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서거 1주기①]사리사욕 초월한 지도자,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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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서거 1주기①]사리사욕 초월한 지도자,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6.11.17 1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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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기 특집…YS에 대한 오해와 진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지난해 늦은 가을, 한국 정치계는 또 하나의 역사를 떠나보냈다. 오는 11월 22일은 거산(巨山)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1주기다.

그런데 세간에서 YS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박한 편이다. 그나마 긍정적인 이들은 ‘공과(功過)가 뚜렷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군부독재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에서 신격화(神格化) 논란까지 나오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지금도 호남정치의 정신적 지주인 김대중(DJ) 전 대통령, 온라인에서 추모열기가 식지 않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비하면 그 존재감이 아쉽다.

그러나

YS를 빼놓고 한국 정치사를 논할 수 없다.

YS를 잊은 채 민주주의를 기억할 수 없다.

지금 현 정치권의 뿌리를 더듬어 나가다 보면 반드시 YS를 만나게 된다.

YS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이유다. <시사오늘>은 YS 1주기를 맞아 그의 삶을 다시 조명했다.

YS를 빼놓고 한국 정치사를 논할 수 없다. YS를 잊은 채 민주주의를 기억할 수 없다. 지금 현 정치권의 뿌리를 더듬어 나가다 보면 반드시 YS를 만나게 된다. YS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이유다. <시사오늘>은 YS 1주기를 맞아 그의 삶을 다시 조명했다. ⓒ시사오늘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야당의 맹장, 민주화의 선봉

YS는 정치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민주화 투쟁으로 보냈다. 1954년 자유당 시절 YS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박사님, 3선 개헌은 안 됩니다”라고 직언한 뒤 탈당, 기나긴 야당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거칠고 직설적인 화법, 패기만만한 행보로 ‘야당의 맹장’이란 평을 얻는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라이벌로 부상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야권의 지도자가 됐다. 모든 민주화운동의 선봉에는 그가 있었다. 1979년 10월 4일 의원직 제명은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유신정권의 종말을 불렀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군정종식에 목숨을 걸었다. 1983년엔 23일 단식투쟁을 벌이며 민주화 세력을 재결집 했고, 계속된 탄압 속에서도 결국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쟁취의 중심에 섰다.

오해1. 민주화의 상징은 YS보다 DJ?

최근 민주화의 상징적 인사로 YS가 아닌, 오직 DJ와 노무현을 꼽는 젊은 층이 늘어났다.

윤모 씨(27세,여,경기도)는 11일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DJ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상징이라고 생각 한다”고 전했다.

상도동계의 한 원로 정객은 같은 날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DJ는 YS의 가장 강력한 정적(政敵)이기에 앞서 제일 든든한 맹우(盟友)였다”며 “오히려 DJ보다 YS가 민주화에 대한 확신이 더 강했을 것”이라고 평했다.

YS는 2008년 와병중인 DJ를 찾아 “우린 젊었을 때부터의 동지로 협력도 오랫동안 했고 경쟁도 오랫동안 했다”며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데 큰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깜짝 놀랐제” 문민정부의 질풍개혁

1993년 YS는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실질적으로 군정종식과 민주화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문민정부는 무서울 정도의 속도감과 과단성을 선보이며 사회 곳곳에 개혁의 메스를 댄다. 하나회 숙청과 역사바로세우기로 군부의 잔재를 일소(一掃)했다.

공직자 재산공개를 종용하며 금융실명제를 비밀리에 기획, 단행하는가 하면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막판에 측근비리와 IMF 구제금융 사태로 지지율이 90%에서 6%까지, 열탕과 냉탕을 오갔던 문민정부지만, 개혁의 족적은 뚜렷하게 남겼다.

오해2. 문민정부는 보수정부인가?

3당 합당을 통해 야권의 핵심인물인 YS가 여권이 되고, 군사세력과 손잡아 변절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정권창출을 위해 민정당 등 독재의 잔재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김덕룡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9일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3당 합당이 없었다면 군정종식은 실제로 어려웠을 것”이라고 밝혔다.

심지어 동교동계의 한 핵심 원로인사도 지난 달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당시 YS가 대선후보조차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돌이켜봐도 군부정권을 끝내는 강력한 한 수”라고 평했다.

문민정부가 열리자마자 YS는 5·16 군사정변은 쿠데타라고 정의, 각 교과서에 군사혁명으로 표기된 부분을 고치도록 지시한다. 반대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상해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시해, 오히려 보수인사들로부터 반발을 산다. 1994년엔 예술가와 작가들의 반정부적·사회비판적 작품을 허용하며 활동을 보장했다.

이와 관련, 문민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한 인사는 10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문민정부는 보수정부가 아니라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좌파정권에 가까울 정도”라며 “대대적 혁신이 이뤄졌고, 민주주의와 탈권위주의를 강하게 지향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영광은 짧고, 고뇌는 길고” YS의 그림자, IMF와 측근비리

임기 초 개혁으로 국민들을 열광시켰던 YS지만 임기 말로 가면서 점점 위기를 겪는다. 특히 다양한 대형사고가 터지며 점점 낮아지던 지지율은, 1997년 2월 한보사태와 연루됐다며 차남 김현철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며 바닥을 쳤다. 사실 수사결과 김현철은 한보와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민심을 생각해 YS가 차남 현철의 구속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뒤이어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며 문민정부는 쓸쓸히 문을 닫았다. YS는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는 퇴임사를 남기고 임기를 마쳤다.

오해3. 문민정부의 악재와 박근혜정부의 악재는 비슷하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5%까지 떨어지자 ‘YS의 최저지지율을 돌파했다’는 언론의 이야기가 나왔다. 일각에선 ‘최순실 게이트’를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당시의 측근비리와 비교하는 목소리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 여권 정계의 한 소식통은 10일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 한다”며 “YS는 여론에 민감하고 소통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측근의 전횡이 들리면 즉각 반응했다. 이렇게 대통령이 주체가 된 국정농단과 측근이 저지른 비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또한 여권의 한 원로 정객은 같은 날“YS가 외환이나 국제경제에 상당히 무지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지지율 하락의 주원인인 IMF 사태는 그 당시 기업들의 무책임한 단기외자, 이전부터 쌓였던 관치금융의 문제 등이 함께 터진 사건이지 문민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여권의 인사는 11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YS 지지율 하락의 대부분은 그 개인보다도 문민정부의 실책에 기인하는 게 크다”며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 폭락은 박근혜 대통령 자체에 대한 강렬한 배신감과 분노”라고 촌평했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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