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정치권의 '이색' 계파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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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정치권의 '이색' 계파정치
  • 오지혜 기자
  • 승인 2016.01.28 17: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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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탈당' 종용한 이회창, '원조친노'의 새누리당行 조경태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오지혜 기자)

총선을 2개월 남짓 남겨둔 가운데, 새누리당에서는 '진박 마케팅'이 과열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콘크리트 지지기반인 대구에서는 전직 청와대 참모 6인이 '진박 연대'를 꾸렸다. 원내에서는 진박과 비박간 날선 공방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국내 정치문화에서 '노선'은 핵심이다. 선택지에 따라 정치적 정체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념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노선도 포함된다. 인(人)적 노선이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함께' 목소리를 내줄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세(勢)가 곧 정치력'이라는 말은 이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인적노선, 쉽게 말해 '계파'는 보통 거물급 정치인이 기준이 된다. '친박(朴)' '친이(李)' '친노(盧)' 모두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딴 계파정치의 예다. 이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정치문화로 그전에는 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을 중심으로 한 '상도동계'와 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이끈 '동교동계'가 있었다.

계파적 정치구조 속에서는 중심 인물에 따라 움직이는 까닭에 일관된 정치행보를 보인다. 그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진박 마케팅'처럼 충성도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반면, 사랑을 받아도 돌려주지 못하고 사랑을 줘도 돌려받지 못해 계파를 떠난 정치인들도 있다. <시사오늘>은 이같은 계파정치의 이색 사례를 살펴봤다. 

"허수아비 안 한다"…'YS 탈당'까지 요구한 이회창

▲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YS빈소를 찾았다. ⓒ 뉴시스

30년간 법조인으로 있던 '대쪽 판사'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이 전 총재는 1993년 출범한 문민정부의 초대 감사원장에 등용됐다.

그는 불과 10개월도 채 안 되는 짧은 재임기간 동안 율곡사업, 평화의 댐 감사 등을 통해 '역대 최고의 감사원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그해 12월 국무총리로 발탁되는 발판이 됐다.

당시 임명직 총리는 정권의 '얼굴마담'이나 '방탄조끼' 역할을 수행하는 게 보통이었으나 이 전 총재는 자신의 법적 권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하면서 YS와 수시로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이 전 총재는 취임 127일만에 사표를 냈다. YS는 배려 차원에서 해임이 아닌 사표로 이를 처리했다. 또한 15대 총선을 앞두고 YS는 이 전 총재를 신한국당에 다시 불러들였다. 

이 전 총재는 15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최측근인 황우여 의원 공천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1997년에는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했다. 감정이 봉합된 것처럼 보였던 둘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게 된 것은 이 전 총재가 대선에 도전하면서다.

신한국당 내부에서 많은 지지를 얻으며 최종 대선후보로 우뚝 선 이 전 총재는 당시 경쟁 상대였던 김대중 후보와 '비자금 공방'을 치뤘다. 그는 김 후보의 비자금 수사를 강력히 주장하지만 검찰은 수사시기를 대선 이후로 유보했다.

국면전환이 필요했던 이 전 총재는 YS 탈당을 주장했다. YS 입장에서는 호의가 배신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YS는 1997년 정권 말기에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이때의 앙금이 남은 탓에 YS는 다음 대선에서도 이 전 총재를 끝까지 지지하지 않았다.

뒤늦게 손을 내민 것은 이 전 총재였다. 그는 지난 11월 YS 빈소를 찾아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글귀를 남겼다. '물을 마시면서 물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YS가 민주화에 남긴 업적을 기리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랑한만큼 사랑받지 못한 결말'…새누리당 입당한 '원조 친노' 조경태

▲ 더불어민주당을 탈당, 새누리당에 입당한 조경태 의원 ⓒ 뉴시스

조경태 의원이 지난 21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지 이틀 만에 새누리당에 입당해 정치권이 들썩였다. 조 의원의 '새누리당 이적'이 유독 놀라운 것은 평소 그가 '원조 친노'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조 의원은 '지역주의 타파'를 외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영감을 받아 정치계에 입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13대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했을 당시 조 의원은 부산대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불법선거감시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노 후보를 지지했다.

노 후보의 당선으로 큰 감동을 받은 조 의원은 1996년 민주당 후보로 15대 총선에 도전했다. 당시 노 후보처럼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며 부산 사하갑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조 의원의 '친노' 정치행보는 더욱 선명해졌다. 

그는 1998년 당시 노무현 후보의 종로구 보궐선거를 도왔고, 이를 계기로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 후보의 정책보좌역을 맡았다. 대통령 당선 이후 치러진 17대 총선에서야 조 의원은 마침내 첫 뱃지를 달았는데, 노 전 대통령이 주변에 '조경태 학습법'을 직접 추천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던 조 의원과 친노 계파가 갈등을 빚게 된 것은 대선 이후 '이상한 조짐'이 시작되면서부터다.

그는 본인의 저서 <지역주의는 없다>에서 "약간 이상의 조짐이 느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론에 당선시킨 주역들과 고생한 사람들, 그리고 측근들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내 이름은 거의 빠지는 때가 많았다"고 밝혔다.

이어 "애써 침착하려고 했지만 결국 토사구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마음이 아프기 시작했다. 참 열심히 싸웠는데 결국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는 말처럼 그렇게 돼버렸다"며 착잡해 했다. 신의를 다한 계파에서 배신당했다고 느낀 것이다.

조 의원은 이후 '배신의 조짐'을 눈으로 확인했다. 2010년 치러진 민주당 부산시당위원장 경선이었다. 손학규계와 정세균계(범친노계)가 각각 조 의원과 최인호 전 청와대 부대변인측으로 나뉘어 맞붙었고 결국 조 의원은 이 경선에서 졌다.

원외 인사에, 입당한지 며칠도 안된 새내기 정치인에 현역의원이 패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조 의원이 이처럼 질래야 질 수 없는 경선에서 패한 것은 '친노계의 외면' 때문이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사랑한 만큼 사랑받지 못한' 조 의원의 결론은 새누리당이었다. 새누리당은 노무현 정권 당시 탄핵사태를 일으킨 중심축이었다는 점에서 '친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은 행보로 풀이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친노'의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 조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해 훌륭한 정치인들이 항상 주장하는 것이 통합의 정치"라면서 "동서를 화합시키고, 국민을 통합시킬 수 있는 그런 보다 큰 틀의 통합의 정치를 실현시키고 싶다"고 입당의 변을 밝혔다. '사랑하기 위해 떠난다'는 조 의원의 '애증 정치'가 성공할지는 앞으로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本立道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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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원님 2016-01-29 12:16:40
8395 "동서를 화합시키고 국민을 통합시킬 수 있는 통합의 정치를 실현"시켜주세요. 수 백년 동안 당파싸움하면 결국 등 터지는 새우가 백성이고 국민이었습니다. 특히 계파정치의 폐해를 없애는 신호탄! 촉매제!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의원님의 희생은 역사에 기록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