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알파고 대국] '뜨거웠던' 바둑판…'오늘 하루 모두가 미생(未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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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알파고 대국] '뜨거웠던' 바둑판…'오늘 하루 모두가 미생(未生)'
  • 오지혜 기자
  • 승인 2016.03.09 1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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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야구경기 보듯 관중들 판세 분석…'기계에 졌다'는 실망도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오지혜 기자)

바둑이 오늘만큼 주목받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움직임이라고는 바둑알을 집어 판에 두는 것밖에 없는 정적인 게임. 그러나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여야 하는 탓에 바둑의 대중적 인기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바둑은 '고지식'하고 '지루한' 이미지에 불과했다.

바둑이 대중 속으로 들어온 것은 드라마 <미생>이 방영되면서다.

지난 2014년 tvN이 방영한 이 드라마는 바둑 프로기수가 되는 데 실패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뤘다. 어렸을 때부터 바둑만 알았던 이 청년은 사회생활에서도 바둑에서 배운 전략을 응용한다. 타이틀 '미생(未生)' 역시 완생할 여지를 남긴 바둑알을 이르는 바둑용어다.

바둑의 흥행을 이끌어간 것은 또 다시 드라마였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응답하라 1988>에 '상하이 대첩'으로 유명한 이창호 9단을 본뜬 캐릭터가 등장했다. 대중들은 한 수 한 수에 집중력을 쏟아붓고, 그 조용한 승부가 끝난 뒤에야 뛸 듯 기뻐하고, 또 눈물이 나올만큼 분해하는 캐릭터를 통해 바둑의 매력을 '간접체험'한 듯 했다.

이날 서울에서 열린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AI) 알파고의 대국은 바둑에 쏠린 인기의 절정을 보여줬다. 인터넷 포털사이트는 일제히 중계방송을 연결했고, 실제 대국 현장뿐 아니라 바둑 해설과 강의를 곁들인 콘서트도 열렸다.

▲ 서울 종로구 '아름다운 극장'에서 열린 바둑 콘서트 ⓒ 시사오늘

이날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아름다운 극장'에서는 대국 시간에 맞춰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 콘서트'가 열렸다.

더바둑, 유비누리, 이야기경영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이 행사에는 당초 바둑동호회 등 소수 인원을 대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정치인들이 참석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취재진이 몰린 가운데,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와 종로구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의원이 얼굴을 비췄다.

안 대표는 "IT는 제 전공이고 바둑은 취미인데, 두 분야가 만나는 곳에 빠질 수 있겠느냐"면서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바둑에 처음 관심을 가졌고, 책을 구해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아마2단 수준까지 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도 인공지능과 인간지능간 대결을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면서 "승패를 떠나 이 맞대결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정 의원은 "저는 이세돌 9단을 응원하지만 알파고가 이겨도 꼭 나쁜 것은 아니다"면서 "알파고 역시 인간의 집단지성이 만들어낸 것이니, 우리 국민들 역시 대국을 즐기며 관람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 바람처럼 이들이 중간에 극장을 떠난 뒤에도 관중과 취재진 대부분이 행사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는 대국 자체에 쏠린 대중의 관심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이날 행사는 대국 해설과 강의가 번갈아 진행됐다.

해설은 조혜연 9단과 프로기사 매니저 1호인 김지명 씨가 맡았다. 이들이 이세돌 9단과 알파고 간 대국을 중계방송으로 보면서 설명을 이어나가자 분위기는 금방 달아올랐다.

현장에 있는 이동 바둑판에 직접 돌을 직접 둬가며 함께 알파고의 능력을 분석하고 다음 수를 예측하는 과정을 관중들 역시 즐기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취재진들 역시 해설을 따라가기 위해 타개, 바꿔치기, 쌈지뜨기, 치받기 등 낯선 바둑용어에 대해 질문하고 받아적는 모습이었다.

초반에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를 시험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평소에는 두지 않는 포석으로 게임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10월 판후이 2단과의 대국 이래 알파고의 능력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어 해설자뿐 아니라 관중들도 이날 게임 결과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조혜연 9단은 "알파고는 사람과 달리 망설임이 없어서 바꿔치기에 굉장히 강하다"면서 "조금이라도 좋은 수가 있다고 생각하면 바로 흐름을 개선한다"고 설명했다.

대체적으로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번갈아 수를 두는 모습이 비춰질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혹여나 기계가 이기면 어떡하나.' 마냥 이번 대국을 재밌어 할 수만은 없는 이유였다.

이날 해설 중간에 진행된 강의의 주제 역시 이같은 불안감을 짚어낸 것이었다.

김왕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불화'라는 주제로,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 도입으로 일자리를 뺏긴 제조업 노동자들의 저항이었다"면서 "이번엔 서비스분야에 인공지능이 도입되고 있는데, 앞으로 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우리는 과학기술 문제를 특정 전문가 집단에만 의존하고 있다"면서 "과학문명의 어젠더는 시민사회 전체가 함께 논의해야 하는 정치적, 사회적 어젠더"라고 지적했다. 

반면, '알파고의 원리와 인공지능의 발전전망'을 주제로 강의한 감동근 아주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알파고는 특정 분야에만 강한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박테리아의 경우 퍼질 수 있는 곳은 모두 퍼지도록 프로그래밍돼 있어 인간에게 위협이 되지만, 컴퓨터는 적어도 세상을 지배하도록 셋팅되지 않았다"면서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대국이 승패를 떠나 많은 사회적 화두를 던져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텁텁한 뒷맛을 남긴 강의가 끝나고, 중계방송으로 전환됐다. 대국 역시 마무리를 향하고 있었다. 조혜연 9단은 바둑판을 가득 메운 수를 분석하면서 "알파고가 강해지긴 한 것 같다"면서 "10수 정도는 내다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관중석에서 이세돌 9단이 '불계패' 했다는 말이 나왔다. 불계패는 더이상 대국을 진행하지 않고 포기한다는 뜻이다. 애써 여유있게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나왔다.

행사에 함께 자리했던 강유택 7단은 이번 결과에 대해 "알파고는 90점짜리 수를 계속 뒀기 때문에 차라리 이세돌 9단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를 봐야 한다"면서 "이전 알파고와 전혀 다른 선수가 자리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고 평했다.

이세돌 9단의 이날 컨디션에 대해서는 "컨디션은 좋았지만 시험적으로 수를 둔 게 문제였던 것 같다"면서 "이창호 9단 역시 전성기 때 신예들한테 진 적이 있는데 상대를 잘 파악하지 못한 게 이유였다. 내일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해설을 진행했던 김지명 프로기사 매니저는 알파고의 기풍에 대해 "기풍이 없다. 세력형, 공격형, 수비형 이런 차원과 아예 다른 것 같다"면서 "대세관도 보완돼 누구라도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도 강하더라"고 말했다.

이세돌 9단과 절친한 사이라고 밝혔던 조혜연 9단은 "제가 진 것 같은 기분"이라며 결과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프로 기사들에게 아픈 결과"라면서 "내일은 또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바둑 역사에서 오랫동안 회자될 일"이라고 전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야당 출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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