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군사 정권,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나라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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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군사 정권,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나라 만들어”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6.05.2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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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독재자③>국가·국민·박정희 모두에게 불행을 안긴 5·16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노병구 자유기고가)

5·16의 노예였던 박정희

박정희는 왜 유신헌법을 제정해야 했을까? 원인은 5·16쿠데타였다. 쿠데타는 명백한 중죄인 반란죄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잘못이 유신에만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다. 아니다. 5·16이 더 문제다.

그들은 모처럼 수립된 합법정권인 민주당 정권을, 출범한지 겨우 9개월밖에 안됐음에도 무능하고 부패하다는 구실을 만들어 무법·불법으로 무너뜨렸다. 그리고 군정 2년 동안 권력 투쟁과 이권 다툼에 몰두하고, 경제 질서를 어지럽힌 4대의혹사건(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 사건, 파친코 사건, 워커힐 사건)을 일으키는 등 부정부패의 극을 달렸다. 그러다가 국민에게 약속한 군정 2년의 기간이 다가오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혁명공약대로 원대복귀 하겠다면서 정치인들에게 9개항의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실제로 요구한 것은 5·16쿠데타 정당성 인정 및 그동안 저지른 화폐개혁과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에 대해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를 국민 앞에서 선서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 전원, 당시 내각 각료 전원, 군 수뇌인 합참의장·3군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주요 정치인 등이 한 자리에 모여 박정희가 내건 9개항을 지키겠다고 서명하고 국민 앞에서 서약식까지 했다. 그렇게 해놓고도 박정희는 불안했다. 정치권의 약속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며칠 후 “군정 2년으로는 시간이 부족해 혁명공약을 지킬 수 없었다”며 느닷없이 군정 4년 연장의 가부를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선언했다. 9개월밖에 안 된 민주당 정권을 총칼로 빼앗은 그들이 2년의 시간도 부족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박정희의 철없는 번의(翻意)에 정치권과 국민은 반발했지만, 범죄행위로 집권했다는 태생적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좌를 지켜야했다. 하지만 미국의 반대가 부담스러웠다.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던 박정희는, 마침내 “싫지만 할 수 없이 민정에 참가하기로 방침을 세웠다”면서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된다”고 눈물을 떨구며 예편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에서 사형·무기징역·무기금고형에 처하게 되는 중죄인 반란죄를 지었다. 그때부터 그는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신세가 됐다. 전국이 떠들썩하게 ‘5·16을 정당화하고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선서식을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사히 내려올 수는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자리를 지켜야 했다. 강도가 체포돼 재판을 받고, 지은 죄에 상응하는 죗값을 치르기 전에는 어디에 있어도 불안한 것처럼, 박정희는 5·16쿠데타의 노예가 됐다. 그리고 강도가 죗값을 치르지 않기 위해 계속 새로운 죄를 짓듯이, 박정희도 5·16때 잘못 잡은 총칼을 계속 휘둘러 강권통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5·16은 나라에도 국민에게도 박정희에게도 불행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통치자금과 대통령의 사금고(私金庫)

그들은 범죄적 권력을 지키기 위해 혹독하게 국민을 탄압하고 강권통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정부패의 원천인 공작정치를 해야 했으며, 공작정치를 위해서는 무한대의 돈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불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에 대형 금고를 만들어 놓고, 국가 최고 권력인 대통령의 권력을 남용해 집무실에서 당당하게 돈을 갈취해 보관했다. 또 불법자금에 통치자금이라는 명목을 붙여 이름이 알려진 지도층 인사 또는 제법 쓸 만한 인재들에게 뿌렸다. 그런 현상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그것이 마치 자랑인양 부럽게 여기기까지 하는 범죄적 군사문화가 우리 문화로 정착돼 갔다. 그 썩은 돈을 받는 것이 일부 지성인과 고위직 인사들의 특권처럼 돼버렸던 것이다.

집무실의 대통령 금고 안에 무한대로 통치자금을 채워놓는 관행은 전두환·노태우까지 무려 32년이나 이어져 오면서 당연히 깨끗해야 할 관계(官界), 군계(軍界), 학계(學界), 언론계(言論界) 그리고 국가를 위해 훌륭하게 쓰일 자질을 타고난 유력 인사들까지 썩게 만들었다.

군사정권 시대에는 썩은 돈을 마구 뿌려 공작정치를 하는 것이 능력이고, 그것을 받는 것이 영광이자 자랑이었다. 그러다가 김영삼의 금융실명제에 걸려 전두환은 2205억 원, 노태우는 2628억 원을 가차명 계좌로 감춰놨던 것이 드러나자, 뻔뻔스럽게도 “그 돈은 대통령의 통치자금이며 당연한 관행이었다”고 항변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 법을 지키고 국민에게 모범을 보여야하는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불법으로 무한대의 돈을 갈취해 뿌리고도 매일 1억 원 이상을 뒷주머니에 감춰놨던 것이 퇴임 후에 들통 난 것이다. 30~40년 전의 돈이니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아마도 수조 원이 될 것이다. 박정희는 전두환이나 노태우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으니, 공작정치의 규모도 범위도 훨씬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범죄적 정권의 합리화와 부정부패 은폐에 필요한 무한대의 불법자금을 누구에게서 얼마를 어떻게 갈취했으며, 누구에게 얼마를 줬는지, 얼마를 빼돌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게다가 그 부끄러운 돈을 받고 그들의 범죄적 정권을 찬양했던 인사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돼 말이 없으니 진상의 일부조차 밝힐 수 없어 유감이다.

범죄적 정권의 주역들인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민주적인 법과 규칙이 존재하는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절대로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비정상의 사회를 만든 그들은 사회가 정상화되자 대가를 톡톡히 치러, 박정희는 총탄에 맞아 비참하게 죽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감옥에 다녀와야 했다. 세계적으로, 또 후손들에게도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무법·불법을 합법화한 군사정권

10·26이 일어난 곳은 안가(安家)였다. 대통령의 고정 집무실이 청와대 안에 엄연히 있고, 또 휴식을 취할 장소도 청와대 경내에 다 갖춰져 있는데 군사정권은 안가라는 이름을 붙여 따로 12채나 호화로운 집을 지었다. 그곳을 비밀 아지트 삼아 ‘오늘은 이 안가, 내일은 저 안가’를 오가며 공작정치를 펼쳤다.

안가에서는 보통 한 달에 10여 차례나 탤런트 등 미희(美姬)들을 불러다 옆에 앉히고 술판을 벌였다고 한다. 한심한 정치군인들이 보여준 타락의 극치였다.

이런 문화는 민주화 이후의 사회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민주화 이후 고위직 인사들의 국회청문회를 보면, 우리나라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특권을 활용해 국민이 다 가는 군대도 안 가고, 세금도 포탈하고, 위장전입·부동산투기·뇌물수수 등 온갖 부정행위를 한 것이 밝혀져 국민을 실망시켰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그때는 다 그랬다니까”라거나 “누구나 다 하는 관행이었고, 그렇게 안 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항변했다. 오히려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너무하는 것 아니냐”며 “이런 청문회를 통과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일 할 사람의 업무능력은 검증하지 않고 도덕군자를 찾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맞다. 박정희로부터 전두환·노태우까지 무려 32년 동안 그들의 세상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군사 문화가 그랬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부패공화국’이었음을 자랑인양 자백하는 한심한 나라가 된 것이다. <계속>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자유당 때부터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정치계의 산증인이다.

'진산계'로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한 이래 '고흥문계'를 거쳐 '상도동계'로 활약했다. 민주산악회 연수원장과 마사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만세를 위하여 새벽을 열다>, <김영삼과 박정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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