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통합과 화합' 정신과 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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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통합과 화합' 정신과 남북관계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6.02.17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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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물밑 작업으로 1차 핵위기 진화시킨 김영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 고 김영삼 전 대통령(YS) ⓒ 시사오늘

정부의 대북강경책 천명으로 온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다. 국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고, 경제 산업계는 직격타를 맞았다. 여기에 사드 배치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지역 갈등까지 되살아나는 눈치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은 이를 수습하기 위한 노력은커녕, 20대 총선 목전에 터진 안보 이슈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연구에만 힘쓰고 있다.

정부여당은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햇볕정책에서 북한의 핵도발이 기인했다고 주장하면서 핵무장론을 제기하고 있다. 반면, 야권은 개성공단 폐쇄의 궁극적 원인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대북정책 실패에 있다며 차기 총선에 영향을 주기 위해 북풍을 일으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보이고 있다.

이번 사태를 해소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 의논하고, 초당적 힘을 모아야 할 정치권이 서로 힐난하고 지적하기만 바쁜 모양새다.

기자는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정치권이 YS(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의 대북정책은 여당이 비난하는 DJ·노무현의 햇볕정책도, 야당이 지적하는 이명박·박근혜의 강경책도 아니었다. 또한 그는 안보 이슈를 선거에 이용하려 들지도 않았다.

YS는 그의 유언와 같이 오직 우리 민족의 통합과 화합, 평화 통일만을 바라보고 대북정책을 펼쳐나갔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

군부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국제 정세가 탈냉전 기류로 전환된 데다, 민주 투사 YS는 대북관계를 기득권 유지에 악용했던 독재자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가 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YS는 1993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며 북한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은 YS의 취임사를 읽고 주변에 감동을 감추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또한 집권 초기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송환', '진보학자 한완상 통일부총리 임명' 등으로 북한을 어르고 달랬다.

이처럼 문민정부는 친민족적, 평화지향적인 대북유화정책을 펼치려 노력했다.

하지만 대내외 사정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급기야 한반도 정세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1993년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1994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 선언으로 한반도에는 긴장감이 고조됐다.

북한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겁박했고, 미국은 북한 핵시설을 선제 폭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공언했다.

미 페리 국방장관의 북한 영변 지역 '외과수술(Surgical strike)' 공격 계획이 공개되자, 우리 국민들은 주요 식료품과 연료들을 '사재기'하는 등 심각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북핵 위기감이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국내 여론도 북한 비난 일색으로 급변했다. 특히 YS를 지지해야 할 여권에서조차 문민정부의 대북유화정책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는 3당합당으로 민정계와 손을 잡고 탄생한 정권의 태생적 한계였다. '김일성 조문 파문'이 대표적인 예다.

국내외 상황이 이렇다보니 YS도 대북강경기조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혹자들은 YS가 대북유화정책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고 강경책을 펼쳤음을 들어 '일관된 정책을 실시하지 못했다'며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을 실패했다고 규정한다.

기자는 이들의 주장이 YS의 물밑 작업으로 '미·북 제네바 합의'가 성사됐음을 모르고 있거나, 묵과하고 있는 것과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YS는 표면적으로 대북강경기조로 돌아선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여론에 휘둘릴 여지를 남기지 않고 몰래 북한에 손을 내밀었다.

북한 방문 전 YS 찾은 지미 카터, 왜?

1994년 6월 15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중재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가졌다. 그 결과, 미국과 북한은 같은 해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핵 동결', '경수로 건설' 등의 내용이 담긴 합의를 이뤘다. 북핵 위기가 일단 진화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호사가들이 으레 알고 있는 미·북 제네바 합의 도달 과정이다. 하지만 카터 전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 전에 청와대를 들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YS는 <시사오늘>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은 비화를 공개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하기 하루 전날 YS에게 연락해 "평양에서 이틀을 자는데 서울에서 먼저 하루 자고 싶다. 부인과 함께 갈 테니 청와대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다음날 청와대 회동 자리에서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한에 가면 김일성을 두 번 정도 직접 만날 것 같다"며 김일성 주석에게 보낼 메시지에 대해 YS와 함께 의논했다고 한다.

북한에 다녀온 카터 전 대통령은 다시 청와대를 찾았고 YS에게 김일성 주석의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했다.

"김영삼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제발 김영삼을 만나게 해 달라."

김일성 주석이 먼저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YS와 김일성 주석의 역사적 만남은 그해 7월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만약 두 사람의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와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그 이상의 감동이 있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YS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평양행 2주 전에 김일성이 죽었다. 그 나이에 김일성이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마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남북관계가 상당히 진전됐을 것이다"라며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YS의 이 같은 물밑 노력은 결국 미완의 성공에 그쳤다.

1994년 이부영의 김일성 조문 파문, 1996년 북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97년 황장엽 노동당 비서 망명으로 남북관계가 어그러진 것이다. 또한 미·북 제네바 합의 역시 북한 협조 거부, 미국의 공화당 강세 등이 얽히면서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고, 급기야 2002년 DJ 정권 때 제2차 핵위기가 발발하면서 합의문은 종이 쪼가리가 돼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핵동결을 이뤄내 한반도에 드리운 전운을 거둬내고, 북한의 추가 핵개발을 억제한 점, 국내 반발 여론을 건드리지 않고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점 등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재평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게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YS는 1994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남과 북은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교류협력을 증진키시고 제도화한다 △1민족 1체제 1정부의 통일국가를 완성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 같은 YS표 통일방안은 DJ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로 계승·발전됐다.

대북 사안,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해선 안 돼

하지만 문민정부 이후 네 차례 정권이 바뀌면서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은 점차 권력자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 악용되고 있는 눈치다. '북풍'이라는 표현이 선거철마다 각종 신문과 인터넷에 도배된다. 북한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유력 정치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말로는 '통일'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바쁜 모양새다. 또 하나의 '동족상잔'의 비극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YS가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통합과 화합이었다. 이는 문민정부가 추구한 대북정책과도 일맥상통한다.

YS는 <시사오늘>과 한 인터뷰에서 김일성 주석과의 남북정상회담 불발에 대해 "지금의 북핵 문제가 종식되고 한민족이 통합과 화합의 길로 손잡고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이번 사안은 햇볕정책, 대북강경책을 운운하면서 정치공학적으로 봐선 결코 안 되는 문제다. 지금은 민족의 통합과 화합, 통일국가 완성이라는 YS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정치권이 하나로 힘을 합쳐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할 때다.

한반도에 통합과 화합의 시대가 하루 빨리 도래하길 기원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의 전향적인 모습을 기대해 본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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