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과 카를루스 케이로스]1인자가 되지 못한 2인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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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과 카를루스 케이로스]1인자가 되지 못한 2인자들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6.03.06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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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로 풀어본 정치인(11)>‘영원한 2인자’ 김종필과 ‘최고의 수석코치’ 카를루스 케이로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정치는 축구와 비슷하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겨뤄야 하고, 승자와 패자도 생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비슷한 점은, ‘사람’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축구 팬들은 잔디 위에서 뛰는 ‘사람’에게 멋진 플레이를 기대하고, 국민들은 정치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희망을 투영하고 미래를 건다. 다른 듯 닮은 정치계와 축구계의 ‘사람’을 비교해 본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카를루스 케이로스 이란 대표팀 감독은 제1권력자의 브레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오른팔’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기회를 얻었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1인자로 우뚝 서는 데는 실패하면서, 영원한 2인자로 역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 김종필 전 국무총리 ⓒ 뉴시스

화려했던 2인자 시절

김 전 총리는 5·16 군사 정변의 주역이었다. 1960년, ‘항명 파동’에 연루돼 강제 예편당한 그는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교류하면서 5·16 군사 정변 준비와 실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뒤에는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 한·일 협정을 비롯한 국가 중대사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박 전 대통령이 5·16 군사 정변으로 비난을 받자 “내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5·16을 기획했다”며 방패막이로 나서기도 했던 김 전 총리는 명실상부한 박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다.

김 전 총리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한 박 전 대통령이 견제를 시작하자, 그는 당원직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떠나는 영리한 행보로 의심을 불식시켰다. 이후 3선 개헌과 10월 유신에 협조하며 정계에 복귀, 다시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회복했다. 정확한 상황 판단과 행동력을 갖춘 ‘최고의 2인자’다운 모습이었다.

케이로스 감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황금기를 이끈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의 ‘브레인’이었다.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로이 킨, 라이언 긱스 등 유스 출신의 선수들로 대성공을 이끌었던 퍼거슨 전 감독은 이들의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주제 무리뉴 감독이 부임한 첼시가 2년 연속 프리미어리그를 제패, 퍼거슨 전 감독의 ‘한계론’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케이로스 감독이 이른바 ‘대륙식 축구’ 도입을 건의하며 맨유의 체질 개선에 앞장섰다. 이때부터 맨유는 전통적인 4-4-2 포메이션을 버리고 4-3-3 포메이션으로 변화하며 다양한 혁신을 시도했고, 최종적으로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노 호날두, 카를로스 테베즈, 박지성으로 이어지는 ‘폭탄 역습 축구’를 완성시키며 다시 한 번 전성기를 열어젖혔다. 

▲ 카를루스 케이로스 이란 대표팀 감독 ⓒ 뉴시스

끝내 1인자가 되지 못한 2인자들

유신 붕괴 이후 김 전 총리의 정치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박 전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유력한 후계자로 꼽혔던 그지만,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며 정계에서 은퇴, ‘1인자’ 도전을 다음 기회로 미룬다. 12·12 사태와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 정치 활동을 금지당한 김 전 총리는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는 1987년까지 야인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김 전 총리는 1987년 정치 복귀를 선언하고 다시 한 번 1인자 자리에 도전했지만 노태우 후보, 김영삼 후보, 김대중 후보에 이은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신다. 그는 1990년 3당 합당을 결행, 거대 여당 내에서의 권력 다툼을 통해 대통령에 도전키로 한다. 그러나 ‘집단 탈당’ 카드로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한 민주계에 밀려 김영삼 후보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내줬고, 결국 민주자유당에서 탈당해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며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자민련 총재 자격으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DJP 연합을 결성한 그는 김대중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 첫 국무총리로 임명, 인사권을 비롯한 주요 권한을 행사하며 1인자 자리에 바짝 다가선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이 불발되면서 DJP 연합도 함께 붕괴, 소수 야당의 총리로 남게 된 김 전 총리는 결국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끝내 1인자가 되지 못한 2인자의 씁쓸한 마무리였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맨유의 수석코치로 일하던 케이로스 감독은 2003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세계 최고의 명문 구단 레알 마드리드가 수석코치에 불과했던 케이로스 감독을 영입한 것은 그만큼 ‘능력 있는 2인자’로 평가받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1인자로 올라설 기회를 잡은 그는 번번이 실패를 맛봤다.

레알 마드리드 지휘봉을 잡은 케이로스 감독은 1년 만에 경질됐다. 전 시즌 1위였던 팀을 4위로 추락시킨 탓이었다. 케이로스 감독은 스타 선수들은 즐비하지만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가 좋지 않았던 레알 마드리드에 균형을 가져다주는 데 실패했고, 스타 선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실패한 후 맨유로 복귀, 다시 ‘최고의 2인자’로서의 명성을 회복한 케이로스 감독은 다시 조국의 부름을 받고 포르투갈 대표팀 지휘봉을 잡는다. 하지만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르는 데 그쳤고, 2010년 5월 도핑 검사에 반발해 받은 6개월 자격 정치 처분과 유로 2012 예선에서의 부진이 겹치며 2년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더 이상 유럽 무대에서는 설 자리가 없어진 케이로스 감독은 2011년, 이란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케이로스 감독은 ‘1인자 체질’이 아니었던 것 같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1무 2패로 예선 탈락, 2015년 아시안컵에서 8강 탈락 등 연달아 ‘굴욕’을 맛본 그는 아시아 무대에서조차 그저 그런 감독 중 하나로 추락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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