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속의 진주 ´헤롤린 블랙웰´, 드디어 빛을 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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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의 진주 ´헤롤린 블랙웰´, 드디어 빛을 발하다
  • 김선호 음악 칼럼니스트
  • 승인 2017.02.06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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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의 지구촌 음악산책(8)>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해롤린 블랙웰 (Harolyn Blackwell)'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김선호 음악 칼럼니스트)

▲ 악녀 소프라노로 지탄받았던 당대 최고의 흑인 소프라노 캐서린 배틀ⓒ김선호 음악 칼럼니스트

惡女 소프라노

사람은 살아가면서 일생에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것을 잡으면 운이 트이는 것이고 그것을 못 잡으면 시쳇말로 그저 찌질하게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오느냐를 우리는 잘 모르고 지나간다. 때문에 평범하게 사는 것이지도 모른다.

또한 기회가 눈앞에 다가와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백번 온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실력을 갈고 닦아놓아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그 것이 정확히 언제 오는지 모르는 이유는 아마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이른바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성악가 중에 이런 기회를 잡아 일약 대스타가 된 흑인 소프라노 가수가 있다. 사실 흑인이 성악가로 성공하기란 썩 쉽지가 않고 또 배역도 그다지 너그럽지 않은 환경이다. 캐서린 배틀, 제시 노먼, 바바라 핸드릭스 같은 세계 3대 흑인 소프라노 가수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 영역까지 가기에는 수없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하는 고행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일단 경지에 오르면 사람은 변한다. 대표적인 가수가 '캐서린 배틀'이다. 그녀가 당대 최고의 흑인 소프라노 가수인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속된말로 성격은 싸가지가 바가지다. 그녀는 동료 연주자, 성악가들에게는 물론 선배 성악가에게까지 모욕적인 말을 퍼붓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뿐만 아니라 연습시간에 지각하는 것은 다반사이고 아예 땡땡이치는 사례도 많았으며, 이미 배정받은 분장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다른 성악가의 사물을 문밖에 집어던져 버리는 악행까지 저질렀다. 또한 연습 때에는 다른 가수들이 자신의 얼굴조차 쳐다보지 못하게 했다. 오죽하면 모든 연주자, 출연자들이 단체로 티셔츠를 맞춰 입었는데 그 티셔츠에 쓰인 글귀가 “나는 배틀과 싸워 살아남았다(I survived the Batte)" 정도였으니 말이다.

▲ 헤롤린 블랙웰ⓒ김선호 음악 칼럼니스트

기회는 온다

그러던 중 1994년 한 사건이 터졌다. 뉴욕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메트) 총감독 조셉 볼프는 마침내 공연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캐서린 배틀을 해고해버린다. 14일로 예정된 도니제티의 오페라 ‘연대의 딸’에 마리 역으로 캐서린 배틀이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더 이상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라는 이유만으로 그 악행들이 용서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1995년 피고용자였던 캐서린 배틀 측이 미국 음악가 조합이라는 노동조합 비슷한 단체를 등에 업고 소송으로까지 끌고 나갔지만 모든 연주자와 출연자들이 배틀의 악행을 증언하는 바람에 패소하고 말았다. 이후 캐서린 배틀은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은 종치고 막내렸다.

이 때 비어버린 배역에 다시 캐스팅된 소프라노 가수가 해롤린 블랙웰이다. 그녀는 일찍이 레오나드 번스타인에 의해 〈웨스트 싸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에 처음 캐스팅된 적이 있다. 1955년 생으로 나이도 많고, 1980년부터 소프라노 가수 활동을 시작해서 경력도 풍부하지만, 사실 1994년 이전까지만 해도 크게 내세울만한 것은 없었다. 말하자면 레퍼토리는 많은데 히트곡이 없는 평범한 가수 수준인 셈이었다. 특히 1994년 이전까지는 자신의 음반도 단 한 장 발매한 것이 없다. 물론 그 이후에는 엄청 앨범을 쏟아낸다. 그녀의 특징은 ‘서정적 콜로라투라 소프라노(lyric coloratura soprano)’로 분류된다.

▲ 헤롤린 블랙웰의 첫 독집앨범 'Strange Hurt'표지ⓒ김선호 음악 칼럼니스트

콜로라투라 (Coloratura)

그러면 과연 콜로라투라란 무엇일까? 콜로라투라는 가장 화려한 고음을 가장 고난도의 창법으로 구사하는 부류의 가수를 말한다. 말하자면 엄청나게 빠른 내용 전달과 함께 상상을 초월하는 기교를 동반하여 부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음색이 투명하여야 하며 발음과 음역이 정확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바이올린 곡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마치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이나 파가니니의 곡처럼 초월적 기교가 필요한 창법인 셈이다. 이러한 창법은 18∼19세기 오페라의 아리아 등에 즐겨 쓰였다. 빠른 연속음이나 떨리는 음 등 고도의 기교를 통해 노래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오페라에서 극적인 긴장감을 전달하는데 쓰인다. 때문에 음표가 콩나물 대가리 쏟아놓은 것처럼 엄청나게 자잘하고 템포도 람보르기니만큼 빠르다. 뿐만 아니라 해변가 곡선 주로를 달리는 트릴과 같은 기교와, 신부의 부케처럼 화려한 장식음도 많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기교가 화려하다 보니 내실이 빈약해져 음악적이지 않다는 평도 많아, 점차 쇠퇴해져가는 양식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이 콜로라투라에 해당되는 곡은 어떤 것일까? 콜로라투라에 해당되는 곡은 여러 가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 한 가지를 들면 바로 느낌이 온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 나오는 <밤의 여왕> 부분이다. 마치 새가 노래하듯이 끊임없이 고음으로 불러대는 바로 그런 노래의 류를 말한다. 이 <밤의 여왕>은 필자 생각으로 전 세계에 단 한명의 명인이 있다. 조수미이다. 그 많은 음반을 들어봐도 조수미의 그 콜로라투라 실력은 지존이다. 그런데 블랙웰 이야기하다 갑자기 조수미로 가버려서 좀 내용이 이상해졌다.

▲ 콜로라투라의 정수를 보여준 ‘밤의 여왕’이 수록된 조수미의 앨범. 이 앨범 9번째 트랙에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Queen of the Night’가 들어있다. ⓒ김선호 음악 칼럼니스트

헤롤린 블랙웰

그러면 이제 헤롤린 블랙웰의 호구조사를 해볼 차례다. 그녀는 본래 워싱턴 D.C. 출신이다. 부모는 모두 교사였는데 민권운동과 사회참여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주로 주거환경 개선과 같은 활동이었는데 아마도 흑인들의 주거 문제가 심각해서 이 같은 운동에 전념한 것 아닌가 싶다. 블랙웰은 10살 무렵 학교에서 성악과 피아노를 배운 정도로, 어려서는 음악과 그렇게 가까운 조건은 아니었다. 더욱이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패션디자인 역사를 전공으로 택하여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다. 다행이 그의 선생들이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음대를 추천하는 바람에 카톨릭대학교 성악과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1980년 석사과정까지 마친다. 1991년에는 사업가인 Peter Greer 와 결혼한다.

블랙웰은 1980년 레오나드 번스타인이 준비하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오페라 오디션에서 눈에 띠어 성악계에 등장하는데, 아무튼 앞서 언급한대로 1994년까지는 빛을 발하지 못했고 제대로 된 독집 음반 한 장도 없었다. 하지만 블랙웰이 결정적인 찬스를 잡은 1994년 이후 발매한 앨범은 대단히 많다. 그 가운데 독집 앨범은 3종이다. 최초의 앨범은 그녀가 혼신을 다해 내놓은 음반으로 〈Strange Hurt〉가 있다. 블랙웰이 1994년 유명세를 타자마자 RCA에서 광속으로 계약해서 내놓은 음반이다. 이 음반에는 ‘December Songs’와 'Genius Child' 의 두 파트 곡이 들어있다. 각 곡마다 10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고음역에서 숨이 차게 부르는 콜로라투라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게다가 그렇게 클래식하지도 않아서 그저 편히 들을 수 있다. 다만 'Where are you now' 같은 곡을 부를 때는 하도 숨차게 호흡을 해서 대신 숨을 쉬어주고 싶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헤롤린 블랙웰은 2004년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다. 당시 서울시향이 말러의 교향곡 2번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는데 블랙웰은 비교적 훌륭하게 소화했다는 평이었다. 그러나 당시 금관악기 목관악기 연주자들은 음정도 박자도 틀리고 160명에 이르는 대규모 합창단은 다리 흔들고 작은 소리로 잡담까지 하는 등 엉망이었다는 후기가 엄청나게 올라오기도 했다. 당시 지휘는 객원 지휘자 요엘 레비였다.  

 

 
 

김선호 / 現 시사오늘 음악 저널리스트

- 한국외국어대학교 문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 월드뮤직 에세이<지구촌 음악과 놀다> 2015
- 2번째 시집 <여행가방> 2016
- 시인으로 활동하며, 음악과 오디오관련 월간지에서 10여 년 간 칼럼을 써왔고 CBS라디오에서 해설을 진행해 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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