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일편단심 지역주의 해소 노력
스크롤 이동 상태바
盧, 일편단심 지역주의 해소 노력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04.29 14: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무현을 위한 변명①
끝없이 추락하는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 측 내부의 불투명한 돈 거래로 인해 노 전 대통령은 사실상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언론은 ‘도덕성’을 외치던 정권의 실체가 드러났다며 연일 노 전 대통령을 공격하고 있다.

물론 노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불법과 비리를 저질렀다면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정치인 노무현이 걸어왔던 ‘정치행보’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닐까?

▲     노무현 전 대통령 캐리커쳐 © 시사오늘
민주당 정권은 10년이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치기간이다.
이들은 모두 호남의 전폭적 지지 속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호남은 지난 97년과 2002년 대선 때, 두 후보에게 90%가 넘는 지지를 보내며 DJ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호남정권’인 것이다. 하지만 두 대통령이 바라보는 ‘지역주의’에 대한 정치철학은 확연하게 달랐다.

지난 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한 대권 3수생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후 영국으로 외유를 떠났다.

그 후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DJ는 ‘지역등권론’으로 무장한 채 당당히 유세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민주당’ 지원유세에 나섰다.

“나의 지역등권론은 모든 지역이 잘 살자는 뜻이다. 한 줌도 안 되는 특권층이 모든 권세를 독점하는 지역패권주의를 깨야 한다.”

민주당은 지역등권론을 앞세워 DJ 정계은퇴 이후 갈 곳을 정하지 못하던 호남표를 훑기 시작했다.

이는 92년 대선 이후 치유될 것 같아 보였던 ‘지역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YS의 정치적 아성이라 할 수 있는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을 들고 부산시장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노 후보가 ‘민주당 깃발’을 들고 선전하자 YS나 당시 집권당이던 민자당도 긴장할 정도였다. 노 후보의 선전은 ‘지역주의’를 뛰어넘기 위한 도전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DJ의 지역주에 맞서 ‘DJ 퇴진 요구’한 노무현

하지만 DJ가 ‘지역등권론’을 들고 나오며, 지원유세에 나서자 부산은 ‘반 DJ’ 정서로 바뀌기 시작했다. 전세도 노 후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노 후보는 당시 ‘DJ 의 완전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판세를 되돌리기엔 역부족 이었다.
노 후보는 당시 패인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지역대결 구도가 판치는 정치현실 속에서 이번 선거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지역대결구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부산시민은 여론조사 등을 통해 나를 지원했고, 민자당도 긴장할 정도였다. 하지만 DJ의 ‘지역등권론’이 나오면서 지역주의를 뛰어넘고자 하는 나의 바람은 한순간의 물거품으로 끝났다. 나는 DJ를 용납할 수 없었다. 지역등권론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역사적 행위였다. 국민 대중을 ‘졸’로 보고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등권론, 정치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지긋지긋한 지역대결구도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바로 지역등권론이다.”

지역등권론으로 서울과 호남을 석권한 DJ는 신당창당을 서둘렀다. 국민회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언론과 정계는 ‘명분 없는 신당’, ‘대권만을 생각해 만든 DJ의 사당’이라며 비난했지만 신당을 막을 수는 없었다.

통합 야당이었던 민주당 내 의원들 중 대부분은 국민회의(신당)로 배를 갈아탔다. 다음 선거에서 ‘당선’만을 생각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노무현’은 “DJ의 신당은 지역주의 망령을 되살리는 것”이라며 당 잔류를 선언했다.

국민회의는 이후 96년 총선에서 호남의 전폭적 지지 속에 제1야당으로 거듭 났다. 노무현은 낙선했고, 민주당은 원내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할 정도로 초라해졌다.

이후 97년 대선에서 DJ는 호남의 ‘끝없는 사랑’ 속에서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DJ는 국민회의 ‘당명’을 다시 ‘민주당’으로 고치고, 16대 총선을 치렀다. 하지만 DJ와 민주당은 ‘지역주의’의 부메랑을 맞아 제1당이 되지 못했다. 집권당이 제1당이 되지 못한 첫 사례였다.

이를 두고 한편에선 “자기가 만든 지역주의 철창 속에 자기가 갇힌 꼴”이라고 비아냥댔다.
반면, ‘노무현’은 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를 통해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국회에 입성했지만 16대 총선을 앞두고 부산 북·강서을로 선거구를 옮겼다.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또 한 번의 시도였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노무현’은 이와 관련해 “정치는 지금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고 ‘지역주의’ 정치로 인해 사람들은 극도의 염증을 느끼고 있다”며 “나 혼자라도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국민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부산출마를 결정했다”고 소회한 적이 있다.

지역주의 타파위해 민주당 쪼개는 결단

결국 이런 노력 때문인지, 호남은 ‘지역주의’ 타파로 상징되는 정치인 ‘노무현’을 민주당 대권후보로 만들었다. 호남민심의 힘으로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된 노무현은 제일 먼저 YS를 찾았다.

▲     © 시사오늘

 
호남당이라고 불리는 민주당의 대권후보가 된 그가 YS를 찾은 것은 영남표를 얻기 위한 ‘제스처’로 볼 수도 있지만 이는 ‘지역주의’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으로도 평가받을 수 있다.

‘노무현’은 이런 정치행보로 말미암아 한 때 민주당 대권후보 자리를 내줘할 정도로 궁지에 내 몰리기 했으나, 그는 당당히 “지역주의 극복이 한국정치의 최우선 과제”라며 자신의 행동이 떳떳했음을 말하곤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물론 노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한 것은 호남민심이었다.

‘호남이 노무현을 당선시켰다’는 말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말이 아니었다. 2002년 대선 결과를 보면, 노 후보는 광주에서95%, 전남과 전북에서 90%가 넘는 지지를 받았다.

DJ에 끝없는 사랑을 보여 왔던 호남민심, 그 호남민심은 2002년 대선에서 DJ 지지 때와 마찬가지로 노무현을 지지했다. 호남민심의 전폭적 지지 속에 대권을 잡은 노무현 대통령이 첫 번째 감행한 일은 DJ가 만든 민주당을 둘로 쪼갠 것이다.

‘지역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지역당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게 명분이었다.

사실 열린우리당 탄생은 95년 DJ가 자신의 대권을 위해 통합 야당인 민주당을 쪼개 ‘국민회의’를 만들었던 것을, 원래대로 복원해 놓은 것 일 수도 있다.
열린우리당 창당은 어쩌면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뛰어왔던 정치인 ‘노무현’이 당연히 해야 할 하나의 과제였다.

물론 열린우리당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시계바늘은 지금 2009년 5월을 가리키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박연차 게이트’ 수사와 관련해 검찰에 소환돼 수사를 받았다. 그리고 사실상 파탄선고를 받았다.

그의 비리가 있고 없음을 떠나, 적어도 노 전 대통령이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뛰어왔던 정치행보에 대해서만큼은 ‘박수’를 쳐주는 것은 지나친 희망사항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