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김종필 그리고 ‘풍류’
스크롤 이동 상태바
알파고와 김종필 그리고 ‘풍류’
  • 오지혜 기자
  • 승인 2016.03.12 14: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자수첩> 잃어버린 '풍류'의 시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오지혜 기자)

▲ 자서전 출간기념회에 참석한 김종필 전 총재 미소짓고 있다. ⓒ 시사오늘

구글의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이 전 세계적 흥행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였던 바둑계에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바둑 관련 서적과 용품 판매량도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러나 대국에서 알파고가 연이은 불계승을 거두자, 바둑 자체를 즐기려던 관중들의 심리에도 변화가 일었다. 인공지능에 대한 놀라움은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변했다.

애초 '사람이 이기나, 기계가 이기나'에 머물렀던 알파고에 대한 논의는 '기계가 사람의 직업 중 어떤 것부터 대체할 것인가'로 바뀌었다. 상황을 관망하던 여유는 사라지고 인공지능이 초래할 변화를 대비하려는 자세로 바뀐 것이다.

이에 금융과 의료계뿐 아니라, 인간의 고유영역으로 여겨져 온 교육, 언론, 정치도 인공지능 도입을 피해갈 수 없으리라는 보도가 나왔다. 하필이면 당시 정치권이 공천결과를 놓고 여야 할 것 없이 시끄러웠던 탓에, 일각에서는 '알파고가 정치하는 게 낫겠다'는 비아냥도 나왔다. 

지난 9일, 대국 해설을 들으면서 '알파고 정치인'을 상상해 봤다.

알파고의 강점은 효율성이다. 이익이라는 목표까지 최단거리를 계산한다. 그 과정엔 감정이 섞이지 않아 머뭇거리는 등 '인간적인' 실수가 없다. 결과에 대한 후회도 없다.

정치인 알파고는 환호받지도, 비난받지도 않으리라. 모든 결정은 합리적인 계산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알파고가 정계를 은퇴하는 것은 기계적 성능이 떨어지기 시작해서일 테고, 이 또한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대체된다. 그렇다면 대중에게 알파고는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를 위한 '쓸만한' 도구쯤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기자는 알파고의 1차 대국 다음 날, 김종필 전 총재(JP)의 자서전 출간기념회에 취재차 참석했다.

딥마인드 러닝, 알고리즘 등 IT 용어를 공부하다가 5·16 군사정변, 三金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야말로 하루 만에 미래에서 과거로 날아온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날 휠체어를 타고 등장한 JP는 "나이 아흔을 졸수(卒壽)라고 하는데 '인생을 졸업한다'는 뜻"이라며 "한 시대가 저물었고 이제 나 혼자 남은 것 같다"며 쓸쓸히 말했다. 그러나 행사가 열린 세종문회회관은 이 '늙은' 원로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로 빼곡히 찼다.

외부인사들의 축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것은 JP가 지난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썼던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표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에게는 '빈속' 같다던 정치인생이 후배 정치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는 '귀감'이 된 셈이다.

JP는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한 인물로 박정희 정권에서 2인자 자리에 올랐지만,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구금된 뒤 전 재산을 몰수당하는 고난을 겪었다. 이후 그는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三金 시대'를 여는 등 국내 정치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양측에서 거물 인사였던 JP에 대해 평가는 엇갈린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 JP'를 기억하고, 공과에 대한 교훈을 찾으려고 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가 나란히 행사에 자리한 것도 그 방증이다.

이날 기자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JP가 5·16에 대한 정당성을 호소하면서도,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흔히 오늘의 잣대로 과거사를 재단들 하는데 사려 깊지 못한 생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제가 그간 본의 아니게 국민께 상처와 고통을 안겨드린 일이 적지 않았다. 용서해주시길 빈다"고 말했다.

흔한 정치적 수사일지라도, 앞만 보고 달려온 정치인생에 대한 '확신'과 '후회'가 교차하는 '사람 냄새' 나는 순간이었다.

행사장에서 만난 한 원로 언론인은 기자에게 '소이부답(笑而不答)'이라는 말을 아는지 물었다. JP 자서전의 부제이기도 한 이 말은, 중국 시인 이백의 '산중문답'에 나오는 것으로 말 대신 웃음으로 대답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자의반타의반(自意半他意半) 유신본당(維新本黨) 모두 당시 JP가 유행시킨 수사"라면서, "젊은이들에게는 고루해 보일 수 있겠지만, JP는 시국을 꿰뚫어 볼 줄 아는, 풍류를 알았던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本立道生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