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계의 초라한 퇴장…花無十日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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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계의 초라한 퇴장…花無十日紅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6.03.02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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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발굴·육성 게을리한 '미필적 고의', 그리고 지역주의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 권노갑 전 상임고문 등 동교동계 인사들이 DJ(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 뉴시스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동교동계의 끝이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을 집단 탈당하면서 정국의 핵으로 부상할 것 같았던 동교동계의 존재감이 최근 크게 위축된 눈치다. '혁신'과 '물갈이'의 홍수 속에서 구태 정치의 표본으로 전락해 버렸다. 야권 분열을 부추겼다는 불명예까지 얻게 됐다.

20대 총선 예비후보 명단에서는 동교동계 인사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경기 부천 원미을)만이 외로이 이름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무소속 박지원 의원을 '동교동계의 좌상(좌의정)'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박 의원이 1987년 6월 항쟁이 막을 내린 뒤에야 미국에서 귀국해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점, DJ의 병세 악화 이후 권노갑 등 동교동계 사람들과 각을 세운 점 등을 감안하면 그를 정통 동교동계로 분류하긴 어렵다는 게 지배적인 견해다.

무자비한 군부 독재 시절 서울 마포 동교동 1층짜리 단독 주택에서 민주투사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정권교체에 성공해 국민의정부에서 당정을 아우르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2000년 정풍운동-2003년 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 사태-2004년 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을 겪으며 날개 없이 추락하던, 그 모든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동교동계가 역사의 뒤안길로 초라하게 퇴장하고 있다.

"동교동계, 古根 정리하지 않아 맥 끊긴 것"

동교동계가 몰락한 근본적인 원인은 인재풀의 부재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정치권에서는 동교동계의 맥을 잇는 젊은 정치인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권노갑·한화갑·김옥두·최재승·윤철상·이협·이훈평·한광옥 등 과거 맹위를 떨쳤던 동교동계 1~2세대가 인재 발굴·양성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동교동계 1~2세대의 '미필적 고의'였다는 게 중론이다. 3~4세대가 제대로 성장하고 있지 않음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 고의적으로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주 <시사오늘>과 만난 동교동계의 한 원로 인사는 "계파는 다육식물과 닮았다. '고주(古根, 오래된 뿌리)'를 제때 정리해 주지 않으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교동계의 줄기가 끊긴 이유"라고 했다.

'오래된 뿌리'를 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새싹'을 짓밟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DJ는 잠재력을 가진 인물들을 짓밟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손주항 전 의원과 후농(後農) 김상현 전 의원이 대표적인 예다.

'옥중당선'이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는 손 전 의원은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 출사표를 던지려 했으나 DJ가 이를 가로막았다고 주장한다.

손 전 의원은 2008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DJ는 장래성 있는 사람을 키우지 않는다. 커 올라오는 게 싫은 거야. 자기보다 클 수 있는 정치인은 아예 싹을 잘라버리는 거지"라고 말했다.

한때 DJ의 최측근이었던 후농은 15대 대선 때 아무 절차 없이 DJ를 후보로 추대하려는 동교동계의 움직임에 "나라도 이기고 가야 한다. 여론이 좋지 않은데 이런 식으로 추대하면 DJ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없다"며 반발했다.

결국 DJ의 반감을 산 후농은 16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또한 국민의정부에서도 변변한 직책을 맡지 못했다.

이에 대해 후농은 2014년 본지와 한 인터뷰에서 "동교동계는 개별적으로 친하지만 조직적인 모임이 없다. 상도동계와 큰 차이인데, 아마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는 후계자를 많이 기른 편이어서 후계자들이 현실 정치권에 생존해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동교동계와 함께 한국 정치권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던 상도동계의 후예들은 현실 정치권을 주름 잡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김문수 전 경기지사, 손학규 전 대표 등은 모두 상도동계의 요람에서 나온 인사들이다.

"지역주의의 높은 벽, 끝내 깨지 못해"

동교동계가 몰락한 데에는 외부적인 요인이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호남에 기반을 둔 계파라는 태생적 한계를 결국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군사 독재 정권의 억압 속에서 호남 주민들은 고향이 호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차별을 겪어야 했다. DJ는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호남 차별을 깨기 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 행보를 보였다.

1971년은 지역주의를 처음으로 정치권에서 이용했던 해다. 그해 열린 7대 대선에서 영남 후보 박정희와 호남 후보 DJ가 지역 차별적 전략을 수립해 승리를 노린 것이다.

선거 결과는 박정희의 근소한 승리. 하지만, 호남에서는 DJ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 선거 이후 DJ는 호남의 상징으로 부상했고, 1973년 납치사건을 계기로 호남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박정희 사후, 호남은 '영웅'을 내세워 영남 편향적인 정치·경제 질서의 재편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1980년 DJ가 체포되면서 '호남 차별 타파', '정치·경제 질서의 재편'에 대한 호남의 '열망'은 '한'으로 승화됐다. 이 같은 호남의 '한'은 그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투영됐다.

호남의 한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이후에도 풀리지 않았다. 되레 그해 겨울 대선에서 '빨갱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노태우, 김종필 등 여권 진영(민정당·공화당)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데올로기 프레임을 건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를 파악한 DJ는 YS와의 단일화 논의를 끊고 '4자필승론'을 앞세워 승리를 노렸다. 호남에서는 자신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테니, 수도권에서만 일정 표를 얻는다면 'TK(대구경북)의 노태우', 'PK(부산경남)의 YS'를 충분히 누를 수 있다는, 다분히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계산이었다. 이 선거는 노태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1992년 대선에서도 호남과 DJ는 승리를 맛보지 못했다. 3당합당을 단행한 YS가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때려잡는 쾌거를 거두면서 DJ를 큰 차이로 제친 것이다. DJ는 호남에서 90.9%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보였지만 패배해 급기야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97년 대선은 호남과 DJ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노령의 DJ의 마지막 도전이었으나, 상대 후보 이회창의 지역 연고가 영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DJ는 이회창을 1.5% 차이로 간신히 눌렀다. 호남에서 92.9%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면, JP(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충청표를 몰고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IMF 경제 위기가 없었다면 목도할 수 없는 결과였다.

정권교체라는 힘겨운 산을 넘었지만 DJ와 그를 위시한 동교동계 앞에는 정권재창출이라는 더 거대한 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남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걸 역대 대선에서 직접 체감했던 이들은, 결국 영남 출신의 노무현을 대선 후보로 점지해야 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후 동교동계는 '굴러온 돌' 친노(친노무현)계와 끊임없이 갈등했고 충돌했다. 결과는 친노의 압승이었다. 오늘날 야권의 차기 대권 주자 가운데 호남 출신 인물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그 방증이다.

이에 대해 앞서 동교동계의 한 원로 인사는 "결국 지역주의라는 높은 벽을 깨지 못했기 때문에 동교동계가 이 지경이 된 것 같다. 지역주의를 타파한다면서 오히려 지역주의를 이용한 측면도 있었다"며 "DJ 정도가 아니면 호남 출신 정치인은 대망을 이룰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 우리가 과도하게 신경 쓴 부분도 없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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