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과 아서원] 유신정권 종말 부른 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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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과 아서원] 유신정권 종말 부른 그 밤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7.07.20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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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은 한식집 ‘한일관’에서, 김영삼은 중식집 ‘아서원’에서 단합대회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 아서원 깜짝 방문…김영삼 지지 호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이른바 10·26 사태다.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알린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인간 김재규’의 성향 문제를 떠나, 사회적으로는 이미 박정희 시대의 최후가 예견됐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린 응축된 힘은, 바로 1979년 5월 한식당 ‘한일관’과 중식당 ‘아서원’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 이철승이 ‘이 대표 추대 대연합의 밤’ 행사를 열었던 종로 한일관 ⓒ 한일관 홈페이지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는 이철승과 김영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세력은 이철승 쪽이 더 컸다. 당시 김영삼은 1975년 박정희와의 영수회담에서 맥없이 물러나며 내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반면 이철승은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이 김태촌 등을 동원해 김영삼 낙선 공작을 벌인 1976년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당선되며 세(勢)를 넓혀갔다.

1979년 5월 28일 〈경향신문〉은 “이철승 대표는 전당대회를 이틀 앞둔 28일 당권도전을 않고 있는 고흥문·이충환·유치송 최고위원계 등 3대 유력계보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조직 면에서 월등한 범리(凡李)세력 구축에 성공했다”고 썼다. 세력 싸움으로 갈 경우 이철승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뜻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29일, 이철승은 한일관에서 ‘이 대표 추대 대연합의 밤’ 행사를, 김영삼은 아서원에서 ‘민권의 밤’ 행사를 열었다. 서로의 세를 과시함과 동시에, 단합을 다지기 위한 이벤트였다. 

▲ ‘민권의 밤’ 행사에 깜짝 등장한 김대중은 이철승이 유리했던 1979년 전당대회 판도를 뒤집어 놨다 ⓒ 김영삼민주센터

그런데 이때 아서원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가택연금 중이었던 김대중이 깜짝 등장해 김영삼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때 김대중은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장기 가택연금을 당한 상태였다. 박정희 정권의 극심한 탄압으로 언론에서 이름 석 자를 찾아보기도 힘들었던 김대중이 나타나 필생의 라이벌 김영삼의 손을 잡은 이 사건은 전당대회 판도를 흔들어 놨다.

“반독재의 선두에서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이철승의 당권파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고 있는 김영삼 동지가 이번 경선에서 당선되는 것이 신민당을 살리는 길이고 국민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에 나는 김영삼 동지를 지지합니다.” 

김대중의 김영삼 지지 연설이 끝나자, 아서원은 열기로 가득 찼다. 김영삼 역시 “우리 두 사람의 동지가 7년 만에 함께 연설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민주 회복의 진보이며 눈물겨운 일”이라면서 “이제 이 나라의 민주 회복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증명하는 것, 내일은 위대한 민권의 승리를 다짐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이 일에 대해 1979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기록했다. “29일 밤 결전전야는 ‘황금의 폭격’설이 나도는 가운데 당외 유력인사의 입김으로 예측불허의 새 판도를 형성하고 김재광·박영록·조윤형 씨 등 세 후보의 극적인 후보사퇴 등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 당외 유력인사는 물론 김대중을 가리키는 말이다. 

▲ 한일관이 있던 장소에는 ‘그랑서울’이 들어섰고, 본점은 압구정으로 이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 시사오늘

운명의 날인 5월 30일, 1차 투표 결과는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였다. 어느 누구도 과반수를 얻지 못한 것이다. 1차 투표 후, 김대중은 다시 한 번 김영삼 돕기에 나섰다. 김대중은 이기택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용단해 달라’는 내용의 쪽지를 보냈고, 이기택은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에서 사퇴했다. 2차 투표 결과는 김영삼 378표 이철승 367표. 김영삼과 김대중이 함께 이룬 값진 승리였다. 

신민당 당수가 된 김영삼은 약속대로 강경한 대여(對與) 투쟁에 나섰다. 신민당 당사를 찾아온 YH 여공들을 보호하며 경찰 병력과 맞섰고, 경찰 연행 과정에서 YH 여공 김경숙이 사망하자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하며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예언한다”고 박정희 정권에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뉴욕타임스〉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다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결국 김영삼 제명 사건은 부마항쟁을 촉발했고, 이것이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됐다. 한일관과 아서원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아로새겨진 이유다. 

▲ 롯데호텔 신축과 함께 을지로1가에서 을지로4가 삼풍상가로 이전했던 아서원은 현재 폐점한 상태다 ⓒ 시사오늘

한편, 1939년 종로에서 개업한 뒤 3대째 가업으로 승계된 한일관은 현재 압구정·영등포·을지로·광화문·서울역·하남시 스타필드·압구정 갤러리아 등 총 7곳으로 확장해 운영되고 있다. ‘이 대표 추대 대연합의 밤’이 열렸던 종로 한일관은 2007년까지 운영하다가 폐업했고, 그 자리에는 ‘그랑서울’이 들어섰다.

1920년대 초 을지로1가에서 문을 열었던 아서원 역시 롯데호텔 신축 당시 롯데에 부지를 매각하고 을지로 4가 삼풍상가로 자리를 옮겼다. ‘민권의 밤’이 열린 곳은 을지로4가 시절 아서원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회합 장소로 자주 이용됐던 이곳은 문을 닫은 지 오래다. 지금은 아서원 출신 주방장들이 곳곳에서 개업,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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