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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약사봉] 전설의 고향 같은 ´장준하 의문사´의 그곳
˝박정희야, 박정희야˝…YS·DJ와 거사 계획 중 숨진 채 발견된 ´현장에서´
2018년 05월 24일 21:40:21 윤진석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윤진석 기자)

   
▲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에 저항하던 장준하 선생은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계곡을 건너면 장준하 선생의 사체를 눕힌 검안바위와 사체발견 장소를 확인 할 수 있다.ⓒ시사오늘.

‘약사봉에 얽힌 어느 거목(巨木)의 의문사.’

의문투성이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는 한 편의 ‘전설의 고향’과도 같다.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약사봉은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린 장준하(張俊河 1918~1975)선생이 의문사한 곳이다. 선생은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이자, 사상가였고, 학자였다. 월간종합교양지 <사상계> 발행인이자, 반독재투쟁에 앞장선 민주주의자였다. 특히 장 선생은 좌우 이념을 떠난 민족주의자, 통일론자였다. 빈껍데기의 이데올로기를 장신구 삼아 진영 싸움에 이용하는 편 가르기 무리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도의 길을 걷는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거사를 준비하던 중 D-DAY 딱 3일을 남기고, 1975년 8월 17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산악회 회원 40여 명과 약사봉에 올라갔다가 일행과 떨어져 하산하던 중 높이 12m 정도의 벼랑 아래에서 떨어져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당국은 최후 동행인이자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의 증언을 토대로 실족사로 결론 내렸지만, 주변은 믿지 않았다. 추락사로 발표되었음에도 마치 원형 모양의 둔기로 맞은 듯한 후두부 함몰골절 외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다는 점은 타살의혹을 더욱 부채질했다.

오른쪽 귀 뒤에 가로 세로 2 cm 가량의 흉기로 찍힌 자국이 있는 점, 팔과 엉덩이에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던 점, 목격자인 김용환 씨의 정체가 불명확한 점, 억지로 끌려간 듯한 흔적이 있는 것처럼 어깨 안쪽에 피멍이 있던 점, 경사 75도의 가파른 암벽이라 장비 없이는 내려갈 수 없는데도 어떻게 굳이 내려가 추락하게 된 것인지 등 타살로 의심되는 부분은 여럿 됐다.

더욱이 타살 의혹을 최초로 보도한 동아일보 장봉진 기자가 유언비어를 날조했다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것도 대중의 의심을 키우는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의문투성이 죽음의 실체를 두고,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암살에 있다고 암암리에 입을 모았다. 이를 방증하는 것이 험준한 약사봉 한편에 세워진 비문의 글귀다.

   
▲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추모하는 비문이 포천 약사봉 계곡 한 편에 세워져 있다.ⓒ시사오늘

“장준하 선생님 원통히 숨진 곳.”

추모하는 이들이 새긴 것으로, 전문은 이렇다.

오호,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 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이 맨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뿌리 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옮겨 증언하라.

돌아가신 날 1975.8.17
비를 세운 날 1975.9.17
-故 장준하 선생 추모동지 일동-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5년. 비문에 얽힌 사건을 취재한 윤재걸 동아일보 기자는 <신동아>를 통해 '장준하, 그 의문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며 의미심장한 물음표를 던졌다.

“생전에 그를 따르던 많은 인사들과 젊은이들은 ‘선생의 죽음은 결코 단순 실족사가 아니다’라고 거듭 주장하며, ‘언젠가는 선생님의 원통한 죽음이 세상에 밝혀질 날이 꼭 오고야 말 것’이라고 ‘의문의 변사’임을 암암리에 시사하고 있다.”

세월은 또 흘러 2012년이 됐다. 그해 8월 20일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전당대회가 열렸고, 故박정희 전 대통령 딸 박근혜 당시 경선자는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후보로 선출됐다.

묘하게도 같은 달 8월 1일 박정희 정권에서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37년 만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폭우 피해로 장준하 선생이 묻혀 있던 파주시 나사렛공동묘소 뒤편의 석축이 붕괴됐고, 시 관할의 탄현면 통일동산으로 유골을 이장하게 되면서 무덤의 문이 열린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세상을 향해 그의 유골은 말을 건네고 있었다. 과거 결정적 타살 의혹을 일으킨, 즉 망치 같은 것에 의해 가격된 듯 보이는 지름 5~6cm 크기의 원형 모양의 두개골 함몰골절이 이장시 재조사 과정에서 유골 감식결과를 통해 다시금 확인된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동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핏대를 세우며 호령하듯 규정한 바 있다.

“이건 박정희의 비겁한 학살이요, 암살입니다.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얼마나 악랄하게 사람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죽이고 해방 통일운동을 죽였느냐! 그게 이번에 드러났어요. 유신 잔당을 청산해야 할 구체적인 자료가 드러난 거예요.”

   
▲ 장준하 선생의 포천 약사봉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시사오늘

감식 결과에 따라 ‘장준하 의문사’는 진상재조사 요구의 봇물을 터트리며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장준하 기념사업회를 필두로 생전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故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상임고문을 맡고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를 발족해 재조사에 앞장섰다.

이는 과거 민주화세력을 잇는 연결고리가 됐다.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과 맞서 싸웠던 YS 상도동계와 DJ 동교동계인 민주화세력은 박근혜 후보가 대선후보로 선출된 것과 ‘장준하 의문사 재조명’에 주목하며 “제2 박정희 정권이 부활돼서는 안 된다, 역사의 시간이 거꾸로 퇴보해서도 안 된다”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87년 대선에서 분열됐던 양대 민주화세력이 당시를 반면교사 삼아 다시 뭉칠 절실함을 안고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혹자는 일련의 현상에 대해 유신세력의 부활을 막기 위한 민주세력의 부활, 이른바 ‘장준하 대 박정희’, ‘민주세력 대 유신세력’ 을 둘러싼 망자간의 싸움이라고 했다. 장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씨도 2012년 9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유신의 망령을 잠재우기 위해 유골이 드러난 것일 수 있다는 데 공감하며, 민주세력 원로들의 말을 전했다.

“아버지 지인들께서 '옛날에 장 선생이 신한당과 민주당의 통합을 일궈내 단일후보를 냈는데 수십 년이 지나 박정희 망령이 다시 나타날 때 장 선생이 나타나서 소원한 동교동과 상도동 관계를 뭉쳐놨다. 어마어마한 일을 해놨다'고 해요.”

대선을 앞두고 '민주 대 유신' 망자간의 싸움이라는 설이 들릴 만큼 ‘장준하와 박정희’의 역사적 골은 깊었다. '박정희'의 정적이 YS와 DJ 였다면, 치명적인 천적은 '장준하'였다. ‘박정희’에게 ‘장준하’는 자신의 치부를 너무도 잘 아는 천적이었다. 아킬레스였다. 장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씨는 2012년 9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둘의 관계에 대해 ‘천적’에 빗댔다.

“박정희 시절 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박정희와 장준하는 정적이 아닌 천적 관계'라고 했답니다. 한쪽은 광복군 장교이였고 다른 쪽은 일본군 장교였습니다. 광복이 되어서는 한쪽은 민족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다른 쪽은 남로당 문제로 사형을 당할 뻔하다가 배신하고 숨었습니다. 장 선생은 언론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며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했고 그러다가 4·19혁명을 거쳐 정말 제대로 해보려는 순간 박정희가 총칼을 들고 홀라당 나라를 말아먹었습니다. 장 선생이 이렇게 말했어요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한 놈은 안 되는데 그게 바로 박정희다. 내 민족적 자존심이 허락 안 한다.' 광복절이 되면 장 선생은 독립군가와 '희망의 나라' 같은 것을 불렀는데 박정희는 술 먹으면 '엔까'하고 일본 군가를 불렀습니다. 장 선생이 민족적 차원에서 박정희는 안 된다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준하 의문사’를 보도한 윤재걸 동아일보 기자도 장호권 씨 설명과 맥을 같이 했다. 그 또한 장준하 전집 <돌베개>에 나온 내용을 취재하면서 ‘왜 박정희가 장준하를 그렇게 증오하고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의문의 실타래를 풀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장준하 입장에서 박정희는 매국노고 친일주의자다, 일본이 패망하니까 장준하 밑의 독립군 부대에 들어와 거기 은신해 살아남은 놈이다, 그런 놈이기 때문에 절대 대통령 될 수 없는 놈이다! 근데 그것이 박정희의 자존심을 가장 상하게 한 거예요.” <윤재걸, 2012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 중>

‘박정희’에게 ‘장준하’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일화는 많다. <김영삼과 박정희>의 저자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이 생전에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소개한 바에 따르면 ‘박정희’가 재선에 성공해 대통령 취임식을 하던 날 안국동 신민당 당사 옥상에서 들려오던 '장준하'의 부정선거 연설은 두고두고 회자가 됐다.

'장준하'는 그날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 의원 등의 연설이 있고 본인 차례가 되자 “박정희야!, 박정희야!, 박정희야!”만을 피라도 토할 것처럼 외치고 내려왔다.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일본군 장교였던 사람이 대통령에 취임해 불법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일들이 발생하자 장 선생은 그런 연설을 했던 것으로 안다”며 “아마도 그런 꼴을 보느니 차리리 피를 토하고 죽고 싶다는 절규로 자신의 가슴을 후벼팠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장준하'는 '박정희'의 7·4남북공동성명서 등 지지할 것은 지지했다.

“통일문제연구소의 백기완 선생이 어떤 말을 했느냐면…, 7·4 남북 공동성명서 있었잖아요? 백기완 선생이 하루는 장준하 선생을 찾아가서 ‘선생님, 박정희 김일성 두 사람이 사기 치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은 거예요. 그랬더니 장준하가 뭐라고 그런 줄 알아요? ‘사기 치든 어쨌든 간에 통일은 아름다운 것이다. 박정희가 그렇게 해서 통일한다면 우리는 박정희를 도와줘야 한다’라고 얘기했을 정도예요. 물론 나중에 사기 친 것을 알고 엄청나게 화를 낸 걸로 알지만, 장 선생은 이처럼 박정희의 7·4 남북공동성명 초창기 때는 찬성을 했어요. 반대했다는 소리는 없어요. 백기완 선생 말대로 장 선생은 통일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바쳐야 할 지고지순의 과제로 여긴 분입니다.” <윤재걸 전 동아일보기자, 2012년 <시사오늘>인터뷰 중>

'장준하' 행보와 달리 ‘박정희’에게 그는 양립할 수 없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윤재걸 기자는 전했다. 그만큼 장 선생의 사회정치적 영향력은 컸다.

“장준하가 동대문을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전의 일인데, 박정희가 허위사실유포죄로 장준하를 옥에 가뒀어요. 그런데 장준하가 옥중에서도 출마한 거예요. 어찌 보면 죄인이 출마한 셈인데, 결국 장준하가 당선된 거예요. 이게 뭘 의미했겠어요. ‘박정희, 네가 틀렸다’, 박 전 대통령 역시 국민의 열렬한 지지때문에 한 달 만에 바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죠. 이처럼 장준하 선생은 끝까지 굽힘이 없었어요. 70년대 당시, 그는 재야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전국민주화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어요. 등산이라는 명목으로 제주도부터 광주 등 한반도 백두대간 곳곳 주요 인물들을 일일이 다 만났어요. 그게 바로 75년 8월 20일 장 선생이 하려고 했던 거사였습니다.”

박정희 정부의 끈질긴 감시에도 장준하 선생은 YS, DJ,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모종의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면서 30년 넘게 보관해 온 임시정부의 태극기를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고, 백범 묘소와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묘소를 찾는 등 신변을 정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떤 내용의 거사였는지는 모르나, 한 언론사에서 밝힌 장호권 씨의 주장에 따르면 훗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총으로 쏜 김재규 등 군내 세력 일부와도 연계한 거사였던 듯하다.

하지만 8월 20일로 예정된 거사를 3일 남겨두고 장 선생은 명을 달리했다. 8월 17일 산행 또한 거사를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는지 모르고, 죽음으로 유도하기 위한 누군가의 계획이었는지도 모른다. 윤재걸 기자는 후자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날(17일) 등산은 장준하의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매주 함께 가던 (이철우 백기완 전대열) 동지들과 쉬기로 약속했던 분이 어째서 혼자서 산에 가게 되었는가? 이 날 사고가 없었더라면 이 문제는 아무런 얘깃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날 산행에서 장준하는 희생되었고 그 내면을 파헤치려면 근본 원인을 따져야만 하는 것이다. 등산을 가자고 권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장준하 선생 20주기 추모문집 <광복 50년과 장준하>에 게재된 전대열 평론집 <장준하 죽음의 진상> 중>

어쩌면 주검이 발견된 현장 자체가 숨진 곳이 아닐 수도 있다. 윤재걸 기자가 쓴 <장준하, 그 의문의 죽음> 서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장 선생은 문제의 사고 현장에 아예 가지 않으셨는지도 모른다. 여러 사실을 종합해 볼 경우, 추락사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락사를 가장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위치로 옮겨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진짜로 숨진 장소 또한 부정확한 가운데 ‘장준하 의문사조사위’ 2기 팀장을 맡았던 고상만 전 조사관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작성한 위해분자 관찰계획보고야말로 '장준하 의문사'를 풀 핵심 열쇠라고 지목한 바 있다. 이 자료에 기록된 '공작 필요시 보고 후 조치' (1975년 3월 31일 자)를 통해 공권력이 개입됐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 선생에 대한 암살 계획을 추정할 수 있는 '위해분자 관찰 보고서'가 작성된 후 이 자료만 1975년 4월부터 8월 18일까지 3급 비밀로 됐다. 더욱 의문인 건 장 선생 사건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30분 단위의 보고가 들어갔다. 그런데 약사봉 갈 당시의 기록은 하나도 없다. 8월 18일자로 상급 비밀자료가 해지됐고 그 문서를 작성한 담당자는 일주일간 휴가를 떠났다.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2012.9.26.고상만 전 조사관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긴급간담회’중>

2기 조사위에서 작성한 자료 확인 결과 국정원은 1964년 3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장 선생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동향을 날짜와 시간별로 기록했다. 24시간 감청은 기본, 장 선생과 함께 활동한 인물들 관련 별도의 인물카드를 작성했을 거라는 것 역시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장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것이다. 그런데 약사봉 기록은 없다니 의아하지 않을 없다고 고 전 조사관은 일갈했다. 이 문제는 물증과 심증이 있지만, 장 선생의 죽음이 명확히 규명되지 못하고 여전히 의문투성이로 남아있는 원인이 되고 있다.

‘장준하 의문사 진상규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인에 대한 진상 조사위에서 한 의학자의 근거를 토대로 2013년 잠정 타살로 결론짓긴 했지만 공식적인 것은 아닌데다 공권력 개입 여부 등 풀어야 할 숙제는 많다. 희망적이라면, 진실은 더디긴 해도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것이 우리 사회 한편에 통용되는 상식이라는 것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세월호 참사’ 충격 이후 항간에 들불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다. 노랫말이 된 이 구절은 광화문 광장의 촛불동력이 됐고, 세월호는 선체내부가 일부 공개되며 침몰의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라는 사자성어도 있다. 중국 원나라 문학작품에서 유래된 것으로 쫓기던 한 마리의 타조가 풀숲에 머리를 숨겼지만 미처 꼬리를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것을 일컫는다. 첨부터 꼬리를 드러낸 ‘장준하 의문사’ 또한 언제까지 ‘눈 가리고 아웅 ’만 할 수 없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장준하 선생의 유골은 미래를 위해 나타났다”고 해석한 아들 장호권 씨의 강조점은 몇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인상적이다.

“아버지의 사인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타살일 경우 과거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단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친일·유신 잔당인 독버섯들의 최고 약점이 바로 의문사 사건입니다. 그냥 독재를 하고 부정으로 부를 축적하는 수준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것을 건드리려고 하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막습니다. 그걸 내주면 끝장인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때문에 범국민 차원에서 과거에 잘못된 것을 전체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독재세력들이 (2012년) 대선에서 친일·유신의 원조인 박정희의 딸을 내세워 수면 위로 올라와 과거의 영광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과거가 묻히고 똑같은 잘못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미래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은 반드시 돼야 합니다." <장호권, 2012년 <시사오늘>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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