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범의 뷰파인더] 〈블레이드 러너 2049〉, 끝의 가장 창대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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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의 뷰파인더] 〈블레이드 러너 2049〉, 끝의 가장 창대한 시작
  • 김기범 기자
  • 승인 2017.09.30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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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공지능을 꿈꾸는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기범 기자]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포스터 ⓒ 소니픽처스 코리아

인간은 영혼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동물이다.

살아 있는 동안 육체 속에 저장된 생생한 기억들도 그들이 생각하는 영혼의 일부일 것이다.

물론 과거에 대한 그 연결고리와 현재에 대한 집착을 통해 인간은 미래를 꿈꾸고 기약한다.

그러나 무한한 잠재력을 폭발시킬 때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인간의 상상력은 때로 우리를 거침없는 파국과 피폐로 몰고 가기도 한다.

점점 각박하고 혼탁해지는 현대인의 삶은 결국 암울과 삭막으로 귀착되고, 마침내 자문하게 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인가?”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그러한 존재론이 공상 과학 소설과 맞물려 승화된, 사이버 펑크 영화의 고전이자 전설로 추앙받는 작품이다.

그 파급력은 창대하다.

사이버 펑크 계열을 차용한 SF 필름들의 기준선이 될 만큼, 미래 디스토피아를 그린 장르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는 물론, 하다못해 유지태가 주연한 한국영화 <내츄럴 시티>도 알고 보면 <블레이드 러너>의 게놈 지도를 그대로 복제한 아류작이자, 해적판에 불과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생소했던, 영화 속 도시 구석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동양 문자들과 게이샤 느낌의 일본 여인은 기이한 음산함과 판타지라는 이국의 정서를 지나 파격적인 영상 혁명을 앞당겼다.

첨예화된 산업화의 열기를 피력하듯, 밝은 햇살이라곤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희뿌연 길거리와 늘 산성비로 점철된 끈적하고 눅눅한 밤공기는 언젠가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블레이드 러너>가 그려낸 멀지 않은 미래,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인류가 유전학적으로 만든 '리플리컨트' 라는 인조인간은 언젠가 사회 저항세력의 씨앗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남긴다.

이 우려는 80년대 고도 자본주의로 떠오르는 동양 문명권의 도전과 서구 세계의 응전의식의 발로이며, 더 나아가 백인 사회의 자기 보호 본능에서 기인한다.

리플리컨트는 자신들의 창조주와 거의 동등한 지적 능력과 훨씬 우월한 신체 능력을 지녔으나, 우주개발을 위한 전투원이나 섹스 인형처럼 인류의 노예로서만 사용된다.

하지만 자신들이 만들고도 자신들을 지배할지 모른다는 조물주의 피해의식 때문에 피조물의 인간 세계로의 입성은 철저히 부정하는 영화 속 이야기는 우리의 현재를 적확히 꿰뚫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숱한 복사판을 양산해 낸 <블레이드 러너>가 수십 년 만에 속편으로 재편된다는 소식은 첫사랑의 잔상처럼 이 영화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살아온 전 세계의 매니아들에게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안기기도 했다.

그 두려움이란 ‘전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영화계의 속설이 고스란히 재연될지도 모른다는 신경의 곤두섬이다.

그러나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연출한 드니 빌뇌브는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를 통해 그런 기우를 보기 좋게 날려 버렸다.

과학 기술이 최첨단화 된 미래 도시의 몽환과 황폐는 극대화 됐다.

그곳에 제대로 된 ‘진짜 인간’이 누구인지, 보는 이로서는 차라리 분간을 포기하게 만드는 보다 강화된 혼탁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인간의 퇴보를 가늠하게 한다.

35년 전, 상대적으로 뒤쳐진 기술력의 한계가 오히려 <블레이드 러너>의 음침한 신화를 만든 투박함을 낳았다면, 그 기원담을 이어받은 <블레이드 러너 2049>는 21세기의 옷을 입으며 더욱 세련되고 정적인 음울함을 발산한다.

인간으로서도, 리플리컨트로서도 늘 배척받으며 고뇌하는 라이언 고슬링의 무표정은 정체성 혼란과 자아 상실이라는 현대인의 병을 표출한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홀로 된 자신의 지친 육신과 영혼을 달래줄 유일한 안식처는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가상 세계에 불과하다.

숨 조이는 통제와 명령 체계 속에서 그나마 한 조각 위안이 되는 것은 과거 기억의 편린 속에 살아 숨 쉬는 일말의 가능성일 뿐이다. 

그 어렴풋한 희망에 파고가 밀려 올 때 즈음,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는 수 십 년 전의 블래스터 권총을 든 해리슨 포드다.

그러나 해리슨 포드는 기존 다른 영화의 속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관객들의 향수를 다듬거릴 중간 다리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을 안고 사라졌던 이 전작의 주인공은 새로운 주인공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앞으로 완전체를 완성시킬 골수의 모습을 오롯이 지켜 나간다.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환상과 욕망은 아나 디 아르마스와 실비아 혹스가 대변한다.

저열한 컴퓨터 그래픽은 최소화 한 채, 아날로그의 감성이 최대로 살아 있는 배경 속에서 무미건조한 말과 표정을 최첨단 비주얼로 과감히 입혀내며 정과 동을 아우르는 드니 빌뇌브야말로 전설의 기원을 창조한 리들리 스콧의 또 다른 리플리컨트다.

인간은 자기와 흡사한 인공지능이나 로봇을 만들어 냈지만 그것(!)들이 자신을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인간과 로봇은 감정과 기억의 차이가 있다.

로봇에게 강제로 입력된 데이터와 유사 감정은 인공지능의 이름으로 점점 자연스럽게 현실에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언젠가 메모리를 잃은 로봇이 우리에게 용도 폐기 당하듯, 자신이 지켜왔던 시공간과 세밀한 기억이 빗속의 눈물처럼 서서히 소멸되는 인간은 과연 얼마나 현저한 차별점이 있을까. 

우리가 사랑하고 집착하는 그 모든 것들과 애쓰며 이별하는 방식에 대한 해답을 어쩌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제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음습하고 어두운 거리, 국적을 알 수 없는 옷차림과 마천루 사이를 횡행하는 뇌쇄적인 여자의 얼굴.

그리고 마치 미완처럼 끝나는 마지막 여운은 전 세계 SF 매니아들에게 지난 수 십 년간 길고 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었다.

룻거 하우어의 마지막 명대사는 없지만, <블레이드 러너>의 적통이 지녀야 할 그 DNA와 기억을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충실히 이식해 낸다.

어떤 이들에겐 160여 분의 러닝 타임이 길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35년의 긴 세월을 기다렸던 이들에겐 매 시각 촉각이 곤두세워진다.

드니 빌뇌브는 혼재와 기괴로 충격을 선사했던 1982년의 <블레이드 러너>를 공감각적 비주얼과 숨 막히는 반전으로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더 흥분되는 점은 35년 전의 그 끝이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태어날 시간’(Time to be born)이다.

영화는 10월 12일 개봉한다. 15세 이상 관람가.

 


뱀의 발 : 한국 관객들의 입꼬리가 순간적으로 살짝 올라갈 만한 장면이 나온다.


★★★★

담당업무 : 에너지,물류,공기업,문화를 담당합니다.
좌우명 : 파천황 (破天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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