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건국에, 박정희는 출세에, 김영삼은 민주화에 목숨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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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건국에, 박정희는 출세에, 김영삼은 민주화에 목숨을 걸었다˝
  •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
  • 승인 2017.02.13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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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구의 가짜 보수 비판(1)>목숨을 건 세 남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

목숨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 중 마지막 걸작이다. 그래서 모든 것 중에 으뜸이고, 목숨의 값은 인격이다. 대한민국에 목숨을 건 세 남자가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의 이야기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신념에 목숨을 걸었다.

이승만, 해방과 건국과 교만

 이승만은 조국의 해방과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조국광복과 대한민국 건국에 1등 공신이 되었다.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그는 교만했다. 죄의 근원은 욕심인데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고. 인격을 버린 것이다.

 이승만은 “내가 없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오민과 독선으로 자신도 나라도 망쳤다.

박정희, 욕망과 출세와 반란

 다음으로 박정희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출세(出世)에 목숨을 걸었다. 출세를 위해서는 ‘내나라’‘남의 나라’‘원수의 나라’의 구분도 차별화도 없이,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높이 더 높이'라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인격도 품위도 자존심도 다 버렸다.

 그래서 원수의 나라 일본과 일본 천황폐하를 위해서 목숨 바쳐 충성 하겠다며 손가락을 깨물어 충성맹서 혈서 서약서를 써 바치고, 일본 당국자들을 감동시켜 그것으로 출세의 길을 잡았지만-그에겐 유감스럽게도-일본의 패망으로 실패했다. 박정희는 장성이 될 꿈이 날아간 일본의 패망을 일본인보다도 더 가슴 아파 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책임지는 국군장교로 있으면서, 혹시 이 나라가 공산국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생각으로, 철저한 적대관계였던 남로당에 자진 입당하여 국군내의 남로당 책임 간부로, 아군과 적에 양다리를 걸쳤다. 어느 쪽이 됐건 출세의 기회를 엿보다가 여순 사건 때 국군의 그물에 걸려 재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사형집행 10일을 남겨 놓고 군 책임자 백선엽에게 “살려 달라”고 용서를 빌었다. 결국 그의 수하에서 함께 했던 남로당의 동지들을 밀고 하여 '남로당 일망타진'의 공을 세웠다고 핑계를 만들어 살아남았던 인물이다.

 6·25 전란 중에 다시 임관 하고 나라를 지키는 국군이 되었지만, 전란 때는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도 못하고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라는 성스럽기까지 한 직책을 악용(惡用)해 후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합법적으로 적을 막는데 만 쓰라고 주어진 무기를 거꾸로 잡고, 자신들이 목숨 걸고 지켜야할 서울로 진격해와 5·16이 일어난 것이다. 마치 강도가 하는 것처럼, 총·칼을 들이대고 육군 소장이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높은 대통령 자리를 단숨에 차고 앉았다.

 목숨을 건 결과였던 이 벼락출세는 형식도 내용도 형법상 그 수괴(首魁)는 최고 사형에 처하게 되는 ‘반란죄’ 였다. 그의 범죄적 집권은 벗으려 해야 벗을 수도 없고, 벗겨지지도 않는 그의 족쇄였다. 그의 명분 없는 등정이었기에 순리로 내려올 수도 없었고, 내려올 길을 찾을 수 도 없었다. 무법불법으로 잡은 대통령 자리이니 만큼, 이를 지키기 위해서 그의 통치수단은 비상조치, 긴급조치. 위수령, 계엄령 등의 강권방식 일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의 18년은 암흑 세상이었다. 강도가 죄 값을 치르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또 강도질을 해야 한다.

 무리하게 잡은 대통령 자리를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선거도 투표도 없이 영구적으로 차고 앉는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까지 만들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그의 “팔자에 없는 대통령” 놀음은 총탄을 맞아 죽음으로 끝을 냈다.

 박정희는 6·25 전란을 벌여 수백만 동포의 목숨을 빼앗고, 국토를 초토화한 민족의 원수 김일성까지 끌어들였다. 통일을 하겠다는 의지도 없으면서, 되지도 않을 핑계 거리를 만들어 유신헌법을 만들었던 대가를 받았다. 하나님이 무심치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영삼, 투쟁과 용기와 민주회복

 김영삼은 박정희가 출세를 위해서 총·칼로 망가트린 민주회복(民主回復)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김영삼은 이승만에서 박정희까지 그들의 무법불법의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일관되게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고 그래서 의회정치를 해야 한다’고 외쳤다. 선진민주정치에 대한 철학적 신념을 굽히지 않고, 목숨 걸고 싸우고 또 싸워 끝내 민주광복의 일등공신이 됐다. 

 이승만의 면전에서 그는 “3선 개헌을 하지 마십시오”, “박사님께서 헌법을 지키고 물러나시면 이 나라의 영원한 국부가 되십니다”라고 직언했지만, 이승만은 듣지 않았다. 무리한 3선 개헌에 이어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4·19 혁명으로 하야했다. 자신도 나라도 망쳐 버렸다.

 5·16박정희의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김종필을 필두로 실력 있는 주체세력들이 김영삼에게 함께 하기를 권했지만 “비민주적·범죄적 정권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군정종식 민주회복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박정희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김영삼을 없애려고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초산테러까지 했지만, 김영삼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겁먹기는커녕 오히려 군정종식과’, ‘타도 박정희’에 더욱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범죄적 수법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그 대통령 자리를 지키기 위해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계엄사령부,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을 총동원하여 전국 곳곳에 고문취조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신에 반대 하거나 민주주의를 말하는 인사는 영장도 없이 잡아다가 지독한 폭행을 가하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예사로 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겁에 질려 나서는 사람이 없어 젔다. 박정희의 나라가 됐다. 강권통치로 국민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박정희의 말이면 산천이 벌벌 떨었다. 언론도 모두 잠이 들었다.

 그 순간 나선 것은 김영삼이었다. 40대 기수론을 시작으로, 야당 당수가 된 김영삼은 겁 없이 “정권을 잡을 생각이 없는 정당(야당)은 정당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수권정당(受權政黨)론을 들고 나왔다. 당시엔 여야 정치권도 국민도 어림없는 소리라고, 계란을 들고 바위를 치겠다는 소리라며, 김영삼이 어리석다고, 만용이라고, 비웃었다. 김영삼은 오직 하나 남은 박정희의 도전자였다.

 마지막 도전자 김영삼을 가소롭게 본 박정희는 ‘김영삼 죽이기’에 나섰다. 신민당 총재직무정지가처분, 국회의원직 제명, 그래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국회의원직 제명이 박정희의 유신국회에서 통과되자 김영삼은 오히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박정희를 훈계하고 나섰다. 감옥에도 보냈고, ‘굽히지 않으면 생명 까지도 위험할 것’이라는 최후통첩까지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아침에 잠에서 깨면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려니’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측근들에게 김영삼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다. “내가 박정희에게 죽을지언정 나의 민주화에 대한 철학적 신념은 버릴 수가 없다”. 김영삼의 목숨을 건 외로운 투쟁은 국민을 감동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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