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와 홍명보]한국판 영웅의 날개없는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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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와 홍명보]한국판 영웅의 날개없는 '추락'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6.01.15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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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로 풀어 본 정치인(5)>'모래시계 검사‘와 ‘월드컵 영웅’ 드라마틱한 삶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홍준표 경남도지사 ⓒ 뉴시스

정치는 축구와 비슷하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겨뤄야 하고, 승자와 패자도 생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비슷한 점은, ‘사람’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축구 팬들은 잔디 위에서 뛰는 ‘사람’에게 멋진 플레이를 기대하고, 국민들은 정치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희망을 투영하고 미래를 건다. 다른 듯 닮은 정치계와 축구계의 ‘사람’을 비교해 본다.

‘위기의 영웅’ 홍준표와 홍명보

1995년 SBS에서 방영했던 <모래시계>는 평균 시청률 50.8%의 ‘국민 드라마’였다. 사회 고위층에 대항하는 젊고 소신 있는 청년 검사의 좌절과 승리를 다룬 이 작품은 ‘귀가시계’로 불릴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드라마 속 검사의 실제 모델이었던 홍준표 경남도지사를 스타로 만들었다.

1993년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직했던 홍 지사는 <모래시계>의 모티브가 된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등 권력 실세들을 구속 기소함으로써 ‘국민 검사’가 됐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홍 지사는 이후 자신이 쓴 책 제목이 된 “홍 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요”라는 식의 협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수사를 강행해 명성을 얻었다,

그는 <모래시계>의 흥행으로 일약 정치권이 주목하는 ‘정치 기대주’가 됐고, 1995년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를 받아 정계에 입문한다.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송파갑에 출마, 43.3%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정치인 홍준표’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지만, 초기 정치 행보는 녹록지 않았다. 제15대 총선 당시 선거운동 조직에 2천4백여만 원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돼 의원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후 홍 지사는 1999년 미국 워싱턴인터내셔널센터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한다.

2000년, 한나라당 출범과 함께 정계로 돌아온 그는 2001년 10·25 재보선을 통해 국회에 복귀,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한나라당 원내 부총무에 선출됐고, 17, 18대 총선에서 연달아 당선돼 4선 의원이 됐으며, 18대 국회에서는 한나라당 원내대표에도 올랐다. 2011년 7월에는 한나라당 대표에 당선, 거대 여당의 당권까지 손에 넣으며 대권을 바라보는 거물로 성장한다. 2012년 4월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민병두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으나, 경남도지사로 화려하게 복귀하며 ‘대권 후보’로서의 힘을 유지해나간다.

홍 지사와 마찬가지로, 홍명보 항저우 그린타운 FC 감독 역시 ‘한국 축구의 영웅’이었다. 고려대학교 재학시절 국가대표로 발탁된 홍 감독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하며 한국 축구를 이끌 유망주로 기대를 모은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1992년 유공 코끼리의 지명을 받은 그는 포항제철 아톰즈로 트레이드, 데뷔 시즌부터 포항의 K리그 우승에 공헌하며 신인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MVP를 수상한다.

2무 1패로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으나, 우승 후보 스페인(2-2 무승부)과 독일(2-3 패)을 상대로 선전하며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스페인 전 추격골과 동점골을 도왔고, 독일 전에서 추격골을 넣으며 2골 1도움의 성적을 남긴다. 특히 독일 전에서 넣은 중거리 슛은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아름다운 골이었다.

K리그와 국제무대에서 맹활약을 펼친 홍 감독은 1997년 J리그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벨마레 히라츠카에서 실력을 입증한 그는 1999년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했고, 2000년에는 사상 최초로 외국인 주장에 선임되는 등 일본 무대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2002년, 홍 감독은 자신의 네 번째 월드컵에 주장으로 참가하며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을 이끌었고,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한다. 축구 선수로서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는’ 마무리였다.

▲ 홍명보 항저우 그린타운 FC 감독 ⓒ 뉴시스

지도자로 변신한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에서 코치로 경험을 쌓았고, 2009년 2월 U-20 감독으로 선임돼 FIFA U-20 월드컵에서 18년 만에 8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룬다. 이후 올림픽대표팀 감독으로 취임, 2012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떠오르는 젊은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올림픽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안지 마하치칼라에서 6개월 동안 어시스턴트 코치로 활약했던 그는 2013년 6월, 드디어 최강희 감독으로부터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이어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두 영웅이 위기에 빠졌다. 홍 지사는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과정에서 터진 ‘성완종 게이트’에 이름을 올려 불법 정치자금 1억 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홍 지사가 무죄를 확신하고 있는 만큼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소신 있게 고위층을 수사하는 모습으로 지지를 받았던 그가 20여년 만에 후배 검사의 수사 대상이 돼 검찰로 복귀하는 장면은 국민들의 실망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최근 경남 지역에서는 진주의료원 폐업, 무상급식 중단, 성완종 게이트 등을 이유로 홍 지사의 주민소환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에 대항해 박종훈 경남교육감 주민소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법 서명 논란도 발생했다. 다시 한 번 위기에 몰린 모양새다.

홍 감독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국민 축구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홍 감독은 대표팀 감독직에 오른 뒤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선수 선발 과정에서 친분에 따라 선수를 뽑는다는 ‘의리 논란’에 휘말리더니, “소속팀 경기에 나서지 못한 선수는 대표팀에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아스널 이적 후 거의 경기에 뛰지 못했던 박주영을 발탁해 의아함을 자아냈다.

또 월드컵에서는 졸전 끝에 러시아, 알제리, 벨기에에게 밀려 조 최하위로 짐을 쌌고, 월드컵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부동산 투자를 위해 땅을 보러 다녔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월드컵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는 “K리그서 최고의 선수들이라면 유럽에서는 B급일 수밖에 없다”는 발언으로 축구 팬들의 공분을 샀다. ‘월드컵 영웅’ 홍명보의 드라마틱한 추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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