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①]“王이 되고 싶은자, 내 손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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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①]“王이 되고 싶은자, 내 손 잡아라”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6.02.25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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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 시작을 알린 시대 풍운아…JP와 허주
권좌를 가져온 가신들…DR과 최형우, 그리고 후농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왕은 만들어진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국가의 통수권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손끝에서 결정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그 과정에선 치열한 정치적 전투가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마지막 승리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을 왕으로 만들어낸 핵심 인물, 바로 ‘킹 메이커’의 존재다. 격동의 한국 현대정치사 속 ‘킹메이커’들을 <시사오늘>이 정리했다.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왕이 되고 싶은 자, 내 손을 잡아라…1세대 킹메이커 JP와 허주(虛舟)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킹메이커로 불린다. 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 쿠데타를 주도한 후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중앙정보부장에 올랐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자 박 전 대통령의 조력자였다. 유신이전에 박 전 대통령의 3선 성공에는 JP의 지지가 있었다.

2인자였던 JP는 1987년에는 본인이 직접 왕이 되기 위해 공화당을 창당해 나섰다. 그러나 민정당 노태우, 민주당 김영삼(YS), 평민당 김대중(DJ) 후보에 이어 4위로 낙선, 고배를 마신다.

그러나 그 이후엔 JP가 미는 인물마다 승리한다. 1992년 대선에서는 고심 끝에 지지한 YS의 당선에 일조하며 킹메이커로 이름을 떨쳤다. 다음 선거인 1997년 대선에선 DJ와 함께 이른바 ‘DJP 연합’을 만들어내며 DJ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왼쪽)와 김윤환(虛舟) 전 국회의원 ⓒ시사오늘 DB

이름보다 호(號)로 유명한 허주(虛舟) 故 김윤환 전 국회의원은 JP보다도 ‘킹메이커’로는 이름이 더 높다.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YS를 빈 배에 태워 왕으로 만들었다. 이연홍 전 중앙일보 정치부장은 “허주의 정치적 상상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허주야말로 진정한 프로”라고 추켜세웠을 정도다.

허주는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정계에 입문한 뒤, 자신의 고교동창 노 전 대통령을 돕기 시작한다. 1987년엔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 성공하며 여권의 실세가 됐다.

그 다음에 배를 탄 것은 YS였다. 허주는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청와대를 찾아 “YS에게 대통령 후보를 안 줄 경우 민주계와 민정계 중 부산 경남 세력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 정권재창출은 물 건너간다. 그럴 경우 청문회를 해야 하고 우린 다 죽는다”며 노태우를 설득했다. 그러는 한편 민자당 내의 민정계 의원들을 규합, 신민주계를 형성하며 YS 대통령 만들기 선봉에 섰다.

그러나 1997년 대선서 허주가 신한국당 후보로 내세운 이회창이 DJP연합에 패한다. 1987년 대선에선 허주가 내세운 노태우가 JP에게 승리했지만, 킹메이커 대결에선 JP에게 진 셈이다. 당시 대선은 ‘DJ와 이회창 간의 대결이 아니라 진짜는 JP와 허주 간 한판승부’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그리고 허주의 정치적 시련이 시작됐다.

허주는 2000년 16대 총선에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음에도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한다. 결국 직접 민주국민당을 창당해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 이후 병을 얻었다. 정가에서는 ‘허주가 이회창의 배신으로 공천을 못 받아 화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았고, 허주는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2003년 타계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이회창이 허주를 찾았지만 두 사람은 화해하지 못했다. '다시는 오지마라'라고 전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무 말 없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말년은 씁쓸했지만 허주가 당대 제일의 킹메이커라는 데 이견을 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허주는 ‘호남이 미는 영남 후보론’을 주장하며 故 노무현 대통령 당선도 예견했다고 알려졌다. DJ의 비서실장 박지원 의원과 같이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추진했지만 어느 순간 허주는 소외됐다는 후문이다. 노 대통령은 당선됐지만 허주의 마지막 킹메이킹은 그의 손으로 매듭지어지지 못했다.

▲ 김덕룡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왼쪽)와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 ⓒ시사오늘DB

권좌를 가져온 뛰어난 가신들…DR과 최형우, 그리고 후농

한국 정치의 거대한 두 축, 영원한 라이벌 YS와 DJ는 앞서 언급한 JP나 허주의 힘을 빌기도 했지만, 이들 옆에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최측근 정치인들이 존재했다. 김덕룡(DR)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 보통 후농(後農)으로 불리는 더불어민주당 김상현 상임고문이 그들이다.

DR은 YS의 참모이자 상도동계 측근 그룹의 대명사다. 1970년 YS가 신민당 국회의원이던 시절 그의 비서로 발탁돼 정계에 입문한 뒤, 당 총재가 되자 비서실장을 도맡았다. YS가 신민당 최연소 총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뒤에는 DR의 활약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유진산이 갑작스레 대장암으로 사망하자 당내 실력자들이 너도나도 출사표를 던졌는데, YS가 가장 먼저 나서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 해 1월 세브란스에 입원한 진산의 병명이 암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내 YS에게 총재 경선에 나설 것을 건의한 사람이 바로 DR이었다.

그 이후에도 DR은 YS의 곁을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며 결국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킨다. YS의 최대 조직 민주산악회에서도 활동했다. 이후 YS의 정치적 승부수 3당합당을 주도하며 킹메이커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이후 당내 세력의 견제로 DR은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2012년 대선에선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지만 낙선한다.

DR이 정확한 분석력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유명세를 탔다면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은 YS의 돌격대장으로, 정치 최전선에서 그를 보좌하며 대통령직으로 이끌었다. 한 때 ‘좌동영 우형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YS의 최측근이었으며, YS가 당선된 이후에는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도 지목됐다.

DR과 달리 최형우는 단 한 번도 YS의 비서로 활동한 적이 없다. 때문에 YS의 가신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동지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래서 YS에게 직언도 서슴지 않았던 최형우지만, 우직하게 YS를 지지하며 결국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다. 유신정권이던 1979년 차지철 경호실장은 유기정 의원을 통해 YS를 배신하라며 야당 의원들을 포섭하고 다녔다. 최형우에게도 유 의원이 돈을 한 보따리 싸가지고 왔는데 회유가 안 되니까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이후락이 최형우를 직접 찾아간다. 이후락이 '자네 말이야 박 대통령 성질을 알아야 해.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라면서 반 협박조로 말을 건네자, 최형우는 '선배님, 저 하나 어떻게 한다고 상도동계가 무너진다고 생각합니까. 서대문 형무소에 가겠습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감옥에 가기 위해 최형우가 부인에게 솜바지와 저고리를 준비하라고 했는데, 10‧26이 터지며 아무 일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결국 YS를 왕으로 만들고, 본인도 대권 가도로 달려가던 킹메이커 최형우는 1997년 3월 갑작스럽게 뇌일혈로 쓰러져 정계를 은퇴하고 만다.

▲ 김상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시사오늘DB

후농, 더불어민주당 김상현 상임고문은 ‘DJ를 만든 게 후농’이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DJ의 최측근이다.
1969년 YS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며 DJ도 여기에 동참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DJ는 ‘강력한 유진산 체제와 싸워 승산이 있느냐, 왜 무모한 짓을 하느냐’고 거부했다. 하지만 후농의 생각은 달랐다.

그해 말 서울시청 뒤 뉴서울호텔에서 DJ와 만난 후농은 ‘40대 기수론에 동참하지 않으면 지도자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할 수 있으니 선언에 동참해야 한다’며 DJ를 설득한다. DJ가 ‘이름도 돈도 없는 내가 어떻게 나가느냐’고 하자 후농은 ‘형님, 명분만 있으면 이름도 돈도 만들 수 있습니다’라며 DJ를 설득했다.

결국 DJ는 신민당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며 유력한 정치지도자로 떠오른다.
또한 후농은 1984년엔 민추협 결성을 강력히 주장, 결국 미국에 있는 DJ 대신 의장권한대행을 맡으며 신민당의 모태를 만들었다. 1985년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을 창당할 때도 DJ는 반대했다. DJ는 아들 김홍일을 통해 후농에게 ‘만약 신당에 참여하면 절교’라며 ‘동교동계 신당 참여 불허’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후농은 이 말을 듣지 않고 YS와 함께 신민당을 만들어 신당 돌풍을 일으킨 뒤 그 공(功)을 모두 DJ에게로 돌렸다.

후농은 이러한 면에서 이상적인 킹메이커로 평가받기도 한다. 정치적 상상력과 DJ에 대한 헌신을 모두 보여준 인사가 후농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DJ에게 반감을 사고, 후농을 견제케 한다. 그 결과 후농은 DJ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국민의 정부에서 변변한 직책을 맡지 못했다. 6선 의원에 정계 제일의 마당발이라는 후농은 오랜 정치구력과 혁혁한 전과(戰果)에도 당대표, 원내총무(원내대표)는 물론 사무총장조차 맡은 적이 없다. 지금은 정계에서 한 발 물러나 조용한 말년을 보내는 중이다.

새로운 물결이 온다…三金시대 이후의 킹메이커들

‘삼김시대’로 불렸던 정치판의 한 세대가 흐르고, 새로운 킹메이커들이 등판을 대기 중이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만든 ‘왕의 남자’ 이재오 의원이나 ‘노무현의 양날개’,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는 이미 킹메이커 계보에 이름을 올렸다. 대권 후보군으로 분류되는 잠룡들인 김무성,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원희룡 등의 멘토, 비서, 동료 정치인이 새로운 왕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뛰고 있다. 다음 왕을 만드는 이는 누구일까.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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