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일탈'과 '갑의 일탈'
스크롤 이동 상태바
'개인의 일탈'과 '갑의 일탈'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6.07.03 14: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자수첩>'甲질'은 '일탈'이 아니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 갑질 세태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 뉴시스

'갑(甲)질', '개인의 일탈.'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말들이다. 전자는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갑이 상대적 약자인 을(乙)에게 부리는 부당한 횡포들을 의미하고, 후자는 사회나 조직이 규정한 질서와 규범에 어긋난 행위를 어느 한 개인이 자위적으로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질과 개인의 일탈이 결합된 작태가 정치권, 재계, 금융계, 스포츠계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는 모양새다. 힘을 쥔 사람들의 일탈 행위가 잇따라 발생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의아한 점은 '갑질+개인의 일탈= 개인의 일탈'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위치에 있는 권력자들의 일탈 행위를 단순 '개인의 일탈'로 볼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국민 알 권리 침해한 갑질, 개인의 일탈인가

청와대는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세월호 참사 때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에게 연락해 정부에 대한 비판보도를 삭제할 것을 강권한 녹취록에 대해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대화다. 우리가 얘기하는 건 적절치 않다"며 이 의원의 '개인의 일탈'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 의원은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다. 홍보수석은 국정과 청와대 홍보 업무를 총괄하고, 대통령의 생각을 언론에 알리는 동시에, 언론 동향과 정보를 취합해서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는 자리다. 말 한마디로 특정 언론을 살릴 수도, 문을 닫게 할 수도 있는 위치인 것이다.

하지만 이 의원은 홍보수석의 권한을 악용해 언론에 사실상 보도지침을 내렸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오보임을 주장하며 기사 삭제를 요청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공영방송 KBS(한국방송)는 국민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할 수 없었다. 국민 알 권리가 침해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이 의원 개인의 일탈 행위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막대한 경제력으로 乙 모독하는 갑질, 개인의 일탈인가

이 같은 의문이 드는 사례는 정치권뿐만 아니라 재계와 금융권에서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2014년 국민적 공분을 샀던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과 승무원 폭행 사건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의 일탈 행위로 희석됐다.

이후에도 경비원을 폭행해 물의를 일으킨 정우현 미스터피자(MPK)그룹 회장, 운전기사에게 폭언한 김만식 전 몽고식품 명예회장, 최재호 무학 회장, 대림산업 이해욱 부회장, 항공사 직원을 폭행한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 등도 사건 당시에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개인의 일탈로 잊혀졌다.

부와 특권, 그리고 재력에 기인한 슈퍼권력을 가진 이들의 을(乙)에 대한 안하무인 행위를 과연 단순 일탈로 치부할 수 있을까.

금융권은 자신들의 실수마저 개인의 일탈로 무마하려는 눈치다. 모뉴엘 사태, 디지텍시스템스 사태 등 최근 연이어 발생한 대출 사기 사건으로 우리 금융권은 약 1조 원 대의 손실을 입었다.

NH농협은행, KB국민은행, 씨티은행 등 시중은행이 다수 연루됐고, 금융감독원, 산업은행, 무역보험공사 등 국책기관도 큰 실수를 범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금융당국과 은행들은 대출 사기는 '개인의 일탈'이라는 점만을 강조하고 있는 모양새다.

막대한 돈의 힘을 이용해 우리 사회에 각종 횡포를 일삼던 금융권이, 자신들의 관리 능력 부족으로 인한 대출 사기사건 피해를 은행을 믿고 돈을 맡긴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물리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계까지...생활 깊숙이 퍼져있는 '갑의 일탈'

'갑질+개인의 일탈= 개인의 일탈'이라는 잘못된 공식은 우리가 평소 즐겨보는 스포츠계에서도 성립되고 있다.

지난 5월 K리그의 유명 프로축구구단 전북 현대 모터스(구단주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는 심판 매수 혐의에 대해 '개인의 일탈'이라는 해명을 내 놓은 바 있다. 소속 스카우트가 구단에 아무런 보고 없이 개인적으로 심판들에게 유리한 판정 청탁을 하면서 금품을 줬다는 것이다.

전북 현대는 K리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구단이다. 사실 구단이 아니라 '후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같은 그룹 계열사 현대오일뱅크는 6년 연속 K리그 타이틀 스폰서를 맡았다. 2009년에는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다가 2010년 현대자동차가 참여해 겨우 대회를 치르기도 했다. K리그의 '갑'인 셈이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현재 심판 매수 의혹과 관련 전북 현대 모터스에 대한 징계를 오는 8월로 연기했다. 당초 이들에 대한 징계는 지난 7월 1일로 예정돼 있었다. 원칙에 입각한 결정이 나올지 의문이다.

갑의 개인적 일탈은 '갑질'

갑(甲)의 일탈은 그들이 거머쥐고 있는 압도적인 권력과 경제력, 그리고 지배력의 크기만큼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거대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더욱이 갑의 일탈은 같은 갑이 아니라, 무방비 상태인 을(乙)을 향하기 마련이다.
갑의 일탈에 을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울먹일 수밖에 없다. 을에게는 권력도, 경제력도, '빽'도 없기 때문이다. 법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갑의 일탈'은 '개인의 일탈'로 치부돼선 결코 안 된다. 그런 식의 변명도 더 이상 통용돼선 안 된다. '갑의 일탈'과 '개인의 일탈'을 구분해야 한다. 나아가 '갑(甲)질'은 일탈로 분류해선 안 된다. 이는 법의 테두리를 교묘하게 피하는 범죄행위이며, 불평등 사회를 심화시키고자 하는 기득권 세력의 폭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엘리트들은 이를 지적하기는커녕 두둔하기에 바빠보인다. 검찰은 최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징역 8년을 구형하면서 “80만 노조원을 대표하는 위원장 자리에서의 위법한 행위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민주노총, 나아가 노동계 전체의 일탈"이라고 규정했다.

이 같은 논리가 우리 사회 갑(甲)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건 왜일까.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볼 문제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