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탄핵역풍 넘고 야당대표 잡고…, 내가 종로 적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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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탄핵역풍 넘고 야당대표 잡고…, 내가 종로 적임자”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6.01.24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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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전 국회의원 “종로 민심, 이름값 올리려 들어왔던 사람들에겐 높은 점수 안줘”“지난 4년 간 재충전, 종로를 위해 일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YS로부터 정치인이 어떻게 판단하고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김병묵 기자]

여권의 한 중견 정치인이 방학을 끝내고 돌아왔다. 국회의원으로서 종로에서 내리 3선을 했으며, 외국에서 정치학 교수를 할 만큼 학자로서의 입지도 탄탄하다. 대통령의 통역을 도맡을 만큼 어학에 능한 외교관 출신인데,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그는 종로 토박이 새누리당 박진 전 의원이다. 박 전 의원은 선대부터 60여년을 살아온 종로구에서 다시 한 번 도전을 천명했다. <시사오늘>은 인터뷰를 위해 21일 광화문 앞 박 전 의원의 사무소를 찾았다.

박 전 의원은 빨간 점퍼를 입은, 소탈한 이웃 아저씨의 차림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선거 유세를 위해 자전거로 골목골목을 누비며 어르신들 앞에서 하모니카 연주를 하곤 한다는 그는 ‘한 번 보여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그 자리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고향의 봄>을 들려줬다. 그렇게 인터뷰는 시작됐다.

▲ 박진 전 새누리당 의원 ⓒ시사오늘

청와대 비서관 5년, YS의 스파르타 훈련

-정치에 어떻게 입문하게 됐나.

“영국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다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비서관으로 발탁하겠다는 전화였다. 내가 국비유학생으로 하버드와 옥스퍼드에서 10년을 공부했는데, 나랏돈으로 10년 공부했으니 이제 나라를 위해 일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 그렇게 청와대에 들어와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5년간 보좌했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정치인이 된 건 2002년 이회창 당시 대통령 후보에게서 국제특보를 맡아달라는 전화가 왔을 때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정치판에 불러들인 이 후보는 낙선했지만, 나는 그 해 8월8일 재보선으로 종로에서 처음 국회의원 생활을 시작했다.”

-청와대 비서관 시절은 어땠나.

“YS는 아침마다 새벽 5시에 조깅을 했다. 4년 반 동안 계속해서 새벽에 열 명 남짓의 비서관이 팀을 이뤄 함께 뛰었다. 지금은 중진급이 된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이나 이성헌 전 의원 등이 그 때 함께한 멤버들이다. 그들은 지금도 나와 가까이 지낸다. YS는 젊은 비서관들과 조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했는데, 국정에 대한 이야기부터 개인적인 이야기, 젊은 비서관들의 아이디어 등이 주제였다. 이름이 불린 사람은 앞으로 나가 YS 옆에서 뛰며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항상 국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신문들을 통해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는 습관을 들였다. 전날 가판으로 나온 신문 7~8부를 모아 꼼꼼히 읽고 나름 분석을 해야 하는데, 당시엔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YS가 언제 무슨 질문을 할지 모르지만 나름 국가원수를 모신다는 사람들이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라고는 할 수 없지 않나. 하지만 당시에 배운 것들은 큰 도움이 됐다. 정치란 무엇인가, 국회의원으로선 어떤 처신을 해야 할지, 국정에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등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됐다. 나중에 보니 그게 YS식 훈련법이더라.”

-곁에서 본 YS는 어떤 인물인가

“정면돌파형 민주투사라고 생각한다. 군 출신 대통령과 다른 첫 국민대통령으로서의 자부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서 당당하고 늘 거리낄 것이 없는 분이었다. 나를 아들처럼 아껴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은 분이었다. YS 서거 후, 빈소를 내내 지키다가 마지막 날 문득 서울광장의 분향소에는 상주로 누가 있을까 해서 저녁 8시쯤 가봤다. 그런데 아무도 없더라. 서울시청 공무원들이 분향하는 시민들에게 꽃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라도 있어야지 하면서 내가 지키고 섰다. 그런데 정말 다양한 분들이 문상을 오는 거다.

한 택시기사는 YS가 민주당시절 자신이 상도동에서 여의도까지 태운 적이 있다며 분향소를 찾았다. 어떤 아주머니는 자신의 식당에 YS가 들러 식사를 하는데 그렇게 살갑게 해주셨다고 하며 조문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고등학생이었던 한 여성은 그 때 어찌나 존경심을 품었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기분이라 왔다며 슬퍼했다. 그네들이 와서 나를 껴안아주더라. 껴안을 사람이 없어서 그랬단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이거구나, 바로 이거구나’했다. YS가 왜 재평가를 받는지,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느꼈다.”

-기억에 남는 YS와의 에피소드가 있나.

“내가 대통령의 영어통역을 도맡았다. 그래서 90여명이상의 해외 정상들의 통역을 하고, 15회 이상의 해외 순방을 수행하며 외교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중 미국에 갔을 때다. YS는 클린턴을 아주 좋아했다. 제2의 케네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YS는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케네디를 꼽으며 상도동 자택에 케네디 두상을 두기도 했다). 그래서 클린턴을 아주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국가적 사안에 대해 결정할 땐 무조건 자신이 우선적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북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어떻게 북의 핵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같은 한반도 문제들은 문민대통령으로서 자신이 결정하고 미국 대통령과 협의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순서가 거꾸로 돼서는 안 된다고 늘 당부했다.

그래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대해 포괄적인 접근을 하자는 미국의 의견에, 철저한 접근을 하자는 의견을 꺾지 않았다. 결국 YS의 의견이 반영되어 ‘철저하고 포괄적인 접근’이라는 절충안이 됐다. 그리고 차를 타고 가면서 옆자리에 앉은 내게 ‘박 비서관 봤지? 이게 담판이야.’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 박진 전 새누리당 의원 ⓒ시사오늘

종로 불패(不敗), 김홍신·손학규를 연파하다

16대 국회에 재보궐 선거로 입성한 박 전 의원은 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이 불어 ‘야당의 무덤’으로 불렸던 17대 총선에서 인기몰이를 하던 김홍신 전 의원을 상대로 불과 0.7%p 차이로 신승한다.(박진 42.8%, 김홍신 42.1%) 이후 18대 총선에선 당시 민주당의 당 대표였던 거함 손학규 전 대표를 3.6%p 차이로 누르며 3선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을 이겨내고 승리했다.

“당시 대통령이 탄핵되자 국민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나랏님을 모시던 시절처럼,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리려 한다, 마치 반역과 같은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한나라당은 국민들에게 외면당하고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 때가 바로 천막당사 시절이다. 김홍신 전 의원은 전국구로 한나라당에 같이 있던 분이다. 그런데 당을 바꾸고, 서초쯤에서나 나올 줄 알았던 분이 갑자기 한강을 건너 종로로 왔다. 김 전 의원은 당시 소외되고 사회에서 차별받는 계층에 대한 소설인 <인간시장>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며 인기가 높았다. 나와의 격차도 처음에는 아주 컸다. 차츰 차츰 좁혀나가서, 결국엔 당일에 뒤집어진거다(실제 당시 선거 출구조사에선 김 전 의원이 이기는 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불과 588표 차이였다.”

김 전 의원은 당시 선거 도중 투병 중이던 아내를 잃는다. 상대 후보였던 박 전 의원은 ‘마음이 불편해서 혼자 나가서 유세를 할 수 가 없다’며 빈소를 찾았다. 딱히 건넬 말이 없어 밤중까지 그냥 앉아있던 박 전 의원에게, 김 전 의원은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박진 후보에게 인사해라. 아빠와 선거에서 맞대결을 하는 분인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이렇게 문상을 오셨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박 전 의원은 더욱 자리를 떠날 수 없어 오래도록 빈소를 지켰다는 일화가 있다.

-김홍신 전 의원과의 대결과 지금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의 경선을 보면 비슷한 느낌이 든다. 두 사람 다 대중적 인기는 높았지만 종로 출신은 아니라는 점이다.

“김홍신 때도 그랬고, 손학규 때도 그랬다. 한 사람은 전국구였고 한 사람은 광명에서 입문해서 다른 곳으로 온 거다. ‘정치 1번지’라는 간판에 이끌린 거물들이 종로에 나타났다. 이들의 지지율은 처음엔 확 오른다. 초기 충격파라고 할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거품은 빠진다. 종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야심의 디딤돌로 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종로 태생의 토박이 국회의원이 있는 곳에 외지인이 와서 잘 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름값 올리려고 들어왔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불신은 종로에 뿌리 깊게 확산됐다. 손학규도 늘 잠재적 대권후보로 언급됐던 사람인데 처음 왔을 때 충격파가 얼마나 엄청났겠나. 그러나 결국 내게 패했다. 종로에 뼈를 묻을 생각으로 스쿠터를 타고 나가 바닥을 훑고, 고향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 지역에 집중하는 사람을 종로는 선택했다.”

-오 전 시장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묻고 싶다. 오 전 시장은 사실 서울시장에서 물러나는 과정에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강행하여 서울시민에게나 새누리당에 과(過)를 끼치지 않았나.

“당시엔 나도 현역이었고, 홍준표 대표를 비롯해 모두가 반대했다. 아이들 밥 먹는 문제 아닌가. 물론 무상급식에 따른 재정건전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오 전 시장은 아이들 밥 먹는 문제를 가지고 시민들에게 일종의 압박을 한 것 아니냐. 시민들의 혈세를 가지고 ‘무상급식을 원합니까, 오세훈을 원합니까’라고 억지로 들이댄 것과 다름없다. 결국 투표함 뚜껑도 열지 못했고 서울시를 야당에 가져다 바친 셈이 됐다. 당 안팎의 반대를 다 뿌리치고 시장직을 거는 독단적인 결정을 했다. 결국 박원순이나 안철수와 같은 인물이 나오게 한 장본인도 오 전 시장이다. 책임을 뼈저리게 통감해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반성도 사과도 없었다.”

-이번 총선과 관련, 앞서 있었던 두 사람 간 조율에 대해 들려달라.

“오 전 시장이 종로 이야기를 하기에 작년에 두세 번 만났다. 내가 처음에는 조언을 했다. ‘동생, 잘 생각해 보게. 지난 사퇴로 서울시를 뺏긴 건 당에 엄청난 피해를 준 거 아닌가. 안철수도 결국 그렇게 등장했으니 차라리 안철수와 붙으면 명분이 있지 않겠나. 왜 뒷문으로 종로에 들어오려 하나’라고 물었다. 그렇지만 안철수와 붙는 건 싫다고 하더라. 그래서 ‘차라리 강남으로 가는 건 어떠냐’고 했더니 오히려 ‘형이 강남으로 가시오’라고 받았다.

나는 ‘난 강남스타일이 아니다. 자네가 강남스타일이지. 나는 강북 우파다. 내가 종로를 떠날 가능성은 제로(0)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비례대표로 나가거나 백의종군(白衣從軍)해서 어려운 처지의 동료 후보들 찾아다니며 도와라. 그렇다면 당으로서도 도움을 받는 셈이고 사람들이 오세훈을 얼마나 좋게 보겠나. 정치를 하다 보면 배지나 타이틀 없이도 많은 것을 얻는 순간이 온다. 동생이 의지만 있으면 되는 일‘이라고 마지막으로 설득했다. 그것마저 거절했다. 그리고 바통은 당과 김무성 대표에게 넘어갔다.”

-김 대표가 오 전 시장에게 종로에 나가라고 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물론이다. 당에선 안대희 전 대법관이나 오 전시장을 강북벨트나 다른 곳에 배치를 하며, 종로의 박진을 비롯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바람을 일으키면 판도를 아예 확 바꿀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오 전 시장이 당의 판단에 따르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종로 출마 기자회견을 했다. 다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경악했다.”

-박 전 의원은 과거 오 전 시장을 도와주기도 했던 것으로 안다.

“서울시장 선거를 준비하던 때다. 서울 25구를 두 바퀴나 돌며 선거를 준비했다. 그런데 연로하신 아버님이 등산을 가셨다가 다치셔서 전신마취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 사경을 헤매시게 됐다. 그래서 여러모로 심란하던 차에 오 전 시장이 도움을 요청해서 선거를 포기하고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참 정치가 비정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도의를 지켜가며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고 착잡하다.”

박 전 의원은 사실 부친의 부상에 앞서 오 전 시장에게 러닝메이트 제안을 했다. 외교 및 국제적 감각이 뛰어난 박 전 시장이 시장을 맡아 국제도시 서울의 그림을 그리고, 오 전 시장은 부시장을 맡아 서울의 행정적인 부분을 비롯한 부분들을 담당, 서로 시너지를 내자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오 전 시장이 이를 거절하며 오히려 일주일 뒤 부친의 병수발중인 박 전 의원을 찾아 ‘형님 절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의원은 준비해둔 정책공약집을 모두 내주는 등 오 전 시장을 전폭 지원, 당선에 일조한다.

-오 전 시장에게 배신감이 많이 들듯 하다.

“개의치 않으려 한다. 본인의 판단이니까, 어떤 결과가 나와도 본인의 몫일 것이다. 오히려 이번에 종로를 주요 격전지로 만들어 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4선을 하려면 사선을 넘어야 한다지 않나. 그런 각오다. 나는 지난 재선, 3선을 거치며 종로 주민들을 더 신뢰하게 됐다. 나는 종로를 거쳐 가겠다며 나선 잠재적 대권주자를 상대해서 이겼다. 종로 주민들은 그런 후보에게 높은 점수를 안 주고, 종로가 키웠고 오직 지역을 생각하는 내게 높은 점수를 주셨다. 이번에도 박진을 선택 하실 거라 확신한다.”

▲ 박진 전 새누리당 의원 ⓒ시사오늘

해야 할 일이 많은 종로, 정치하기 딱 좋은 나이

-종로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도전하는 것 아닌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우선 종로의 경제가 살아야 한다. 대기업, 금융기업의 본사가 몇 개 있지만 기본적으로 종로는 소상공인들과 영세 자영업자들이 대부분이다. 나라에서 이들을 지원하고 이들이 살아나야 종로의 경제가 살아난다. 그런데 종로는 서울의 중심이라 100만에 달하는 유동인구를 소화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여기에 다섯 개 궁궐과 정부종합청사 등이 모두 비과세 대상이라 지방세가 안 들어온다. 이런 핸디캡들을 극복하기 위해 종로를 아예 특별구로 만들어야 한다.

보다 늘어난 지원을 통해 서울의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를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론 교통이다. 3호선이 경복궁역까진 들어오지만 세검정, 평창 쪽은 어렵다. 신분당선을 세검정까지 끌어오면 해결이 가능하다. 분당에서 평창동까지 25분에 도착할 수 있다. 강북-남을 잇는 대동맥이 뚫리는 셈이다. 종로 경제에도 이바지하고, 종로의 문화적·자연적 유산들을 다른 지역 분들이 쉽게 즐길 수 있게 된다. 포스코건설이 제안해 와서 지금 진행 중인 사업이다.”

 “종로 특별구를 제안한다”

“또한 상업적 환경의 개선도 중요하다. 전통재래시장을 살리려면 주차장 등을 확보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어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광장 시장에선 배냇저고리부터 돌아가신 분에게 입힐 수의까지,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은 호텔에서 자지만 전통시장에 가서 김밥, 빈대떡, 곱창 등을 사먹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도록 판을 펴 주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종로의 주얼리 산업, 봉제 산업도 엄청난 잠재력을 지녔다. 1500개 공방과 2500개 판매업체가 있다. 여기서 나오는 귀금속과 보석들은 혼수용으로도 사가시지만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사 간다. 주얼리 산업 관련해서 내가 1500억의 예산을 확보했었는데,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무산됐다(우연히도 당시 바뀐 시장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다).”

-19대 불출마를 선언하고 공백기가 있었다. 그 시간은 어떻게 보냈는지.

“16대부터 18대까지 국회의원을 10년 했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10년 했으면 정치적 방학이 필요하고,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진의원으로 있으면서 혹시 생겼을지도 모를 편견이나 기득권의 시각을 완전히 내려놓고, 의원 배지를 뗀 채 잠시 시민의 입장으로 돌아가 초심을 찾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치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다. 한국외대 석좌교수를 하며 청년들의 이야기를 많이 경청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영국의 싱크탱크들을 찾아다니며 18번의 인터뷰를 했다.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걸 책으로 묶어 냈는데, 이것도 국회의원을 쉬지 않고 했으면 나오지 못했을 결과물이다. 또한 종로를 자전거로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귀중한 시간들이었다. 이제 공부하고 느낀 것들을 토대로 다시 정치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병신년(丙申年)생이니 지금 육십 세다. 인생의 한 사이클을 돌았다. 정치하기 딱 좋은 나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4년간 공부하고 충전했는데 이제는 정말 내가 태어난 종로를 위해 모든 걸 바쳐서 몸을 던지고 싶다. 종로를 위해 일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

-굳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이유가 있나.

“종로는 강남과 다르다. 자동차용 대로보다 좁지만 정겨운 골목들이 많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그런 골목들 말이다. 그런 곳을 유세용 트럭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 봐라. 벽은 긁히고, 앞뒤로 길은 막힐 거고, 전신주라도 건드리면 집 여러 채가 정전이 된다. 지역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이 유세하러 가다가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않나, 하하하.”

-국회에 돌아가면 하고 싶은 개혁이 있나.

“국회가 보다 선진국형으로 변모해야 한다. 지금은 중앙당사가 있고, 원내사령탑이 있어서 두 개로 나뉘어있는 셈이다. 이 ‘투 톱 시스템’이 잘 움직이면 좋은데 둘 사이의 의견이 다르거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입장이 다르면 당이 마치 분열된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 점점 원내정당, 정책정당으로 가는 과정에서 통합이 이뤄져야 한다. 또한 나는 개인적으로 개헌론자다. 개헌의 시기가 오면, 대통령 중임제를 시도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미있는 개혁을 하기엔 짧은 5년이라는 시간, 국민들에게 중간평가의 기회가 없다는 점 등 단임제의 문제점은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질 것이다.

만약 중임제 개헌이 이뤄진다면 이와 함께 중선거구제로의 전환도 검토할 때가 됐다. 지역주의의 고착과 지역 간 갈등보다는 국가적으로도 통합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 일들을 하는데 일정 역할을 하고 싶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 선진정치학을 공부하고, 그들의 정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봤기 때문에 앞장 서고 싶은 마음이다.”

▲ 박진 전 새누리당 의원 ⓒ시사오늘

北核 뻔한 공식 반복…원칙과 유연성으로 풀어야

-최근 북핵문제를 외교전문가의 관점에선 어떻게 보고 있는지.

“북핵 문제는 내가 청와대비서관으로 있던 시절, 1993년 3월 북한이 NPT(핵확산 금지조약)을 탈퇴하면서 시작됐다. 20년 넘게 계속돼온 공식이 있다. 벼랑끝 전술을 펴며 안보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러면 국제사회의 압박과 제재가 들어간다. 한동안 지나면 유화론이 나오며 지원을 해주고, 달래고 얼러서 협상 테이블에 나온다. 대화가 진행되는 것 같으면 다시 원점인 벼랑끝 전술로 돌아가는 공식이다. 북한문제를 푸는 데 중요한건 원칙과 유연성이다.

YS가 이야기했던 북한에 대한 철저한 원칙은, 핵실험을 하거나 미사일을 발사하게 되면 특별사찰 등의 조치를 통해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을 막는 것을 우선시한다. 그 다음에야 지원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흔들리지 않는 대북정책의 원칙을 지켜나가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성 있는 대처를 할 수 있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어차피 북핵은 우리가 관리해야할 대상이고 통일의 상대방이다.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은 다른 차원에서 대처하고, 북으로 하여금 무모한 핵개발이나 도발을 할 수 없도록 압박과 대화를 적절히 분배해 위기관리를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

-끝으로 정치적 좌우명을 들려준다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일은 사람이 꾸미되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사람이 할 도리를 다 한 후에 기다리면 하늘이 응당한 결과를 내릴 것이라 믿는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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