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아닌 근로자]우린 뭐야?…침묵하는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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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 아닌 근로자]우린 뭐야?…침묵하는 국회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6.07.02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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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 보호 받을 수 없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정치권은 미봉책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진호 기자)

“PD 한 마디에 일자리가 날아가고, 밤새 일하는 게 예사인 직업인데 월급은 100만 원 겨우 넘습니다. 여기저기 굽실거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요. 누가 방송작가 한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습니다.”

현직 방송작가인 A씨는 지난달 21일 〈시사오늘〉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직업을 ‘쓰레기 같다’고 말했다. 고용 불안정, 과도한 근로시간, 낮은 연봉, 형편없는 대우까지, A씨는 “아마 21세기에 이런 대우를 받는 직업이 있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더 놀라운 사실은, 겨우 100만 원 넘는 월급도 체불하거나 떼어먹는 회사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A씨의 표현대로, 어떻게 2016년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페이스북 페이지 캡쳐

 보호 받지 못하는 사람들

지난 3월 16일,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조사에 참여한 방송작가 중 47.1%는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1주 최대 노동시간인 52시간을 넘게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노동부 행정해석에 따른 1주 최대 노동시간 68시간을 초과해 일하는 방송작가도 20.2%에 달했다.

시간당 최저임금도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이른바 ‘막내작가’의 월 평균 수입은 120만 6259원으로, 시간당 급여로 계산하면 3880원이었다. 2016년 최저임금인 6030원의 64%에 불과한 액수다. 우리나라 2008년 최저임금이 377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방송계의 막내작가들은 2008년의 최저임금으로 2016년을 살아내고 있는 셈이다.

고용도 불안했다. 담당PD와의 불화 혹은 담당 PD의 메인작가 교체로 고용이 해지된 경우가 13.9%, 일방적인 해지 통보를 받은 경우가 12.1%였고, 메인작가의 불화로 일자리를 잃은 경우(8.4%)도 있었다. 프로그램 개편·제작 중단·제작비 축소 등의 사유가 있었을 때도 방송작가는 최우선 계약해지 타깃이 됐다(46.3%).

심지어 응답자의 68.8%는 서면 계약도 맺지 않은 채 구두계약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임금·근로시간 등 노동조건에 대해 전혀 모른 채 근로한 사람도 24.6%나 됐다. 서면계약을 맺었다고 응답한 방송작가는 6.6%밖에 되지 않았다. 방송작가에게는 근로시간 제한, 최저임금, 해고 제한, 근로조건 명시 등 근로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도 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은 근로자가 아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이들이 근로자가 아니라는 데 있다. 1주 52시간의 근로시간, 6030원의 최저임금, 부당해고 제한, 근로조건 명시 등은 근로기준법에 의해 보호되는 규정이다.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라는 근로기준법 2조 1항의 정의에 해당하는 사람만이 이 법을 적용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방송작가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속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의 판단 기준으로 △업무 내용을 사용자가 정하는지 △취업규칙 또는 복무(인사)규정 등의 적용을 받는지 △업무수행 과정에서 사용자가 상당한 지휘·감독을 하는지 △사용자가 근무시간과 근무장소를 지정하고 근로자가 이에 구속을 받는지 △노무제공자가 스스로 비품·원자재나 작업도구 등을 소유하거나 제3자를 고용하여 업무를 대행케 하는 등 독립하여 자신의 계산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지 △노무 제공을 통한 이윤의 창출과 손실의 초래 등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있는지 △보수의 성격이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인지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하여졌는지 및 근로소득세의 유무와 그 정도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법령에서 근로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지 등을 제시했다. 위임계약·도급계약에 따른 개인사업자·위탁계약자인 방송작가는 현실적으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되기 어렵다.

그리고 2016년 대한민국에는 이와 같은 ‘근로자 아닌 근로자’가 수백만 명에 달한다. 표면적으로는 위임계약·도급계약을 맺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특정 사업체의 지휘·감독 하에 일하는 까닭에 자영업자도 근로자도 아닌 사람들을 우리 법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분류한다. 학습지 교사, 보험 설계사, 골프장 캐디, 택배 배송 기사 등은 모두 이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 포함된다.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조사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230여만 명이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파악됐다. 전체 근로자의 8.9%에 이르는 수치다. 방송작가와 유사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이 230여만 명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 최저임금 인상 논란도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게는 남의 이야기다. ⓒ 뉴시스

더 큰 문제는 모바일 거래가 발달함에 따라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비율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바일을 중심으로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디맨드(On-Demand) 서비스는 대리운전, 음식배달, 가사도우미 등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퍼지고 있는데, 이 직종에 종사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특정 사업체와 업무위탁계약을 맺고 일하고 있다. 즉, 기술의 발전에 따라 ‘위탁사업자지만 특정 업체로부터 지휘·감독을 받고 업무를 수행하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로형태 변화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보니, 노동법이 보호하지 못하는 ‘근로자 아닌 근로자’만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에게는 노조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대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이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때문에 특수형태근로종사자들은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근로기준법과 달리 근로자를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로 규정해뒀다.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라는 문구 덕분에, 노조법상 근로자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비해 폭넓게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만약 방송작가가 노조법상 근로자로 인정받게 된다면,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어 불합리한 처우 개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학습지 교사나 보험 설계사, 골프장 캐디, 택배 배송 기사 등 그동안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직종 종사자들도 힘을 모아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은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에 비해 범위가 넓다고는 하나, 노조법상 근로자에 속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설립된 ‘화물연대’는 구성원 대다수가 위임계약·도급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인 까닭에 노조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14년 8월에는 서울고등법원이 학습지 교사도 노조법상 근로자로 인정했던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사례도 있다. 노동청이 ‘경제종속성’과 ‘사용종속성’ 정도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특수형태근로종사자들은 노조를 결성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실제로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설립을 준비 중인 방송작가유니온은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학습지 교사 사례와 달리 특정 기업을 상대로 하는 노조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 크게 불리할 것이 없다고 파악하고 있다”면서도 “근로자성 인정 여부를 갖고 다툴 경우에는 100%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서울고용노동청 또한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묶인다고 해서 일괄적으로 노조 설립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사실관계를 갖고 따져봐야 한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 일각에서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 230만여 명이 근로자성을 인정받게 되면 고용부담으로 기업이 줄도산을 할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때문에 국회는 미봉책만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대한민국 국회 ⓒ 시사오늘

침묵하는 국회

이처럼 노조 설립조차 보장할 수 없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를 보호하려면 근본적으로 근로자성의 기준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근로자성 판단 기준’으로는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보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노무사는 “국회에서 특수형태근로종사자를 보호하기 위한 특별법을 계속 제정하는데, 한마디로 쓸데없는 짓”이라며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가 나올 때마다 특별법을 만드는 방식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근로자성 인정 기준을 바꾸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국회는 이렇다 할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 230만여 명에게 근로자성을 부여할 경우, 기업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근로자성을 인정하게 되면 최저임금·연장근로수당 등의 경제적 부담은 물론, 각종 고용 규제의 적용을 받게 된다. 노조법상 근로자성만 인정되더라도 불합리한 처우에 대한 개선 요구가 빗발치면서 기업의 부담이 커질 공산이 크다.

모바일 온디맨드 서비스 업체의 한 관계자는 지난달 28일 〈시사오늘〉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 위임 계약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직접 고용으로 바꾸면 우리 같은 업체는 전부 도산할 수밖에 없다”며 “산업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다 보니 정치권에서도 섣불리 근로자성 판단 기준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문제에 대해 우리도 공감하고, 다각도로 해결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반복할 뿐이다. 물론 국회에서도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 대한 산재보험 확대 등 다양한 지원 방안을 내놓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그 분들(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처우 개선도 중요하지만, 국회의원은 국가경제 전체에 미칠 파장도 생각해야 한다”면서 “결코 쉽지 않은 문제”라고 고백했다. 정계에서도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다양한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마땅히 손 쓸 도리가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장님이라서 노동법이 안 지켜준다는 거죠? 한 달에 100만 원도 못 받고 일하는데 법적으로는 사장님이니까?”

‘근로자성’에 대한 기자의 설명을 들은 택배 기사 B씨는 이렇게 반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XX,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

우리는 이 일갈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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