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이명박 정부, 해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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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이명박 정부, 해법은?
  • 김인배 자유기고가
  • 승인 2008.11.2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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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다움'에 취한 교만 털고 '이명박스러움'을 경계 또 경계해야
 
‘광우병 파동’을 계기로 이명박 대통령이 ‘소통(疏通)’을 화두처럼 부여잡은 모습입니다. 최근 이 대통령은 “공직자는 국민과 의사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각각의 세대에 맞는 소통방식을 찾아라” “정부가 국민과 소통에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등 연일 ‘소통’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소통은 사전에서 찾아보면 ‘트일 疏, 통할 通’으로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을 뜻합니다.

소통의 중요성은 개인사든, 가정사든, 국가사든 세상사에서 새삼 거론할 것도 없는 사실상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민주주의의 대원칙으로 얘기되는 ‘대화와 타협’도 소통에 기초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국가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이 소통을 ‘굳이’ 거론해야 하는 그 자체만으로 새 정부가 근본 위기에 처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모든 문제는 답을 찾으려면 원인 진단이 선행돼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왜’ 소통의 위기에 처하게 됐을까요?
 
이명박 정부가 ´소통의 위기´에 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 작용하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로 ‘교만’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 대통령은 마침 지난 15일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국민과 역사 앞에서 교만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면서 더 낮고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소통의 위기에 처한 원인을 교만에서 찾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희망적입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발언을 세심히 들여다보면 ‘부족한 2%’가 있습니다.
“…교만하지 않았는지…”란 대목입니다.
말에, 단어에 얽매이지 말라는 옛 가르침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 대목이 석연치 않습니다.
소통의 위기의 당사자인 이 대통령으로선 설령 객관적 진실로는 ‘교만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또는 본인은 그렇게 확신한다 할지라도 ‘교만했다’고 마인드 컨트롤 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더 근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의 현상’과 관련한 반면교사 = 노무현 전 대통령

‘교만의 현상’과 관련해 이 대통령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대상이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노 전 대통령의 여러 오류 중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대통령이 된 그 순간 바로 ‘교만의 늪’으로 빠졌다는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요?
5공 청문회때 이른바 신군부의 수장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명패까지 던지며 피를 토하듯 질타했던 뜨거운 정의감.
망국병인 지역감정·지역구도를 타개하겠노라며 편한 길 마다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국회의원 배지를 던져버리는 남다른 용기.
그런 ‘노무현다움’이었지요.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결정적으로 놓친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노무현’에도 박수 보낼 의사가 없는 국민의 속성 놓친 노 전 대통령

그것은 국민은 ‘노무현다움’에 박수를 보낸 것이지, ‘그 어떤 노무현’에도 박수를 보낼 의사는 추호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국민은 일반적으로 선거에 나선 후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다, 특정 후보에 대해 긍정적 시각에 취하기까지 한 상황에서라면 그 후보의 부정적 문제들에 대해선 일단 접고 넘어갑니다.
노 전 대통령은 국민의 이런 속성을 간파해야 했습니다.
국민이 뒤늦게 눈치 챈 노 전 대통령의 부정적 문제들은 재임 기간 초기에 일찌감치 ‘노무현다움’과 정반대 의미의 ‘노무현스러움’이란 신조어로 회자됐지요.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국민이 미처 알지 못했으나 자신은 당사자이기에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노무현스러움’에 대해 대통령이 된 순간부터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위상에 걸맞도록 ‘자체 정화’에 최우선으로 정성을 쏟아야 했습니다.
더불어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힘으로 작용했던 ‘노무현다움’에 대해서 조차 국가최고지도자로서 부합한 것인지 여부를 냉정히 가려 털건 털어야 했습니다.

‘노무현다움’의 교만에 취해 ‘노무현스러움’ 자체 정화 못한 노 전 대통령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지난 5년 세월이 입증하듯, 유감스럽게도 노 전 대통령은 거꾸로 갔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오히려 대통령이 되는 순간 ‘노무현스러움’으로 상징되는 ‘그 어떤 노무현’도 국민이 승인한 것으로 대착각한 채 숨 돌릴 틈도 없이 교만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 모습이었지요.

그러다보니 ‘노무현다움’을 국가최고지도자에 걸맞게 새로 업그레이드할 여지는 아예 전무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어떤가요?
이른바 ‘샐러리맨 신화’부터 ‘청계천 신화’까지 ‘이명박다움’이 지금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한 힘인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국민이 ‘그 어떤 이명박’도 승인한 것일까요?
이 대통령 또한 노 전 대통령처럼 그렇게 착각하고 교만의 늪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요?
그 어떤 누구든 성찰할 자세만 갖추고 있다면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지요.

‘…교만하지 않았는지…’? ‘교만했다’고 돌아보는 것이 대도

결론적으로 이 대통령으로선 난마처럼 얽힌 국정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교만하지 않았는지...”정도의 성찰에 머물지 말고 “교만했다”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대도(大道)´일 것입니다.
그것도 반드시 ‘치열’하게!
치열하지 않으면 자칫 이 대통령은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각별히 유념해야 합니다.
그 함정은 바로 ‘자기합리화’입니다.
교만의 유형을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더군요.
지혜로운 유형은 세상에 앞서 스스로 자신의 교만함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다음 지혜로운 유형은 세상에 의해 뒤늦게나마 자신의 교만함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반면 어리석은 유형은 세상에 의해서도 자신의 교만함을 깨우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유형을 극대화하는 것이 ‘자기합리화’라는 괴물입니다.

교만을 극대화 시키는 ‘자기합리화’...일란성 쌍둥이 ‘독선’의 잉태

‘나의 교만은 세상을 위한 것’이라는 식의 최면에 빠지는 것, 세상은 이를 ‘독선(獨善)’이라 이름 붙이지요.
‘홀로 착하다’구요?
노 전 대통령에 대해 교만과 같은 뜻의 ‘오만’에다 ‘독선’이란 꼬리표가 덧붙은 것이 우연이 아니지요.

교만 내지 오만이 극에 달할 때 예외 없이 독선과 연결됩니다.
노 전 대통령이 선(善)의 의지를 갖고 있음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문제는 그 선의 의지가 ‘지나침이 미치지못함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교훈을 짓밟고 교만과 일란성 쌍둥이를 이룬 것이지요.
이러한 ‘독선’이 현상화돼 나타나는 것이 ‘멋 부리기’입니다.
‘지 멋대로 하는 것’이지요.

풀 하나 하나에도 생명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무릇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주 자연의 섭리라 이르는데 지 멋대로 하니 세상사 되는 일이 제대로 있겠습니까?
당연히 ‘무능’으로 귀결되지요.

교만과 독선, 무능으로 이어지는 당연한 귀결

이들 단어가 많이 눈에 익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직전 대통령인 노 전 대통령에 붙은 3대 꼬리표, ‘오만과 독선, 무능’ 바로 그것이지요.
노 전 대통령을 상기하면서 이 대통령에 대해 한 가지 더 눈이 가는 것이 있습니다.
‘학습효과’입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 학습효과가 뛰어나다고들 얘기했지요.
우연의 일치인지 이 대통령에 대해서도 그 주변에서 학습효과가 뛰어나다고들 말합니다.
또 이 대통령 본인이 그렇게 확신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학습효과’? 자신감은 여차하면 교만으로 변종

이 대통령은 지난 14일 미래기획위원회 위원들과의 오찬에서 ‘소통론’을 펴면서 “여러분들이 나를 잘 모를 수 있는데, 나에게는 태생적으로 변화의 피가 흐른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소통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는 이 표현 속에는 학습효과에 대한 자신감이 잔뜩 묻어납니다.
자신감과 교만함은 당연히 구분돼야겠지만 자신감이 여차하면 교만으로 변종되는 사실을 지난 5년간 노 전 대통령을 통해 절절히 체험한 까닭에 학습효과에 대한 이 대통령 스스로의 믿음마저도 두려움으로 다가섭니다.

물론 이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다르다’는 흔적이 확인되기는 합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지난 22일 ‘광우병 파동’과 관련한 대국민담화에서 “국민께 송구스럽다”며 “국정 초기의 부족한 점은 모두 제 탓”이라고 하는 등 소통과 연계해 나타낸 일련의 ´겸손´한 자세는 국정 난맥에 대해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식으로 ‘국민 탓’으로 돌린 노 전 대통령과 대비됩니다.

다만 가톨릭적으로는 성찰, 기독교적으로는 회개와 유사한 불교 용어인 참회(懺悔)의 뜻을 되새기면, 이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화두인 ‘소통 부재’와 ‘교만’을 해소하는 것이 결코 간단치 않기에 경계에 경계를 발하는 것입니다.

인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토하는 참회의 자세가 교만 털어내는 길

‘뉘우칠 懺, 뉘우칠 悔’의 뜻을 지닌 참회에 대한 불교의 해석은 ‘인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토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순한 학습효과의 뛰어남이라든가, 더욱이 세치 혀로의 표현, 또는 환경의 어려움에 따른 미봉의 일시적 인식 정도로는 어떤 문제도 근본적으로 풀어낼 수 없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대통령이 진정 ‘불통(不通)’을 해소하기 갈망한다면 결국 대도는 피를 토하는 자세로 교만을 털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에서 해방될 수 있는 현실적 해법은 무엇일까요?
답은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 서서 먼저 생각해보고 이해하라는 뜻이지요.
만약 역지사지의 자세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역지사지 적용해야 할 대표 사례가 박근혜 전 대표와의 갈등

이 대통령으로선 역지사지를 적용하지 못한, 그래서 그것을 적용해야 할 대표 사례가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의 해소되지 않는, 해소되지 못하는 갈등입니다.
이 대통령 입장에선 지난해 대통령후보 경선 때 ‘BBK 공세’를 필두로, 최근 ‘친박 복당 요구’ 등에 이르기까지 박 전 대표의 행보에 대해 개인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심경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박 전 대표를 끌어안는 결과를 내지 못하는 최대 원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의 교만’이라고 이 대통령이 발상할 때 비로소 문제는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대통령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박 전 대표의 입장이 돼서 세상을 잠깐 살펴볼까요.

사실 박 전 대표로선 지난 대선때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이, 그에 앞서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이 대통령에게 패배한 것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 전 대표가 ‘천막당사’의 황량한 질곡을 감내하면서, 생명을 잃을 수 있을 만큼의 위험을 헤쳐나가면서 노무현 정권 5년간 정권교체를 위해 그야말로 피와 눈물이 뒤범벅이돼 모든 것을 바치는 그때 이 대통령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요?

‘대통령 노무현의 실패’에 국민의 분노가 하늘 찌를 때 이 대통령은 무엇 했나

‘청계천 신화’?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돌아보면 노 전 대통령의 ‘수도 이전’강행 시도 때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자격으로 반대의 선봉에 섰던 그런 역사가 있긴 하네요.

그 정도네요.
뭐가 또 있나요?
그러고 보니 ‘대통령 노무현의 실패’에 대한 절대다수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때 이 대통령은 서울시청에서 본인의 전매특허인 ‘일’만 열심히 한 셈이네요.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한나라당을 ‘사수’해온 박 전 대표 입장에선 이 대통령은 ‘무임승차해 정권교체를 가로챈 점령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적지 않은 나이에 거꾸로 물구나무를 설만큼 단전호흡 등 기 수련을 통해 심신을 오래도록 닦아온 박 전 대표이기에 실제로 그가 이런 상실감에 힘겨워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대통령으로선 최소 이런 식으로 박 전 대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 말씀’같은 도덕군자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 대통령이 ‘승자의 여유’라도 갖는다면, 설령 그것마저 아니라도 향후 5년간 이 나라의 국가최고지도자로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소원한다면 필히 요구되는 ‘전술’차원이지요.
홍보? ‘나는 잘하는데 국민이 모른다’는 교만의 일방향성
역지사지를 적용해야 할 한 가지 사례만 더 들지요.
‘홍보’문제입니다.
이 대통령은 소통론을 제기한 직후 지난 대선 때 자신을 지지했던 언론인 출신 모임 ‘세종로포럼’회원들이나 캠프 홍보 담당자들과 잇따라 자리를 갖고 ‘홍보’를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對)국민 의사소통의 일환으로 홍보를 강화하는 조치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홍보는 기본적으로 일방향성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더욱이 ‘나는 잘하는데 국민이 모른다’는 식의 교만이 깔려 있을 때 홍보에 미련을 갖는 것이지요.
불가피하게 또 이 대목에서 노 전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떠올릴 수밖에 없네요.
이 대통령으로선 노 전 대통령 시절의 ‘국정홍보처’ 부활에 유혹을 느낄 수도 있어 보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홍보에 올인하다시피 한 노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한 것이야’라고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현 정부의 홍보 체제가 분산돼 기본적인 홍보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선 국정홍보처같은 집중화된 정부기구의 부활을 검토해 볼 가치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통은 역지사지의 쌍방향성일 때, 정부로선 국민의 입장에서 현상을 이해할 때 성립되는 것이지 일방향성의 홍보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청와대 참모진이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면 최우선적으로 교만을 경계해야
글 치고는 무척이나 길어졌습니다.
내친 김에 소통을 위한 구체적 방법론을 몇 가지 생각해보지요.
이 대통령은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제 자신이 바뀌고 청와대가 바뀌고 정부가 바뀌면, 머지않아 우리 사회도 조금씩 변화해 갈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이중 “제 자신을 바꾸겠다”는 이 대통령 본인의 의지 부분은 넘어가고 “청와대를 바꾸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들여다 볼 때 이 대통령에게 필요한 ‘행동강령’이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 인선과 관련,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라고 추켜세운바 있습니다.
무엇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인지에 대한 세간의 궁금증과 별개로 긍정적 의미라고 전제할 때 이 대통령은 참모진들에게 ‘경계’를 시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시 교만의 문제입니다.
청와대 참모진들이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면, 인간사 그렇듯이 쉽게 교만해질 수 있고 동시에 독선의 함정에 빠져 무능의 결과를 잉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이 대통령이 순서대로 잘 짚었듯이, 국민에 앞서 청와대 내부의 소통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청와대 참모들 자체적으로 ‘나 잘난 맛’에 취해 벽 치지 말아야
보다 바람직한 것은 청와대 참모들 자체적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나 잘난 맛’에 취해 개인간, 부서간 벽 치는 문화가 형성되지 않도록 나서는 것이지요.
이를 위한 방법이 그리 어려운 것도, 거창한 것도 아닙니다.
발이 부지런하면 됩니다.
서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만남의 문화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다들 경험하는 것이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석고처럼 굳어지기 쉽습니다.
청와대 참모진간에 서로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만나 두런두런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 소통은 진일보할 것입니다.
소통하려면 또 눈과 귀가 열려야 합니다.
정보화 시대라는 특성에 맞춰 언론과 인터넷에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여 세상사 돌아가는 현상과 흐름을 읽어 내는 것은 권력의 핵심부인 청와대 참모진들로선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마땅한 노력입니다.
정부 각료들 역시 마찬가지이겠지요.

빼놓을 수 없는 소통대상, 범보수우파 시민사회진영

이 대통령을 필두로 청와대 참모진과 정부 각료들 입장에서 자체적인 소통의 시도 다음으로 소통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순차적으로 범위를 넓혀 나가면 한나라당 그리고 통합민주당 등 야당의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이겠지요.
이 대통령으로선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통 대상이 있습니다.
범보수우파 시민사회진영입니다.

통합민주당 등 야당측의 ‘이 대통령 집권 이후 청와대 구경 한번 못했다’는 볼멘 소리도 전향적으로 접수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범보수우파 시민사회단체의 지도부라도 청와대 구경 한번 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올 초 ‘MB맨’이라는 어느 인사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의 별명이 ‘프롬 나우(From Now)´라고 말했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는 뜻으로, 사람을 판단할 때 과거나 특정한 편을 가리지 않고 그 사람이 앞으로 무엇을 할지에 중점을 둔다는 이 대통령의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가 함축된 것으로, 긍정 해석이 가능한 별칭입니다.
반면 동전의 양면처럼 이 프롬 나우에도 어두운 그늘이 드리웁니다.

‘프롬 나우’? 이 대통령, 벌써 강 다 건넜나?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린다’는 격언에 충실한 측면이 있지만, 여기에는 의문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상황에 대입하면, 대통령이 된 것으로 강을 다 건넌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정권교체를 위해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세월 각 분야에서 분투한 범보수우파 시민사회 진영이란 배가 이 대통령에게 그대로 버려도 될 배이냐는 것이지요.
유감스러운 현실이지만 이 대통령의 핵심 대선공약이자 승부수인 한반도대운하를 둘러싼 공방부터 이번의 광우병 파동에 이르기까지 이 대통령이 생생히 목격하는 것처럼 대한민국 사회는 대부분의 국가적 논쟁거리에 대해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간 전선으로 대치합니다.

때문에 이 나라의 대통령은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보수와 진보, 좌와 우를 아우르는 ‘국민 대통합’의 특별한 의지와 비법이 없는 한 자신의 집권 기반이 된 세력을 우선 하나로 묶어내야 그나마 원활한 국정 수행이 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프롬 나우에 경도돼서인지 범보수우파 시민사회진영에 무심하다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집권한 것은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건너편 강가 향해 배에 막 오른 것일 뿐

대통령이 된 것은, 집권을 한 것은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건너편 강가의 목표를 향해 배에 막 오른 것일 뿐 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이 대통령은 새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는 대통령이 된 것이 하나의 강을 건넌 것이라고 인정해도,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선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강을 건너야 하고 그 강을 건너기 위해 탈 배는 태생적으로 범보수우파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사족같지만 하나 더 짚을 것이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진보 자칭론’입니다.
이 대통령은 미래기획위원들과의 오찬에서 “사실 내 생각은 매우 진보적”이라며 “대선 때는 어느 후보보다 진보적 성향이 강한 후보로 분류되곤 했는데 대통령이 되고 나니 보수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을 접하면서 이 대통령이 개념에 대해 혼돈 상태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 대통령의 ‘진보 자칭론’은 우리 사회 좌우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

이 대통령에 대해 ‘진보적’이라는 평가는 개인적인 각도이고, ‘보수적’이라는 평가는 정책적인 각도가 아닌가요?
누구나 개인적인 각도에서 사안에 따라 진보적 성향을 띠기도 하고, 보수적 성향을 띠기도 하지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특성이 있지요.
정책적 각도에서도 사안에 따라 그런 유연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 대통령에 대해 보수라는 평가는 정책 기조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의 기본 정신·질서와 호흡을 같이한다는 뜻이지요.
아닌가요?
이 대통령의 혼돈은 ‘우파=보수’ ‘좌파=진보’라는 등식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데 대한 이해 부족에 따른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 대통령의 심경을 반영해 이 대통령을 평가한다면 개인적 성향은 ‘진보’, 정책적 성향은 ‘우파’가 적확하겠지요.
단지 ‘우파=보수’라는 우리 사회의 등식으로 인해 뭉뚱그려 ‘보수’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이 대통령이 소화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설마 이 대통령 본인이 ‘실용파’라는 이름으로 ‘우파’임을 부정하지는 않겠지요.

뉴라이트의 뒤집기, ‘우파≠보수’ ‘좌파≠진보’

정책 내지 이념적 분류법에 대해 중국의 예를 든다면 좌파의 기조로 탄생하고 그것이 ´지켜야 될´ 주체를 형성하고 있으니 한국과 달리 ‘좌파=보수’ ‘우파=진보’의 등식이 성립되는 식입니다.
북한도 중국과 마찬가지이지요.
범보수우파 시민사회진영 중 뉴라이트의 자유주의연대 계열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보수’의 나쁜 이름인 ‘수구’의 단어를 적용해 북한 지도부를 ‘수구좌파’로 규정짓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 좌파 성향 단체에 대해서도 ‘진보좌파’가 아닌 ‘수구좌파’로 명명했지요.
반면 뉴라이트 스스로는 ‘진보우파’의 개념을 채용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 집권과 함께 ‘진보’라는 단어가 우월한 의미로 맹위를 떨치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뉴라이트가 ‘우파=보수’ ‘좌파=진보’라는 통념을 뒤집기 위한 시도였지요.
이 대통령이 뉴라이트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진보’로 자칭했다면 고무적인 모색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안티맨’성향이 강한 야당 등 적군에 대한 ´역지사지´ 자세 더 간절

사족치고는 많이 늘어져 버렸네요.
본론으로 돌아가면 지난 10년 세월 청와대 근처도 못가본 범보수우파 시민사회진영에 이 대통령이 청와대 구경이라도 한번 시키면 그들의 마음을 그나마 달래고 소통의 영역을 의미 있게 확장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통합민주당 등 야당과 범진보좌파 시민사회진영에도 기회 주는 것 잊지 말아야겠지요.
사실 현실적으로 이 대통령으로선 청와대나 정부, 한나라당, 범보수우파 시민사회진영 등 ‘아군’과 더불어 ´적군´격인 야당이나 범진보좌파 시민사회진영에 대해서도 역지사지의 자세를 간절히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얘기되는 것처럼 ‘새는 좌우 양 날개로 나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스맨’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는 아군과 버금가게 ‘안티맨’경향이 강한 적군의 가치는 소중합니다.
당장의 난제인 광우병 파동만 해도 특정 정치세력의 저의가 깔려 있든 없든 그것과 무관하게 정부의 협상에 대한 광범위한 ‘안티운동’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우리 국민과 국가를 위한 방향으로 상황이 나아진 것 아니겠습니까?

´일체유심조‘의 평정심 더한다면 적군과 아군의 분별 있을 수 없어

역지사지의 자세에 더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는 뜻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평정심을 갖는다면, 국가최고지도자로서 어찌 적군과 아군에 분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럴 때 이 대통령이 기치로 내건 ‘실용주의’가 명실상부하게 빛을 발하고, 궁극적으로 ‘국민을 섬기는 이명박 정부’ ‘성공한 대통령 이명박’으로서 오늘도, 내일도 역사에 기록 될 것입니다.
이 대통령의 ‘소통론’에 눈이 갔다가 ‘…교만하지 않았는지…’에 눈이 확 뜨였지만 미루고 미루다 끝내 밤잠도 설친 채 오늘 새벽까지 이렇게 끄적이고 말았습니다.
글을 마치려다 보니 <책>처럼 하염없이 길어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명박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되새김질합니다.
왜?
답은 간단합니다.
‘대통령 이명박의 성공은 국민의 성공이자 국가의 성공’인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건방 떨지 마라’ 현판 새겨 이 대통령 액자 대신 걸어놓으면 어떨지

마무리하면서 이명박 정권 초기에 발생한 ‘인수위 파동’부터 ‘인사 파동’ ‘총선 공천 파동’ ‘광우병 파동’에 이르기까지 이들 ‘파동’을 관통하는 원초적 문제인 ‘교만’에서 해방될 수 있는 ‘쉬운 문구’하나 던집니다.
‘건방 떨지 마라’입니다.
이왕이면 이것을 현판으로 새기든, 액자로 만들든 해서 청와대와 정부 청사에 걸려있는 이 대통령 액자를 떼 내고 그 자리에 걸어놓는 것은 어떨까요?
기괴한 처방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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