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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에 없는 6개월…소유권 논쟁보단 반성 필요
뜨겁게 타오른 6월, 군정종식 실패로 추웠던 12월
2018년 01월 10일 09:05:39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영화 <1987>이 흥행하며 정치권에선 '1987의 유산'을 두고 신경전이 진행 중이다. 1987의 주인공이 보수 세력이냐, 진보 세력이냐 하는 논쟁이다.

그런데 영화가 그려낸 것은 1987년의 절반에 불과하다. 영화는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부터 시작해 6월 항쟁까지 약 반년 간의 역사를 실존인물들을 토대로 그려낸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하지만 그 뒤에도 역사는 이어졌다. 직선제 개헌은 쟁취했지만, 뜨거웠던 6월에도 불구하고 군정종식은 이뤄지지 못했다. 1987년 12월 16일 제 13대 대통령 선거는 12·12 군사 반란의 주역 중 하나인 노태우의 승리로 끝났다.

이는 보수와 진보를 떠나 정치권에서 유산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서거직전까지도 당시를 회상하며 "책임을 통감한다"고 아쉬워한데서 찾을 수 있다.

영화가 그려내지 못한 1987년의 나머지 6개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왜 민주화 세력은 정권을 가져오지 못했을까. <시사오늘>은 영화 그 뒤의 시간을 추적해 봤다.<편집자 주>

   
▲ 1987년,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로 최종 담판을 벌이기 전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앉아있는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 ⓒ김영삼 자서전

6월 항쟁 이전에도 민주화 운동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정치권의 리더는 바로 한국 야권을 이끌던 YS와 김대중(DJ) 전 대통령 이었다. 따로 또 함께하던 두 사람은 손을 잡고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만들었고, 이를 모태로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해 1985년 제12대 총선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는 제도권 정치에서 대통령 직선제 논의의 틀을 만들면서 6월 항쟁이 실질적 개헌까지 이어지는 토대가 됐다.

실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민주화 세력에게 YS와 DJ는 압도적인 차기 대통령 주자였다. 6·29 선언 직전,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24일 YS와의 영수회담, 25일 DJ의 가택연금 해제조치를 취했다. 어느 쪽이든 나선다면 한국의 새로운 민주정부를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원초적인 부분에 존재했다.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인데, 두 사람 중 과연 누가 후보가 될 것 인가.

YS와 DJ는 정치적 뿌리(YS는 옛 민주당의 구파(舊派) 출신, DJ는 신파(新派)출신 이라고 볼 수 있다)부터 시작해서 지역기반 등은 달랐지만 군정을 종식해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은 한결 같았다. 세간의 관심은 YS와 DJ의 단일화로 쏠렸다.

1987년 8월 8일

통일민주당은 깃발을 올린다. 그리고 사면복권과 함께 정치권에 공식적으로 돌아온 DJ는 통일민주당에 입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다. 이 때 까지만 해도 YS와 DJ는 현판식을 하며 나란히 서서 환하게 웃었다. 통일민주당은 YS 총재, DJ 상임고문 체제로 돌입하고, 다가오는 대선을 향한 양측의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1987년 8월 11일

YS와 DJ의 첫 단일화 협상이 시작됐다. 당사자들에 앞서 YS의 상도동계, DJ의 동교동계 인사들은 긴 전투를 직감했다. 서로 후보가 돼야 하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한 치 양보없는 설전에 들어갔다. 상도동계의 대표는 故김동영, 동교동계의 대표는 이용희였다.

"YS는 DJ가 비공개 회동에서 결국 대선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뉘앙스로 말했고, 이를 철썩같이 믿었다고 했다" - 김덕룡(상도동계)

"오히려 YS가 DJ에게 대선후보를 양보할 의향이 있으니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라고 먼저 말했다" -한화갑(동교동계)

1987년 9월 14일

DJ가 9월 8일부터 지방 순회를 하면서 바람몰이에 나서자, YS는 지방순회 중단을 요구하면서 후보 조기 단일화를 제안했다. DJ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미창당 지구당 분할에 대해서 역제안을 한다.

당시 지구당위원장(당협위원장)이 공석(空席)인 곳이 36곳이었다. 18대18로 동등히 나누자는 입장의 YS에게, DJ는 이미 YS계의 지구당위원장이 더 많다는 이유로 10곳을 더 많이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23대13으로 나눠야 한다는 게 동교동 측 입장이었다.

상도동계 내에선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며 강한 반발이 일었다.

1987년 9월 29일

YS와 DJ는 외교구락부에서 단일화를 위해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의 단일화가 늦어지자 민주화 세력은 초조해졌다. 언론도 이를 9·29 회동이라고 부르며 모든 이목을 집중시켰다. 단일화가 성사될 수 있는 사실상의 마지노선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회동 이후 사실상 YS와 DJ는 결별한다.

DJ가 이미 독자출마를 결심했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다음은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YS계의 핵심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이 지난해 2월 본지 인터뷰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많은 이들이 YS와 DJ, 양김 단일화 실패를 궁금해 한다. 당시 통일민주당 당사가 서울역 뒤에 있었다. YS가 총재고, DJ가 고문으로 있었는데, 군부를 종식시키기 위해선 양김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 당사에서 몇 시간이 가더라도 끝장 토론을 하자고 했다. 점심을 설렁탕을 시켜놓고. 오전 10시 부턴가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몇 시간이 지나 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나니 DJ 차례가 됐다. 사실상 단일화 여부가 달려있는 상황에서 DJ가 단상에 올라서 입을 열었다.

‘군부와 싸우고 아스팔트 길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끌려가고 옥살이를 했던 건 김영삼 총재 아니냐. 나도 외국에서 투쟁했지만 국내 현장에서 제일 고생했던 사람이 YS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까지 DJ가 말을 마쳤다. 우리 상도동계 사람들은 모두 아, 드디어 단일화가 이뤄지는 구나 하고 들떠있었다. 그런데 DJ의 비서가 갑자기 단상으로 다가가 쪽지를 한 장 건넸다. 쪽지를 받아 읽은 DJ가 ‘함석헌 씨가 운명 직전인데, 자신을 보고 싶어 하니 을지로 백병원으로 빨리 가 봐야 겠다’라고 말하기에 우리는 다들 큰일이 났다고 빨리 가보라고 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이는 거짓말이었다. 함석헌은 그 당시 비서와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자리를 모면하려는 것이었고, 처음부터 DJ는 독자 출마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DJ의 이러한 행보의 뒤엔 일명 ‘4자 필승론’이라는 논리가 있었다. 대선주자인 노태우, YS, 김종필(JP) 과 자신 이렇게 4인이 모두 대선에 출마할 경우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동교동계 참모들 중 조윤형과 박영록 등이 이러한 전략을 제시했다.

이는 지역구도를 기반으로, 노태우와 YS가 영남 표를 나눠 갖고, 김종필이 충청 표를 가져가면 DJ 자신이 호남 표와 수도권 표를 묶어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다.

미리 결과부터 언급하자면, 지역적인 구도에 한해 4자 필승론은 얼추 들어맞았다. 노태우는 경기‧경북‧대구‧강원‧인천‧충북‧제주에서 우세했다. YS는 경남과 부산, DJ는 호남과 서울에서 각각 우세했다. JP는 충남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는 판단착오로 밝혀졌다. 최종 결과에서 DJ는 YS보다도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1987년 10월 10일

YS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했다.

1987년 10월 22일

최종 담판을 위해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난 YS는 DJ의 미창당 지구당 관련 요구도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경선을 제안했다. 그런데 DJ는 이미 일정이 늦었다는 이유로 경선을 거부했다. 당시 상황을 YS와 DJ의 자서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제 후보단일화를 위해서는 경선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첫째, 경선은 공평한 게임이었고, 김대중은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둘째, 예측할 수 없는 경선을 통해 단일화가 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 결과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이다.” - YS 자서전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12페이지 中

“김영삼은 내가 요구한 미창당지구당 조직책 임명권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선거일정상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사실상 후보단일화 협상은 결렬됐다.” - DJ 자서전 <김대중 자서전> 503페이지 中

1987년 10월 28일

DJ는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독자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득표 우세후보 지도. ⓒ위키백과 13대 대통령 선거항목 캡처

1987년 12월 16일

28%를 얻은 YS와 27%를 얻은 DJ는 함께 패했다. 민정당의 노태우는 36.6%라는 낮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거머쥐었다. YS와 DJ의 표를 합치면 무려 55%였고, 표 숫자로는 약 1천200만표, 노태우와 JP의 표를 합친 1천만 여 표를 상회하는 수치였다.

결과론적으로 민주세력의 분열로 인해, 한국정치는 6월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다시 군사정권의 연장선에 서게 된다. 물론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직선제 쟁취는 이후 YS의 문민정부, DJ의 국민의 정부를 여는 초석이 됐다.

그러나 정치지도자의 오판으로 인한 1987년 하반기의 단일화 실패는 민주화를 염원했던 세력에겐 상처로 남았다. YS는 서거직전까지도 당시를 회상하며 "단일화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아쉬워했다.

1987년 12월 31일

YS와 DJ가 함께 만들었던 민추협은 1987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자로 해산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다시는 함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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