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와 안철수, 2위 싸움 주목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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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와 안철수, 2위 싸움 주목되는 이유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7.05.03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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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3위 후보, DJ 제외하면 경쟁력 잃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2위 싸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뉴시스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6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분위기는 그리 뜨겁지 않다. 〈리얼미터〉가 여론조사 공표금지 직전인 지난 1, 2일 실시해 3일 발표한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42.4%를 얻어 나란히 18.6%를 획득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멀찌감치 따돌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2, 3위를 합쳐도 1위 후보 지지율에 미치지 못하는, 완벽한 ‘대세론’ 국면이다.

하지만 홍 후보와 안 후보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대 대선에서 2위에 오른 후보와 3위에 그친 후보는 전혀 다른 정치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총 여섯 차례의 대선에서 2위 후보는 단 한 명(2007년 정동영 후보)을 제외하고 모두 ‘재도전’의 기회를 얻었다. 반면 3위 후보 중 다시 대선에 출마해 경쟁력을 보여준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홍 후보와 안 후보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역대 대선 3위 후보’들을 〈시사오늘〉이 소개한다.

제13대 대선,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1987년 제13대 대선에서 DJ는 이른바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출마를 강행했다. 4자필승론이란 노태우(대구·경북), 김영삼(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각자 자기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DJ 본인이 당선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DJ는 서울에서 노태우·김영삼 후보와 큰 격차를 만들지 못하고, 인천·경기·강원에서는 노태우·김영삼 후보에게 패함으로써 3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DJ는 두 차례의 도전 기회를 더 얻었다. 제14대 대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YS에게 패했고, 제15대 대선에서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복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나서 결국 당선증을 거머쥐었다. ‘민주화의 거두’라는 상징성, ‘동교동계’라는 탄탄한 조직, ‘호남’이라는 확실한 지역 기반 등을 모두 갖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DJ는 앞선 대선에서 3위에 그치고도 대권 후보로서의 경쟁력을 유지한 유일한 인물이다.

제14대 대선,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제14대 대선에서 정주영 후보는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정 후보는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1992년 2월 통일한국당을 창당했는데, 한국당은 3월 총선에서 무려 31명의 당선자를 내며 태풍의 눈으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으로 여론의 역풍을 맞으면서 상승세에 급제동이 걸렸고, 결국 정 후보는 16.3%의 득표율로 김영삼·김대중 후보에 이은 3위로 대선을 마친다.

대선이 끝난 후, 정 후보는 문민정부의 타깃이 됐다. 현대그룹 계열사들은 세무조사 대상이 됐고, 정 후보 본인은 선거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결국 그는 1993년 2월 의원직을 내놓고 통일국민당에서도 탈당,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정 후보는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며 두 번 다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제15대 대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이인제 후보는 신한국당 경선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온 그는 ‘이회창 대세론’에 균열을 내며 이회창 후보와 결선 투표에서 맞붙었고, 비록 패퇴했지만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이인제 후보는 아들의 병역 문제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나선다. 하지만 김대중·이회창 후보에 이은 3위에 그치면서 ‘가시밭길 정치역정’이 시작된다.

대선에서 패하고 1998년 제2회 지방선거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 후보는 DJ와 손을 잡는다. 당시 DJ는 여소야대(與少野大)를 돌파하기 위해 인위적인 정계 개편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후보는 새천년민주당에 합류, 제16대 총선에서 3선을 달성하고, 2002년 대선 경선에 나선다. 그러나 국민 경선 시작 전 1위를 달리던 그는 ‘노풍(盧風)’에 휩쓸려 민주당 경선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 후보는 민주당을 떠나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한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가담했던 자민련은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고, 이 후보는 다시 민주당에 복당해 2007년 대선에 나섰으나 6위로 낙선한다. 2008년에는 다시 민주당에서 탈당, 무소속으로 5선 국회의원이 된 뒤 자유선진당을 거쳐 새누리당으로 돌아간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도 그는 새누리당 대선 경선에 나섰으나, 홍준표 후보와 김진태 후보에게 밀려 3위에 그쳤다. 1997년 대선에서 3위를 기록한 뒤 두 번 다시 ‘유력 대선 후보’ 자리에는 오르지 못한 셈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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