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서거 7주기①] 패리스 하비, "DJ, 국민에 대한 책임 굽히지 않은 지도자"
[DJ 서거 7주기①] 패리스 하비, "DJ, 국민에 대한 책임 굽히지 않은 지도자"
  • 오지혜 기자
  • 승인 2016.08.17 16: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DJ 정신, 계급과 지역, 이념과 상관없이 모든 국민을 존중하는 단호한 신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오지혜 기자)

▲ "한국의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에 대한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은 훌륭한 지도자." 패리스 하비 전 북미한국인권문제협회 사무국장은 故김대중 전 대통령(DJ)를 이같이 회고했다. 사진은 미국 망명 중이던 지난 1984년 에머리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은 DJ가 하비 전 사무국장과 찍은 모습. ⓒ시사오늘

"한국의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에 대한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은 훌륭한 지도자."

파란 눈의 외국인은 故김대중 전 대통령(DJ)를 이같이 회고했다. 

패리스 하비 전 북미한국인권문제협회 사무국장은 1970년대부터 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또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으로 미국 망명길에 오른 DJ를 도우며 인권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앞서 지난 6월 민주항쟁 기념식 참석 차 방한한 패리스 전 사무국장은 "예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한국은 민주국가로 충분히 안정돼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기자의 연이은 질문에도 침착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이를 인연으로 <시사오늘>은 DJ 추모기획 1편에 하비 전 사무국장과 인터뷰를 담았다. 해당 인터뷰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지난 14일 서면으로 이뤄졌다.  

-미국의 인권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나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서부에서 자랐다. 모두 백인인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까지 인종차별을 겪어본 적 없었다. 그러나 이후 백인들뿐인 동네가 우연이 아니라, 소수자의 이동을 의도적으로 막은 결과물인 걸 알았다. 이같은 사실은 나를 소름 끼치게 했고, 인종적 정의에 평생 헌신하게 했다. 종교적인 영향도 있었다.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기독교적 믿음이 개인적, 제도적인 불의에 맞서싸우도록 만들었다."  

-먼 나라 한국의 인권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학생 시절, 신학을 공부하며 다른 문화에서 기독교는 어떤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평생의 동반자가 된 제인이 한국에 단기 선교를 나가게 됐고, 우리는 지난 1959년 서울에서 결혼했다. 제인은 당시 대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이 가운데, 지난 1960년 이승만 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이 일어났고, 제인의 학생 여러 명이 희생됐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한국에 온전히 집중하게 됐다."

하비 전 사무국장이 언급한 학생운동은 1960년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돼 일으킨 4·19혁명을 이른다. 당시 DJ는 4·19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 학생 시위대와 서울시청까지 동행했다.

▲ 1971년 대선에서 DJ와 다시 맞붙은 박정희는 "김대중이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 출 것"이라고 북풍(北風) 공세에 나섰다. 당시 DJ의 대선공약이었던 중앙정보부 폐지, 향토예비군 폐지, 3단계 통일론 등은 공산주의로 왜곡됐다. 이번 승자는 박정희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공세에도 불과 94만표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끊임없이 정치적 탄압에 시달려야 했던 박정희 정권과 DJ의 악연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당시 한국의 민주주의 실태는 어땠나.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언론과 행동의 자유가 억압됐고, 수천 명이 체포돼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 노동권은 억압됐고,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북한 공작원으로 몰렸다. 또 대중 여론은 중앙정보부의 감시 아래 통제됐다. 그럼에도 수천 명의 시민들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맞서 싸웠다." 

▲ 수세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지난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벌인다. 당시 일본 도쿄에서 유신 정권을 반대하는 집회 참가를 위해 호텔 그랜드팰리스에서 머무르던 DJ를 한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납치한 사건이다. ⓒ 김대중평화센터

당시 박정희 정권은 지난 1967년 6·8 총선거에서 목포에 출마한 DJ를 낙선시키기 위해 경남 진도 출신의 거물급 인사 김병삼의 지역구를 옮기고 직접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등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었지만, 결과는 DJ의 승리였다.

1971년 대선에서 DJ와 다시 맞붙은 박정희는 "김대중이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 출 것"이라고 북풍(北風) 공세에 나섰다. 당시 DJ의 대선공약이었던 중앙정보부 폐지, 향토예비군 폐지, 3단계 통일론 등은 공산주의로 왜곡됐다.

이번 승자는 박정희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공세에도 불과 94만표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수세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지난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벌인다. 당시 일본 도쿄에서 유신 정권을 반대하는 집회 참가를 위해 호텔 그랜드팰리스에서 머무르던 DJ를 한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납치한 사건이다.

일본 정부가 조사에 나서면서 곧 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결국 DJ는 납치 129시간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지만, 가택연금과 동시에 정치활동 일체 금지당했다. 이후 재야에서 반유신 운동을 이어가면서 여러차례 옥고를 치렀다.

-DJ와 인연이 깊다.

"이희호 여사가 아내 제인의 대학 동창이었다. 둘은 1950년대 후반 미국 테네시주 스칼릿대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다. 지난 1970년 연합감리교회 일원으로 한국을 찾았을 땐 DJ가 일본에 있었다. 서울을 방문할 때마다 이 여사와 만났지만, DJ는 감옥에 있거나 가택연금 중이었다. 이후에는 한국의 인권 운동을 돕는 데 정부의 감시가 집중되지 않도록 DJ 자택을 방문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지난 1979년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리지만, 곧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했다.

전두환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듬해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DJ를 비롯한 재야인사 20여 명을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전격 연행했다. 바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었다.

신군부가 조작한 이 사건으로 DJ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법정 최후 진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각국 지도자와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에 나선 가운데, 미국 레이건 정권은 DJ 사형 집행을 막기 위해 전두환 정권과 접촉했다. 양국은 DJ의 감형을 조건으로 두 정상의 만남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DJ는 구속된 지 2년 7개월 만인 지난 1982년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 DJ는 미국 워싱턴을 근거지로 2년 여 간 교회와 대학, 인권단체와 미국 정계에서 쉬지 않고 강연을 했다. 사진은 당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함께한 DJ의 모습. ⓒ 김대중평화센터

-DJ의 미국 망명생활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DJ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미국 망명길에 오른 1982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전에도 연락은 했지만 편지를 통해서였다. DJ가 미국에 머무른 동안 함께 일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수많은 상원 의원들을 포함해 미국의 정치인들과 만남을 주선했다. DJ의 영어 연설을 돕거나, 미국의 여러 정치적 문제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다. 또 DJ가 당시 설립한 '재미한국인인권문제연구소'는 내가 사무국장을 맡았던 북미한국인권협회의 긴밀한 파트너이기도 했다."

DJ는 미국 워싱턴을 근거지로 2년 여간 교회와 대학, 인권단체와 미국 정계에서 쉬지 않고 강연을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상황이 강연 주제였다. 또 재미한국인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해 소식지 <행동하는 양심>을 발행하며 한국 민주화에 대해 알리려고 노력했다.
 
-DJ의 지난 1985년 귀국길에 동행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

▲ 미국 정부까지 만류하고 나섰지만, DJ는 1985년 "조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귀국을 강행했다. 이때 조직된 귀국 대표단에는 미국의 상원의원인 토머스 폴리에타와 에드워드 페이언을 비롯한 여러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DJ를 에워싸고 김포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했다. ⓒ 김대중평화센터

"나는 DJ의 귀국길 동행을 기획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필리핀의 야당 인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DJ를 만나기 위해 미국 워싱턴을 찾았다가 귀국길에 공항에서 암살당했다. 이때 사건으로 우리는 DJ의 안전에 큰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급하게 미국의 유명한 정계, 사회인사를 모아 귀국길을 동행할 대표단을 조직했다." 

미국 정부까지 만류하고 나섰지만, DJ는 "조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귀국을 강행했다. 이때 조직된 귀국 대표단에는 미국의 상원의원인 토머스 폴리에타와 에드워드 페이언을 비롯한 여러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DJ를 에워싸고 김포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대표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대기하고 있던 정부 요원들이 DJ를 데리고 가버렸다. 다행히 DJ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당시 수많은 시민들이 김포공항에서부터 줄지어 그의 귀국을 환영하는 것은 보지 못 했다."

DJ는 그 길로 서울 동교동 자택에 연금됐고, 1987년 '6월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리고서야 사면복권됐다. 그토록 열망했던 민주주의 체제를 시작으로 DJ는 정치활동을 활발히 재개,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DJ는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제 연행돼 서울 동교동 자택에 연금됐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리고서야 사면복권됐다. 그토록 열망했던 민주주의 체제를 시작으로 DJ는 정치활동을 활발히 재개,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DJ 서거 7주기를 맞았다. 'DJ 정신'이란.

"DJ 정신은 사회적 계급과 지역감정, 이념적 이해와 상관없이 모든 국민을 존중하고, 그 존중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정치문화를 세우는 단호한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DJ는 국민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 정치인에게 매우 비판적이었고, 이같은 신념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한반도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것이다. 이같은 혁신은 DJ 자신이 진정한 한국의 민주적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DJ가 한국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에 대한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은 훌륭한 지도자로 기억될 것을 믿는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수십 년에 걸친 성과를 지우려는 최근 일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지속될 것이라는 데 긍정적이다. 민주주의는 절대 완성품이 아니다. 지속적인 경계와 논쟁을 필요로 한다. 나는 오늘날 한국을 뒤덮은 수많은 사회적 갈등에서 경계를 발견했다. 갈등 상황은 엉망으로 보일 수 있지만, 지난 세기 수많은 국민들이 피와 땀, 눈물로 이뤄낸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나 또한 이같은 논쟁에서 작은 부분을 맡을 수 있게 돼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本立道生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