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관 증언, ˝장기표, 나를 대신 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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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관 증언, ˝장기표, 나를 대신 때려라˝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7.02.13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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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종희 기자)

지난 9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가 독재정권 시절 감옥에서 자행되던 폭력에 온몸으로 저항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시절 마산 교도소에서 장기표 대표가 징역살이를 할 당시 교도관으로 그를 관찰, 사찰일지에 기록해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에 보고했던 임점호 씨는 13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우선 “장 대표는 포승에 똘똘 묶여 재판정에 나가 ‘인간사랑’을 강조하다 돌아와서는 고단해 쓰러졌다. 먹을 게 있으면 동료들과 똑같이 나눠 먹었다”고 전했다.

당시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기 직전 또는 전두환 정권 초기로 기억한 임 씨는 이어 “장 대표는 제 한 몸 살기도 힘든 감옥에서 정말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실천했다”며 “하루는 대구에서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가 포승에 묶여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이 독방에 수용되기 직전에 얻어맞았는데 장 대표가 그걸 보자마자 감옥 창살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눈물로 항의했다”고 회고했다.

▲ 지난 9일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한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가 과거 감옥에서 자행된 폭력에 온몸으로 저항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뉴시스

임 씨는 또 “그 때 마산·창원 지역의 깡패 조직이 미결사동에 수용됐는데 난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직원들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때렸고, 따로 불러서도 때렸다”며 “때마침 같은 곳에 수감돼 있던 장 대표가 이를 보더니 필사적으로 감옥 문을 발로 쾅쾅 차면서 ‘나를 대신 때려라’라고 소리를 지르고 소동을 일으켜 멈추게 했다”고 기억했다.

임 씨는 “장 대표는 그 때 매 맞은 사람들이 깡패였던 건 전혀 몰랐다”며 “장 대표는 (그 주체가 직원이든 수감자이든) 교도소에서 자행되는 모든 폭력에 사실상 목숨을 걸고 맞서는 사람이었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이 밖에도 "교도관들이 보통 2월이면 감옥에 설치된 연탄난로를 철거하는데, 장 대표는 법무부에서 관련 예산을 3월까지 보내주는 점을 내세우며 철거하지 못하게 했다"면서 "인간 사랑을 강조한 그는 참된 민주화운동가였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도희윤 ‘행복한 통일로’ 대표는 지난 2016년 4월 13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1989년) 공주교도소에 있는데 장기표 선생님이 먼저 계셨다고 하더라. 그 분이 감옥 안에서 이뤄놓은 많은 성과들이 있었다.  지식인과 양심수에 대한 의식 변화 등이 이루어져서 나는 좀 편하게 살았다. 교도소 안에서의 민주주의도 많이 정착되어 있었다. 앞선 민주화운동 선배들의 수많은 노력과 피땀 어린 투쟁 덕분에 감옥 안의 생활이 의미 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감사함을 표한 바 있다.

한편, 장 대표는 간첩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인사 가운데 가장 오랜 수배 생활과 옥살이를 한 민주화운동가로서 故김대중 전 대통령 등 유력 정치인들의 영입 제안을 뒤로한 채 자신의 길을 고수해왔다.

그는 서울 법대생으로 자진해서 베트남전에 참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故전태일 열사를 최초로 세상에 알렸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수많은 고문과 감옥살이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는 일반 시민들도 각각의 방식으로 나라 발전에 기여했는데 자신만 특별대우를 받는 건 옳지 않다며 거액의 민주화보상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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