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부마항쟁에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려 했다˝
˝박정희는 부마항쟁에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려 했다˝
  •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
  • 승인 2017.06.0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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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구의 가짜보수비판(12)>박정희에 대한 오해와 진실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

박정희 측근 중 몇 사람은 박정희에 대한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곧 정권을 내려 놓으려고 했다'고 변명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이러한 이들의 변명과 궤변에 휩쓸리지 않도록, 읽는 이의 올바른 판단을 돕기 위해 박정희 곁에서 직접 보고 듣고 말하면서 그의 속성을 본대로 느낀대로 고백한 몇 사람의 말을 여기 옮긴다.
 
김영삼(YS)과 박정희의 여야 영수회담(1975년 5월 21일)

YS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개헌과 민주화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김 총재님 저 창밖을 보십시오 이 넓은 청와대 뜰의 쓸쓸한 모습이 마치 깊은 산중의 절간 같지 않습니까? 마누라는 총에 맞아 죽었읍니다. 마누라도 없는 이곳에서 어린 자식들만 데리고 혼자 살고 있는 내가 무슨 욕심이 있겠읍니까? 나는 지금 총재님과 굳게 약속을 하려고 하는데 이 내용에 대해서는 사나이와 사나이의 명예를 걸고 비밀로 해 주십시오"

이에 YS가 "말씀해 보십시오"하고 답하자, 이에 박정희는

"나도 절간같은 이 곳(청와대)에 더 이상 미련이 없읍니다. 대통령 직선제개헌과 민주화를 내가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알려지면 권력 지향적인 똥파리들(당시 공화당 실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요동칠 것 입니다. 이런 가능성도 막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여 준비할 시간이 필요 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김 총재께서 지금 나가시더라도 민주화에 대한 우리 두 사람의 이 약속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기로 약속을 하십시다"라고 호소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사정하는 박정희의 태도가 측은하기도 하고, 워낙 진지해 보여서 YS는 "그렇게 하십시다"하고 나왔다.

YS는 신민당 비주류와 일부 국민의 비난까지 감수하면서 "여·야 영수회담에서 야당이 아무것도 얻은것이 없다"고 밝혀 그 약속을 지키고 기다린 것이다. 물론 박정희는 끝내 이 약속에 대해 변명도 없이 깔아 뭉개 버렸다. YS는 후일 "눈물까지 글썽이는 박정희의 태도가 하도 진지하여 언제까지라는 시한을 정하지 않고 나온 것이 잘못이었다"고 한탄 했다

박정희 시절 재무부장관과 경제부총리, 국무총리를 지낸 남덕우의 말

남덕우는 특보들과의 만찬 자리에서 박정희가 "유신헌법의 대통령선거는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니 어떤 국민이 지지 하겠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 날꺼야"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남덕우는 10·26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개헌과 하야에 대한 생각을 실행에 옮겼을까 하는 것은 매우 궁굼한 대목이 아닐수 없다"며 박정희는 스스로 물라나지 않았을것 이라는데 무게를 뒀다.

1970년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김성진의 말

 김성진은 자신이 목격한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기록한 책 <박정희를 말한다’> 에서 "박 대통령의 비민주적인 부분에는 그 대부분이 박 대통령 본인 보다는 이후락, 박종규, 차지철, 김재규 등 2인자 자리에 있던 군출신 권력자 들의 과잉충성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남북대화를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던 이후락의 월권행위와 무모한 강경책을 밀어 붙이던 차지철을 비판 했으며, YS 신민당 총재직무정지가처분 신청을 꾸민 사람도 차지철이었다고 적었다.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난후 박대통령은 패기와 결단력이 많이 떨어졌다"며 "‘지도자로서의 사명감’과 ‘개인 가족의 삶’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그틈을 개인적 야심을 가진 측근들이 파고 들었다"고 후술했다.

이만섭 전 국회 의장의 말

이만섭도  자서전에서 10·26에 대해 이후락, 김재규, 차지철등 2인자들 끼리의 권력 다툼에서 나온 그들끼리의 갈등 관계가 빚은 참사라고 진단 한다. 그러면서 이만섭은 "김재규는 평소 합리적인 사람인데 차지철이 강경 일변도 였다"면서  "박정희는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에서 차지철의 손을 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경호실 수행계장을 지낸 박상범의 말

"1978년 3월 어느날 박정희가 '내가 집권한지 18년이 됐지? 지금 정리를 하고 있는데···20년이 되는 해에 전격 하야하고 떠나야겠다. 어때? 그러는게 좋겠지?'라고 물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박정희의 청와대 정무비서관이었던 유혁인의 말

"그 당시 내가 본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누구 하나 대통령 앞에서 소위 직언을 할수 있는, 실제로 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다. 박 대통령을 설득 한다는 것은 바로 유신헌법을 개정 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웠다. 헌법에 손을 댄다는것은 아예 입에 올릴수 없는, 금기시 돼온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10·26 이후에는 완전히 딴 소리들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한사람도 예외없이 대통령 앞에서는 강경론을 펴거나, 강경론을 주장하는 대통령에 동조했다으며 아무도 대통령 앞에서 당당하게 소신을 피력하거나,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정희 정권서 중앙정보부 요직을 지낸 전 민정당 국회의원 이종찬의 말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누구도 2인자가 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원칙을 이후락은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깜박하고 평양에 다녀온 후 절제를 하지 못하고 설치다가 내침을 당했다. 윤필용 사건 등 여러번의 반혁명 사건은 모두 실체가 없는 조작된 사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JP)이 총리시절 '영상이 영상 다워야지···’라는 말을 자주 하기도 했다. 실제 1975년 12월 개각을 단행한 뒤에는 박정희는 JP를 물러 나게 하고 최규하를 그 자리에 앉혔다.

청와대 상춘재 만찬석상에서

 박정희가 1978년 유신2기 대통령이 된후 청와대 상춘재 만찬장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하자 "YS가 유신체제를 뒤엎겠다고 나온다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마구 욕을 하고 "김영삼이가 저토록 기고 만장하게 유신체제를 뒤엎겠다고 나오는것은 동아일보가 김영삼을 지나치게 띄워주기 때문"이라며 앞에 서있던 동아일보 강성재 기자를 머리로 들이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부마항쟁에 대한 김재규의 보고를 듣고

부마항쟁이 일어났을때 김재규가  "부마사태는 체제저항과 정책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나 다름없다. 곧 전국 5대 도시로 확산 될것 같다”는 예측 보고를 했다. 그러자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벌컥 화를 내며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면서 "자유당은 4·19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해서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명령을 하면 나를 누가 사형 하겠느냐"고 역정을 냈다.  
 
 이상 간단히 박정희와 함께한 측근들이 듣고 본 박정희의 실상을 가감없이 열거했다.

박정희가 알아서 물러 났을것 이라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는 반란죄의 수괴이기 때문에 사실 순리로 물러날수도 없었다. 그래서 가끔 물러날 것 처럼 말도 하고, 그럴듯한 제스처도 취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물러날수도 없었고, 그래서 물러날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살아 있었다면 종래는 다른 후진국들 처럼 쿠테타는 또 쿠테타를 부르고, 그나마 이룩한 성과도 새로운 쿠테타 세력에 의해서 파괴되는 불행이 연속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 혼란을 겪고 있는 중동의 시리아나 리비아처럼 말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더불어민주당 출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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