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의 아주 이상한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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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용의 아주 이상한 '회고록'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6.04.12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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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회고(獪鼓)'하지 말고 '회고(回顧)'하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 박관용 전 국회의장(왼쪽),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 ⓒ 뉴시스

'회고록(回顧錄)'이란 개인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나간 일을 돌이켜 적은 기록물을 뜻한다. 인생을 차분하게 성찰하고 삶을 정리해 세상에 역사적 심경을 고백하는 것이다.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정치인들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남의 입'을 빌려 지나간 일을 '마음대로' 적은 글이 상당한 것 같다. '성찰'도 없고 '역사적 심경'도 없는 영혼 없는 회고록이 난무하고 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지난 1월부터 한 유력 시사주간지에 기고하고 있는 회고록도 그 중 하나다.

박 전 의장은 지난달 31일 "대통령 뜻이냐, 현철 생각이냐"라는 회고를 적었다.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 오른팔 최형우 전 장관이 1997년 대선 직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유가 한 쪽지에서 비롯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박 전 의장은 상도동계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강삼재 전 사무총장 등 신(新)7인방과 YS 차남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를 에둘러 비판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기자는 다소 놀랐다. 2013년 <시사오늘>이 최형우 전 장관과의 가진 인터뷰가 박 전 의원의 글에 담겨있었기 때문이다(관련기사: <민산되짚기(23)>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民山은 제도적 민주화를 이룬 밑거름"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877).

박 전 의장의 회고 일부와 본지의 인터뷰 기사 중 일부를 발췌해 비교해 봤다.

"이게 대통령의 뜻인가, 현철의 생각이냐?" 파랗게 질린 최형우 의원이 김무성 의원(현 새누리당 대표)에게 물었다. 한 장의 쪽지를 든 최 의원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1997년 3월9일 저녁, 부산의 한 식당 화장실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중략)… 최 의원은 교수들과 회식 도중 김 의원이 전하는 쪽지를 건네받았었다. 쪽지엔 "후보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당 대표로서 당을 추스른 뒤…" 운운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 한마디로 차기 대권 꿈일랑은 접어두고 물러나라는 얘기였다. …(중략)… 김무성 의원으로부터 '어른 뜻'이라는 답변을 듣고 이내 고향 울산으로 향했다가 다음 날 서울에 올라왔던 최 의원은 3월11일 아침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2016년 3월 31일,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회고)

"회식 중에 김무성 의원이 급한 일이라고 쪽지를 전해줬는데 그 쪽지를 보더니 안색이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최 전 장관이 내려와 화장실에 갔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비서가 들어가 보니 이 양반이 화장실에 서 있는데 아주 안색이 안 좋더라고 해요. 쪽지에 '후보는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 당의 대표를 맡아서 당을 추스리고 나중에 어떻게…'라는 식으로 적혀 있었나 봐요. 이 양반은 김무성 의원에게 '이게 대통령 뜻인가. 현철이 생각인가'하고 물었대요. 그러니 김 의원이 어떻게 대답을 했겠습니까. 그냥 어른 뜻이라고 했겠지요. 그때부터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일이면 자기를 불러서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너무 화가 난 것입니다." 최 전 장관은 소리 내 울었고, 부인 원영일 여사의 말은 빨라졌다.

(2013년 6월 20일, <시사오늘> 최형우 전 장관 인터뷰)

훗날 최형우 전 의원은 "퇴임 후 우리 집에 온 YS가 나를 부둥켜안고 울고 난 뒤 '청와대는 참 희한한 곳이다. 나는 국수 먹으면서 정말 잘하려고 했는데 눈귀가 어두워지고 판단도 흐려지더라'고 토로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최 전 의원이 지목하는 이원종 전 수석 등은 '최 불가론'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강삼재는 안기부가 보관한 YS 비자금 전용, 이른바 '안풍 사건' 수사 때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책임을 청와대로 떠밀다가 '정치적 파문'을 당했다).

(2016년 3월 31일,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회고)

원 여사는 YS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1998년 10월 어느 날 최 전 장관 집으로 찾아온 얘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인터뷰는 마무리됐다.

"YS와 최 장관이 붙들어 안고 서로 울었습니다. 그 때 제가 좀 싫은 소리를 했어요. 그랬더니 어른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할 말이 없다. 청와대가 참 희한한 곳이다. 나는 국수 먹으면서 정말 잘하려고 했는데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고 판단도 어두워지더라'고 해요.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된다고 하던데 최형우만 청와대에 들어와서 소리를 지르면서 안 된다고 해서 내가 좀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 최형우 말이 맞더라'고 했어요. 그 말씀이 참 고마웠습니다."

(2013년 6월 20일, <시사오늘> 최형우 전 장관 인터뷰)

박 전 의장은 본지가 최 전 장관과 가진 인터뷰를 보고 글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야 박 전 의원의 회고와 본지의 인터뷰 기사가 어떻게 이렇게 흡사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박 전 의장은 본지의 기사를 인용했다는 내색조차 글에 밝히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인 냥 펜을 굴렸다.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과 인생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어야 할 회고록을 '최형우의 입'을 빌려 쓴 것이다.

심지어 박 전 의장은 '최형우의 뜻'을 왜곡하기까지 했다. 본지와의 인터뷰 당시 최 전 장관과 부인인 원영일 여사는 누군가를 저격하기 위해 이 같은 발언을 한 게 아니었다. 당신들의 인생역정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 민주산악회의 추억 등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경험과 성찰이 듬뿍 담긴 '눈물의 회고'였다.

그런데 박 전 의장은 인터뷰 기사 중 자극적인 일부분만을 인용해서 마치 최 전 장관이 김현철 교수를 증오하고 있는 것처럼 글에 실었다.

도의적으로도 문제가 많아 보인다. 박 전 의장이 입을 빌린 최 전 장관은 지금 병세가 악화돼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YS 차남 김현철 교수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놓여있다.

하지만 박 전 의장은 어떤가. 6선을 지낸 거물급 정치인이자 아직까지도 새누리당에서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중진으로서 할 도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기자뿐일까.

회고록은 '회고(回顧)'해야 한다. '회고(獪鼓)'해선 안 된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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