 미창당지구당을 제외하면 30대26으로 상도동 측이 우세였다.

통일민주당이 대선후보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36곳의 미창당지구당 조직책을 만들어야 했다. 상도동 측 김동영 의원은 50 대 50으로 하자며 18곳씩 나눠서 임명하자고 했고, 김대중으로부터 전권을 받고 나선 동교동 측 이용희 의원은 창당지구당의 경우 상도동이 많다며 23곳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김동영은 “경선을 하자는 얘기냐, 아예 후보자리를 달라고 하는 편이 낫다”며 "동교동 측이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처럼 주장이 엇갈리자 양측 간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9월 8일부터 3일간 광주 목포 하의도 등 호남을 순회하며 바람몰이에 나선 김대중은 “36개 미창당지구당을 서둘러 정비하고 경선을 치르자”며 김영삼을 압박했다. 물론 동교동 측 안을 수용해야 한다는 게 전제 조건이었다.

10월 22일 후보경선을 단판 짓기 위해 외교구락부에서 DJ 만난 YS는 동교동 측 안을 수용했다. 상도동계 내부에서는 “김영삼이 후보를 양보했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김대중은 이 안을 수용하지 않고 26일까지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나흘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26일 통보된 김대중의 답은 분당선언이었다.

28일 김대중은 ‘4자필승론’으로 무장한 채 신당창당과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4자필승론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선에 참여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논리다. 영남에서 노태우와 김영삼이 표를 나눠 갖고, 충청에선 김종필이 표를 독식하면, 호남과 수도권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은 DJ가 당선된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김영삼은 자서전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투쟁>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제 후보단일화를 위해서는 경선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첫째, 경선은 공평한 게임이었고, 김대중은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둘째, 예측할 수 없는 경선을 통해 단일화가 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 결과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이다.” 

김대중은 <김대중자서전>을 통해 “김영삼은 내가 요구한 미창당지구당 조직책 임명권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선거일정상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사실상 후보단일화 협상은 결렬됐다”고 밝혔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이후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YS는 DJ안을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사진은 1987년 부산유세에 나선 YS.ⓒYS자서전

야권통합위해 ‘소선거구제’받아

3당합당의 진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민주세력 간의 분열로 정권을 잡지 못했다는 국민의 비판에 직면한 김영삼은 총재직을 버렸다. 총재직을 버린 후 DJ가 이끄는 평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했다. 그리고 민주당과 평민당 간의 야권통합 협상 기구를 발족했다.

평민당은 양당이 합당하기 위한 조건으로 소선거구제를 요구했다. 당시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사실 전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민정당이나 민주당은 중선거구제로 13대 총선을 치를 경우 1당과 2당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군정종식을 위해서는 야권통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평민당의 안을 수용해 버렸다.

1988년 2월 23일 총선을 2개월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김영삼은 마포가든호텔에서 김대중을 만났다. 이날 야권통합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평민당의 ‘소선거구제’안을 김영삼이 수용해버렸다. 소선거구제를 수용함으로써 야권통합은 급물살을 탔다. 소선거구제는 상도동 내부에서조차 큰 반발을 일으켰다.

YS 복심으로 불리는 김덕룡은 속리산까지 쫒아가 “소선거구제를 받으면 우리가 제2야당으로 추락할 수 있다”며 재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YS 차남 김현철은 ‘중앙조사연구소’를 통해 소선거구제로 총선을 치를 경우 민주당이 평민당에 이어 원내 3당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데이터를 전달했다. YS는 이때 “군정을 종식하려면 야권통합이 필요하고, 야권통합을 하려면 소선거구제를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급물살을 탄 야권통합은 재야세력으로 급조된 한겨레민주당을 포함한 3자통합으로 가닥이 잡혔다.
민주당은 최형우와 김수한, 평민당은 허경만 김영배, 한겨레민주당은 제정구 등이 통합협상자로 나섰다.

세 당은 대표최고위원제로 지도체제를 꾸리기로 하고, 총선 공천권을 주관하는 조직위원장에는 한겨레민주당 장을병을 선임키로 합의했다. 3월 19일 합당에 서명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서교호텔에서 세 당의 협상대표가 만났다. 하지만 최종안을 들고 DJ에게 결재 받으러 간 평민당 협상대표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괴청년들이 나타나 이날 합당서명식은 폭력사태로 번졌다. 민주당 대표 최형우는 괴한들에 의해 손바닥이 담뱃불에 지져지는 수모를 당했다.

야권통합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람은 최형우다. 1987년 대선에서 YS와 DJ가 분열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양 진영의 화합을 위해 애썼고, YS의 통일민주당과 DJ의 평화민주당이 합당하는 것이 시대의 순리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합의를 이뤄냈지만 정작 합의서에 서명을 하는 날 동교동계가 아닌 깡패들이 나타나서 결렬됐다.

최형우는 이에 대해 2013년 5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합당 서명하려고 할 때 서교호텔에 깡패들이 와서 결렬됐다"고 밝혔다.

YS는 야권통합이 물 건너가자 군정종식을 위해 1990년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합당을 추진, 14대 대통령자리에 올랐다.

YS, "3당합당은 군정종식위한 차선택”

필자는 2011년 YS와 만나 이에 대한 생각을 물은 적이 있다.

▲ YS는 2011년 가진 인터뷰에서 3당합당은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한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증언했다.ⓒ시사오늘

-정치모토가 ‘군정종식’이다. 이를 위해 1987년 대선에서 DJ에게 후보를 양보할 생각은 없었나.
“일방적으로 후보를 양보할 수는 없다. 경선을 치르든, 그에 상응하는 방법을 통해 후보를 정하는 게 정당민주주의고 의회민주주의 아닌가.”

-1987년 10월 22일 DJ와 만나, 동교동 측 안을 수용했다. 내부에서는 사실상 후보를 양보한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나돌았다.
“군정종식이 된다면 누가 후보가 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1970년 신민당 경선후보전에서도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었다. DJ가 후보로 선출된다면 그의 당선을 위해 지원유세 못할 건 없는 것 아닌가.”

-DJ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너무 늦은 시점에 우리의 안을 수용해 후보단일화가 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아무튼 후보단일화를 못한 책임에 통감한다.”

-3당합당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나. 예를 들면 통일민주당 단독으로 정권을 잡을 수도 있지 않았나.
“당시 13대 대선을 보면 지역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이듬해 총선도 같은 결과로 나왔다. 사실상 정권을 잡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야권이 하나로 합친다면 모를까.”

-DJ가 이끄는 평민당과의 합당은 생각 안 해봤나.
"야권통합을 왜 추진 안했겠나. 야권통합을 전제로 소선거구제를 해야 한다고 해서 그것도 수용했지만 끝내 무산됐다.”

-3당 합당을 통해 대통령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합당이 위험한 도박에 가까웠다.

“힘들었다. 25%(민주계)대 75%(민정계)의 싸움으로 시작했으니 정치 생명이 위험했다. (합당 당시) 정치 상황이 경상도와 전라도가 완전히 쪼개져 있었고 경상도는 경남과 경북이 갈라져 있어서 (합당을 안 하고는) 군사정권을 못 끝내 군사정권을 업고 정권교체를 하려 했던 거다. 노태우는 합당 후 온갖 술수를 써서 내가 대통령이 못 되게 하려 했지만 나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정신으로 정정당당히 싸웠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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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2015-11-26 21:47:18
기사대로 3당합당은 차선이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군정종식이 될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