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YS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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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YS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삶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5.11.29 15: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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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사고와 강인한 정신력 소유했던 지도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윤종희 기자) 

▲ 故 김영삼 전 대통령 ⓒ 뉴시스

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시대정신을 읽는데 탁월했으며 대의를 앞에 두고는 대도무문(大道無門) 정신으로 담대한 길을 걸었다. 이런 모습은 수많은 정치세력들을 끌어 모으는 구심력이 됐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긍정적 사고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결코 좌절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한 지도자였다.

△호연지기 키운 유년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일제시절인 1928년 12월 4일(음력)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아버지 김홍조(2008년 작고)와 어머니 박부연(1960년 간첩에게 피살)의 아들로 태어났다. 1남5녀 중 독자인 YS는 어선 10척에 멸치어장이라는 넉넉한 가정환경 속에서 집 앞 바다를 놀이터 삼아 호연지기를 키웠다. 경남 중학교 3학년 때 하숙집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손수 써서 붙여 놓은 붓글씨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강한 체력의 YS는 경남중 시절 학교 수영선수로도 뽑혔다.

△정계입문= YS는 1948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 시절 웅변대회에 나가 외무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당시 장택상 외부부장관의 눈에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YS는 1951년 장택상 총리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YS는 1951년 학도의용군에 들어가 과거 웅변대회 수상의 경력을 살려 대북방송 정훈병으로 복무했다. 그해 YS는 평생의 반려자인 손명순 여사와 결혼한다. 당시 손 여사의 아버지 손상호는 ‘마산 재벌’로 불리기도 했다.

△자유당 탈당= YS는 1954년 3대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당시 나이 만 25세로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80년대 정치규제 조치로 출마하지 못한 11, 12대 총선을 제외하면 1992년 총선까지 모두 아홉 번 국회의원에 당선, 최다선(最多選) 기록을 세웠다. YS가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해 11월 이승만 정권은 ‘초대 대통령만은 중임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개헌을 시도한다. 이 때 YS는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개헌을 하면 안 된다’라고 직언한다. 이기붕은 ‘김 의원, 왜 그딴 소리를 하느냐’며 화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사사오입 개헌이 강행됐고 YS는 자유당을 탈당, 야당 생활의 길로 들어선다.

△서대문 형무소 수감= 1961년 5·16 쿠데타 세력은 YS에게 군정참여를 제의했다. 하지만 YS는 이를 거부했고 1963년 군정연장 반대 시위인 '위장결혼식 사건' 참여로 구속, 서대문 형무소에서 23일 동안 ‘감방살이’를 했다.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했던 YS는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DJ), 이철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주창,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다. 당시 유진산계와 이재형계의 지원을 약속받은 YS가 대통령 후보가 될 게 확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2차 결선투표에서 DJ에게 패하자 “김대중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깨끗이 승복했다. 당시 YS의 패배와 관련, ‘박정희 정권이 YS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재형을 회유했다’라는 설(說)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 故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 故 박정희 전 대통령 ⓒ 뉴시스

△초산테러 사건= 1969년 5월 들어 민주공화당은 개헌 추진을 본격화한다. YS는 '3선 개헌은 기필코 저지될 것'이라며 강경히 맞선다. YS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3선 개헌 음모는 5·16 쿠데타에 이어 제2의 쿠데타'라고도 말했다. 그해 6월 20일 밤 10시 15분 경 귀가 도중 YS의 차량에 괴한 3명이 초산을 던지는 ‘초산테러 사건’이 발생한다. 다행히 YS가 차량 문 잠금 장치를 하고 있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런 탄압 속에서도 YS는 1974년 당시 최연소였던 47세 나이에 야당인 신민당 총재가 되어 ‘반유신(反維新)’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며 전국적인 개헌운동을 전개했다.

△국회의원 제명= YS는 1979년 8월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 후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박정희 정권 지지철회를 주장했다. 그러자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반국가적 언동”이라며 의원직 제명을 통과시켰다. YS는 제명되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말을 남겼다. 앞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YS와 비밀리에 만나 ‘박정희 대통령이 제명 그 이상의 극단적 방법을 쓸 수 있다’며 ‘내일 아침에 국회에 나갈 때 잠깐만 기자실에 들러 뉴욕타임스 기사가 와전되었다고만 한마디 슬쩍 하시라’고 말했다. 하지만 YS는 ‘나보다 박정희가 먼저 죽을 거요. 김 부장도 조심하시오. 잠시 살기 위해서 영원히 죽는 일을 나는 할 수 없소’라고 말했다. 이후 ‘부마항쟁’이 발생했고 곧 이어 10·26사건이 터지면서 유신시대는 막을 내렸다.

△목숨을 건 단식투쟁= 1980년 YS는 유력 대권주자로 떠올랐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5.17 조치’로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가택연금 당했다. 이 때 YS는 “나를 힘으로 막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내 양심을 전두환이 빼앗지는 못한다”고 투쟁의지를 밝혔다. 1981년에는 YS의 최대 정치조직인 ‘민주산악회’가 태동했다. 이후 민주산악회는 200여만 회원 규모의 세계 최대 산악회가 된다. 1983년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정치범 석방 및 민주화 5개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23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당시 언론은 이를 보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YS 단식 소문이 퍼지자 전두환 정권은 민정당 권익현 사무총장으로 하여금 병원으로 찾아가 출국을 권유토록 한다. YS는 “나를 해외로 보내는 방법이 있다. 시체로 만들어 부치면 된다”고 일축했다.

△민추협과 신민당 돌풍= YS의 단식으로 민주화 세력이 다시 결집했고 1984년 5월 18일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됐다. YS는 곧이어 DJ와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 1985년 2·12총선(12대)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직선제 개헌 범국민운동을 주도하며 반독재 투쟁 전면에 섰다. 이는 직선제 개헌을 위한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다. 하지만 그해 대선에서 DJ와의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2위(28%)로 낙선한다. YS는 낙선에도 불구하고 통일민주당을 계속 이끌며 여전히 유력 대권주자 지위를 유지했다. YS는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는 ‘3당 합당’을 결행한다. YS는 당시 상황에 대해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의 국회 증언이 이뤄졌다. 5공 청산의 최대 걸림돌이 제거된 셈이었다. 5공 청산이 일단락된 시점에서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대통령 당선= YS는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여당인 민자당 후보로 당선, 마침내 문민(文民)정부를 탄생시킨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취임 이틀 뒤인 27일 국무회의에서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17억7822만원)을 전격 공개하며 공직자 재산공개를 추진했다. 곧이어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등 군부의 핵심인 하나회 세력을 일거에 축출, 군의 정치개입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울러 금융실명제, 부동산거래 실명제 등을 전격 실시, 부정·부패 해소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같은 개혁에 YS의 당시 지지율은 90%를 넘었다. YS는 5·18 특별법 제정을 통해 광주를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만들었다.

△임기 중 대형사고= YS 집권 시기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하지만 YS는 솔직·담백한 자세로 정면 돌파했다. 1994년 10월 성수대교 사건이 났을 때 언론에서는 ‘YS 정권이 관리를 제대로 못한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이영덕 국무총리가 사표를 냈다. YS 측근들은 ‘성수대교 붕괴는 과거의 적폐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문민정부의 책임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YS에게 전했다. 하지만 YS는 사고가 난 후 하루 이틀 지나 당시 김정남 교문수석을 불러 ‘내가 사과하겠다’면서 '이영덕 총리의 사표는 반려하겠다'고 밝힌다. YS는 사과를 진실하게 했으며 과거의 ‘빨리빨리’ 행태와 성과 만능주의 등 잘못된 점을 이제부터 바로잡아야 하고 그것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퇴임 후 정치적 영향력= YS는 5년 임기 내내 특별한 과오 없이 국정을 운영했다. 자신의 차남이 구속되는 일이 있었지만 임기 중 쌓은 공(功)을 덮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임기 말(末) IMF 사태가 터지면서 가혹한 평가를 받게 됐다. 그럼에도 YS는 자신이 키웠던 수많은 정치 인재들 덕분에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2013년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고 장기간 입원과 퇴원 등을 반복하다 2015년 11월 22일 새벽 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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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준영 2015-11-29 20:30:2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제가 김영삼 대통령님이 정치하시던 시절에 나이가 너무 어려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진 모르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으로써 많은 훌륭한 일들을 하셨을꺼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