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박정희, 정상(正常)을 비정상화(非正常化)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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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박정희, 정상(正常)을 비정상화(非正常化)한 사람”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6.05.1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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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독재자②>공화당, 망국적 지역감정 일으키고 부정한 방법 총동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노병구 자유기고가)

일본군에서 남로당으로, 남로당에서 국군으로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때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든가 나라를 위해 충성하겠다는 마음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다. 그저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이용해 출세를 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일본이 세워 운영하는 만주군관학교에 ‘목숨 바쳐 일본 천황폐하를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라는 충성 맹세의 혈서를 써 바치고, 일본 당국자들을 감동시켜 합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다까기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식 이름) 군은 비록 조선인이지만 일본이나 일본 천황을 위한 충성심에 있어서는 어떤 일본인 생도보다도 훌륭하다”라는 칭찬을 들으며 만주군관학교를 끝마쳤고, 그 성적을 바탕으로 정식 일본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해 3등으로 졸업했다. 이어 중국 침략, 조선의 광복군 토벌 등을 수행하던 일본 관동군에서 일본군 장성이 될 꿈을 안고 충성을 다하던 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자 중국을 떠돌다가 1년 후 독립운동이나 한 것처럼 광복군 복장을 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군대에 들어가 자진해 남로당에 입당, 국군 내 남로당 책임자가 됐다.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 숙군 때 발각돼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사형집행 10일을 남겨놓고 당시 숙군책임자인 백선엽에게 사정해 남로당 동지들을 밀고하고, 그것으로 국군 내 남로당 일망타진에 공을 세웠다는 구실을 만들어 살아남았다.

백선엽은 당시 박정희를 살렸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박정희는 확실한 국군 내의 남로당 책임자로 밝혀져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집행 10일을 남겨놓고 살려달라고 용서를 빌어 다시 조사를 했더니, 박정희는 자진해 남로당에 입당해 국군 내의 책임자였음이 분명하지만 조직 확대나 구체적인 활동을 한 흔적을 찾지는 못했다. 그는 체포돼 수사를 받게 되자 수사관에게 그와 함께 남로당을 같이 했던 동지들을 밀고해 국군 내의 남로당 당원들을 일망타진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이해시켰다.”

박정희는 주어진 환경이 어떻든, 출세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출세를 보장받는 보험을 들어놓은 뒤 은근히 그때를 기다린 기회주의자였다. 만약 우리나라가 공산화가 됐더라면 그곳에서도 엄청난 출세를 했을 사람이다.

그때 박정희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군복을 벗었다. 백선엽은 경제적으로 살 길이 막막해진 박정희의 군무원 채용을 주선하고, 문관으로 군대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 봉급 줄 예산이 없자 작전에 쓰라고 배정된 기밀비의 일부를 떼 줬으며, 미군 고문관을 통해 얻은 ‘C레이션’을 처분해 그 돈으로 생활비를 대주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안 돼서 6·25전쟁이 터졌다. 박정희는 전란 중에 문관에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래서인지 박정희는 6·25전쟁 때도 큰 무공을 세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박정희는 태어나서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진정성을 가지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희생하거나, 공을 세우거나, 봉사를 한 적이 없었다.

상처투성이 나라 만든 독재자

박정희는 휴전 후 군사쿠데타를 꿈꾸며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 계획을 구체화했다고 알려진다. 그러다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쿠데타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합법적으로 무기를 다루는 직책을 악용해 5·16쿠데타(군사 반란)를 일으켰고, 강도가 하는 것처럼 총칼을 들이대 국민에게 겁을 주고 직계 상사들을 협박해 쫓아냈다. 하극상으로 대통령격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육군 소장이 총칼을 들이대 대통령 자리를 빼앗았다. 시작도 무법·불법이었지만, 과정도 무력에 의한 강권통치였다. 툭하면 비상조치·긴급조치·위수령·계엄령으로 국민을 협박하고, 도처에 고문취조실을 만들어 놓고 국민을 괴롭혔다. 5·16쿠데타 후 자신이 주관해 만든 헌법상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자, 이승만의 실패를 번연히 알면서도 3선 개헌을 단행했다. 3선 대통령 선거 때는 장춘단 마지막 선거 유세에서 “이번 선거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국민 여러분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읍소해 국민을 속이고 당선됐다.

그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선거에서 망국적인 지역감정까지 불러일으키고 금권·관권 등 온갖 부정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는 공화당 최고 선거대책 기구에서 선거 전략을 짜면서 ‘공명선거로는 당선이 쉽지 않다’고 중론을 모으고, 대통령 선거 마지막 유세에서 ‘이번 선거를 마지막으로 앞으로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해야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선거 이틀을 남겨놓고 이후락의 중앙정보부는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라는 전단을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권 일원에 뿌려 영남 유권자들을 자극, 영남과 호남을 완전히 갈라놓는 지역감정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호남보다 영남의 인구가 150만 명이나 더 많은 수적 우위를 활용, 완전히 지역감정표인 90만 표차로 겨우 3선에 성공했다. 그나마 대통령선거는 그것이 끝이었다. 이후에는 선거도 없이 그냥 대통령 자리를 차고앉았다.

3선 대통령이 된지 1년이 됐을 때,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북한 김일성에게 보내 1972년 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남북의 평화통일을 준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1972년 10월 17일 계엄을 선포했다. 기존의 민주헌법을 짓밟고, 멀쩡한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 위에 군림하며 제왕적 무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정치권에서 꽤 알려진 인사나, 야당 정치인 중에서도 ‘유신만이 살 길이다’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다닐 정도였다. 박정희가 죽은 10·26 이후 “그 당시에 유신을 반대하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변명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하니 그 공포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유신헌법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삼권분립을 완전히 부정하고, 대통령이 입법·사법·행정의 삼권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절대 권력자임을 명문화한 것이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유정회)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원장과 법관도 대통령이 정하고, 국회해산권, 중요정책의 국민투표 회부권, 기타 막강한 대통령의 비상대권까지 손에 넣었다. 김일성을 능가하는 독재 권력 합법화 조치가 완결된 것이다. 완전한 정상의 비정상화였다.

박정희에게는 통일에 대한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직선제를 피하고 대통령 자리를 유지하는 최선의 선택이 북한의 김일성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서로 내밀하게 약속한 것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꼭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박정희가 영구히 대통령 자리를 차고앉고, 이미 해오던 민주정치를 완전히 뒤엎고 제왕적 독재 권력을 정당화하는 유신헌법을 만든 것이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가져야할 도덕성, 합리성, 합법성을 완전히 깔아뭉갰고, 대한민국은 무한한 권력욕에 사로잡힌 그에 의해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져갔다. 국민도 함께 말이다.

김일성도 박정희의 유신헌법 제정 두어 달 후 자신의 아들에게, 또 그 아들에게 대를 이어 독재 권력을 세습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조치를 완료했다고 하니, 남쪽이나 북쪽이나 독재자들에 의해 상처투성이의 나라로 전락했던 셈이다. <계속>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자유당 때부터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정치계의 산증인이다.

'진산계'로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한 이래 '고흥문계'를 거쳐 '상도동계'로 활약했다. 민주산악회 연수원장과 마사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만세를 위하여 새벽을 열다>, <김영삼과 박정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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