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무리울에서]´무신불립´ 장막에 가려진 한국 정치의 후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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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무리울에서]´무신불립´ 장막에 가려진 한국 정치의 후진성
  • 권혁식 논설위원
  • 승인 2016.07.06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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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권혁식 논설위원)

지난 주 야당 대표들이 잇따라 대국민 사과를 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총선자금 리베이트 사건으로 네 번 사과 끝에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김종인 더민주당 비대위 대표는 ‘가족 보좌진 채용’ 파문으로 두 번 사과했다. 전자는 당의 불상사였고 후자는 국회의원실 문제였다. 얼핏 보기에는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저류에는 우리 정치권을 관통하는 조직문화의 병폐가 자리잡고 있다.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이 처음 검찰 수사선상에 올랐을 때 사기업(브랜드호텔) 오너인 김수민 의원과 공당의 핵심 당직자인 박선숙 사무총장, 왕주현 부총장은 모두 말을 아끼며 서로 눈치만 보는 듯했다. 이상돈 최고위원이 중간조사결과를 통해 ‘브랜드호텔이 인쇄업체 및 TV광고대행업체와 (하청계약을 맺고) 돈을 받는 것은 업계의 관행이다’, ‘당으로 유입된 돈은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 때 검찰의 칼날은 브랜드호텔 선을 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 최고위원이 “검찰이 기소하면 망신당할 것”이라고 엄포성 발언을 할 때는 그런 관측이 더욱 힘을 얻었다.

국민의당의 ‘기대’에도 불구 김수민 의원은 ‘희생양’이 되길 거부했다

그러나 김수민 의원 측 변호인이 검찰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왕 부총장이 브랜드호텔 측에 당과 관계없는 일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폭로하면서 산통은 깨졌다. 왕 부총장의 지시에 따라 브랜드호텔이 받은 돈은 리베이트가 아니라 두 업체와 별도 거래에 따른 대금으로 보이기 위해 허위 계약서까지 만들었다는 진술이 나왔을 때 안 대표의 뒷걸음질은 벼랑 끝까지 몰렸다.

당 지도부는 은근히 김 의원이 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왕 부총장은 ‘새 정치’를 내걸고 창당한 지 5개월밖에 안되는 신당의 생명력을 위해 그렇게 해주길 바라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의원 측은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했다. ‘도마뱀 꼬리 자르기’에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왕 부총장은 구속되고 당의 공동대표는 동반사퇴의 길을 택함으로써 ‘새정치’의 간판은 흙탕물에 내동댕이쳐졌다. 당의 최대 기반인 호남에서 당지지도와 대선주자 지지도 1위 자리를 더민주당에 내주고 말았다. 당이 김 의원에게 가졌던 기대와 신뢰가 무너질 때 호남민이 국민의당에 가졌던 신뢰도 함께 무너내렸다.

국회의원 보좌진에 친인척을 채용하는 네포티즘(Nepotism) 논란은 더민주당 서영교 의원실의 가족채용에서 시작됐다. 새누리당 박인숙 의원실을 비롯해 타 의원실의 친인척 보좌진 채용 사실이 속속 드러나자 국민적 비난 여론은 여야를 광풍처럼 휩쓸었다. ‘제발 저린’ 보좌진 20여명이 소리 소문 없이 현직에서 물러났다. 일부 언론에선 왕년에 아들, 동생 등 친인척을 채용했던 전직 의원들 명단까지 보도하며 이를 새롭게 조명했다. 그 와중에 17대 때부터 매제를 보좌관으로 채용했던 최경환 의원의 과거사까지 야당발 비난성명의 표적이 됐다.

친인척 채용 선호 배경에는 정치조직의 ‘신뢰’ 의존 문화가 도사리고 있다

친인척 채용은 19대 국회까지도 별 탈 없이 계속되던 국회의 관행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친인척 채용을 선호하는 이유는 보좌진에게 요구되는 ‘신뢰’의 근거로 ‘혈연’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설사 업무능력에서 좀 처지는 한이 있더라도 신뢰에서 오는 강점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하다. 이는 국회에 있는 조직들이 ‘신뢰’를 핵심 덕목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국회 권력자들의 치부와 약점이 ‘신뢰’와 ‘신의’를 앞세우는 조직문화 덕분에 상당부분 은폐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무신불립, 조직내부의 치부 은폐를 위해 악용됨

국회 앞마당 지하에는 내부인들만 드나들 수 있는 지하통로가 열려 있다. 그곳에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고 적힌 현액이 걸려 있다. 국회의원과 보좌진, 당료들이 그 앞을 지나면서 뭔가 가슴에 새길 만하다. 공자가 설파한 ‘무신불립’은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현대적 의미로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정치인은 설 자리가 없다는 말로 의역될 수 있다.

그러나 여의도의 무신불립은 의미가 축소되고 왜곡된 지 오래다. 그들만의 냄새나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신뢰를 요구하고, 그들만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무신불립의 장막을 이용하는지도 모른다. 때때로 위에서 기대했던 신뢰가 깨지고 아래에서 지켰던 침묵도 깨지면 그들 조직은 어김없이 악취를 뿜어내며 추한 속살을 드러낸다. 선거비용 허위신고, 정치자금 불법 운용, 보좌진 급여 반납, 정책개발비 유용, 이권 및 인사 개입, 귀족 취향의 갑질 등은 내부고발의 단골 메뉴다.

진영논리로서 무신불립이 아니라 국가운영 원리로서 제 의미 되찾아야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은 3일 당대표 경선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무신불립’을 다시 인용했다. 그는 "당 대표의 첫 과제는 무신불립"이라며 "제가 당 대표로 선출되면 첫 번째 할 일은 현역의원을 포함한 당 구성원 모두가 서로 믿음을 갖게 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무신불립도 여전히 진영논리에 머물고 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신뢰에 불과한 것이다.

향후 정치권의 과제는 무신불립이 국가운영 원리로서 제 위상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다. 신뢰의 주체는 정치인이 아니라 바로 국민이며, 정치인은 신뢰의 객체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정치인은 국민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고 영예가 신뢰임을 명심하고 뛰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정치문화가 구시대적 병폐에서 벗어나 한발짝 전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前 영남일보 정치부 기자

現 시사오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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