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위원님, YS 한번 만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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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위원님, YS 한번 만나시지요”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07.16 0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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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민자당 대선경선, YS-이종찬 ‘JP 잡기’ 신경전 치열
최형우 불도저식 밀어붙이기로 ‘김종필의 YS지지’ 이끌어내

⑧JP마음을 움직인 최형우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한 달 앞둔 92년 4월.

김영삼(YS)이 이끄는 민주계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정계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민정계는 박태준 이종찬 이한동 박준병 박철언 심명보 양창식 의원 등이 참여한 7인 중진위를 구성해 후보단일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민주계도 YS를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해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김윤환 등 당시 민정계 의원 9명으로부터 지지를 확보한 민주계는 김종필(JP)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YS는 JP와 친분이 있던 최재구 김영광 의원 등을 통해 ‘JP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JP는 알듯 모를 듯한 말만 되풀이 하며 입장을 유보하고 있었다.

JP가 입장을 유보하자, 민정계의 대표 주자였던 이종찬 의원은 JP로부터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청구동 자택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3당합당후 박철언 정무장관과 환담 중인 YS 사진제공=김영삼

급해진 건 YS였다. JP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 대선후보 경선 전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한 YS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 같은 고민을 해결한 사람이 다름 아닌 최형우였다.

최형우는 JP 포섭에 진척이 없자, JP의 최측근이었던 김용환을 국회 의원회관 1층 커피숍으로 불러냈다.

최형우는 자신의 스타일대로 거침없이 말했다.

“김 장관, 우리 YS 좀 밀어주소. 우리는 지금 사람이 없어요. 김 장관이 나서서 우리 한 번 YS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봅시다.”

최형우는 박정희 정권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김용환을 ‘김 장관’이라고 불렀다.

“저 같은 사람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당시 김용환은 이종찬을 지지키로 결심이 서 있었다. 때문에 이 같이 대답하며 완곡히 거절했다.

김용환 지지가 중요했던 게 아니라 JP 지지가 필요했던 최형우는 직접화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뭐 그렇다면 김 장관, JP나 한번 만나게 해 주시지요.”

“제가 얘기한다고 JP가 말을 듣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칩거 중 아닙니까, 거기다 대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JP는 당시 최고위원직 사표를 내고 청구동 자택에서 칩거 중이었다.

“김 장관이 그런 얘기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오랫동안 모셔온 분이 그 정도야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알았습니다, 말씀은 드려보지요.”

김용환은 최형우의 부탁을 형식적으로 답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김용환으로부터 대답이 없자 최형우는 직접 청구동 자택으로 처 들어갔다.

최형우가 거실에 들어갈 때, 마침  김용환은 2층에서 JP를 만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JP를 만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김용환은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JP가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도 올라가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최형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김 장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김 장관이 JP 심부름으로 상도동을 찾아 왔을 때,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YS를 안 만나고  그냥 가시겠소. 나는 오늘 여기서 자고 가는 한이 있어도 JP를 꼭 만나고 돌아가야겠소.”

김용환은 거침없는 최형우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김용환은 어쩔 수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내 한번 여쭤보기는 하겠지만….”

물론 JP는 “최형우를 내가 왜 만나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이미 최형우는 김용환을 따라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JP의 성난 목소리를 밖에서 듣고 있던 최형우는 “최고위원님, 저 최형웁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최형우의 목소리를 들은 JP는 하는 수 없이 최형우를 불러들였다.

사실 민주계는 JP가 ‘혹 할 만 한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YS가 대통령 후보에 오를 경우 JP에게 당권을 넘긴다는 것이었다.

최형우는 JP를 만나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최고위원님, 우리 YS를 한번 만나시지요.”

JP는 묵묵부답이었다.
“…….”

최형우는 말을 이었다.

“꼭 한번 만나셔야 합니다. 내일 모레(92년 4월 8일) 하얏트 호텔 커피숍으로 YS와 함께 나가겠습니다. 거절을 해도 만나서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난감한 표정을 짓던 JP가 특유의 쇳소리를 내면서 답했다.

“알았다.”

최형우가 마침내 JP로부터 ‘김영삼을 만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최형우는 JP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사실상 1등 공신 역할을 한 것. YS와 이종찬을 놓고 저울질 하던 JP가 마침내 상도동쪽으로 마음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4월 8일 하얏트 호텔. YS와 JP가 만나 의기투합을 하기에 이른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JP가 이날 YS 지지를 결심함에 따라 사실상 경선의 승패는 결정됐다. 결국 최형우는 YS가 대통령자리에 오르는데 결정적 수훈을 하게 된 것이다. <계속>
 

 
민정 민주 공화계 등 ‘김영삼 추대위원회’ 만들고…

YS, 마침내 집권여당인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92년 5월 19일은 민자당 대통령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 날이었다.
전당대회를 20여일 앞둔 4월28일 국회의원회관.

YS 진영은 세 과시를 겸해 추대위 결성식을 열었다. 민정 민주 공화계 등 현역의원을 포함, 2백40여명이 참석해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후보 추대위원회’를 만들었다.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추대위원회에 참석한 의원이나 위원장들은 전체 지구당 위원장 가운데 72%에 해당하는 1백70명이었다. 사실상 승부가 끝난 상황이었다.

추대위 면면을 살펴봐도 계파의 벽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명예 위원장인 김종필, 공동위원장 권익현 김재광 이병희, 부위원장 고명승 구자춘 김광수 김수한 김식 박세직 박용만 서정화 신상우 오세응 이종근 정재철 최형우 지연태, 대표간사 김윤환, 총괄간사 김종호 김용채 김덕룡, 고문단 김재순 민관식 김명윤 황인성 임방현 등으로 짜여졌다.

▲민자당 대선후보 경선전에 참석한 JP ⓒ사진제공=민주신문 김현수

추대위가 결성되던 날 YS는 후보가 된 것처럼 기뻐했다.

최형우도 이렇게 당시를 이렇게 소회한 적이 있다.

“추대위 결성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막 눈물이 나왔습니다. 정치입문 후 파란만장했던 일들이 흑백필름처럼 지나갔습니다. 결성식이 끝나고 YS가 저를 상도동으로 불렀는데, 들어갔더니 YS도 눈물을 머금으며 저를 꼭 안았습니다.”

7인 협의회에서 후보로 발탁된 이종찬도 이에 맞서 한판 승부를 위해 광화문에 선거캠프를 차렸다.

박태준이 선대위 명예위원장, 채문식, 윤길중이 각각 선대위원장과 고문을 맡았다. 하지만 7인협의회 중 이한동과 박준병은 YS 진영에 합류할 태세를 갖추는 등 상황은 이종찬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갔다.

YS는 유리한 형국에서도 자만하지 않고 ‘세’를 부풀려 나갔다.

22년 전 신민당 대선후보를 뽑는 전당대회에서 DJ에게 뼈아픈 역전패를 당한 기억 때문에, YS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오직 대선후보 경선 승리만을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특히 홍보와 조직에 관심을 기울였다. 홍보는 박관용, 조직은 김덕룡이 실무책임을 맡았다.
점차 YS 지지가 늘어나자 이종찬 진영은 ‘경선불참설’을 흘렸다.

그리고 경선 이틀전인 17일.

이종찬은 청와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자회견을 갖고 경선불참선언을 했다.

하지만 전당대회는 예정대로 5월 19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노태우와 세 최고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종찬 지지 대의원들도 대부분 참석했다. 투표결과 유효투표 6천6백32표 중 김영삼이 4천4백18표(66.6%)를 얻어 2천2백14표(33.4%)를 얻은 이종찬을 누르고 집권 여당인 민자당의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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